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강명관 지음 / 소명출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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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건대, 강명관 교수의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는 한국문학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사와 한국철학, 나아가 넓은 의미의 '한국학'(저자에 따르면 이것 역시 심히 문제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을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사람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강명관 교수가 줄곧 주장하는 바, 곧 한국문학사가 '민족'이라는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민족주의를 공고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고 또한 '근대'라는 서구중심적 목적론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민족과 근대에 대한 편집증이 이 땅에서 펼쳐진 문학 활동 및 사상의 전개 양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정형화시켰는지 강명관 교수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학자는 없었다. 특히 그가 '제도적으로' 속해 있는 학문 분과인 '한국고전문학' 쪽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한문학 역시 국문학의 일부라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한문학이 국문학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명관 교수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적 열정에 들려 국문학사를 구상하던 사람들이 단지 '남의 글자'로 씌어졌다는 이유로 한문학을 국문학에서 몰아내려 했던 시도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순수성과 우월성이 학적 연구와 결합할 때 잉태될 수 있는 지적 폭력을 낱낱이 고발한다. 한문학의 자산이 완전히 부정될 경우 개화기 이전의 국문학은 더할 수 없이 가난해진다는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정도는 과욕이 빚어낸 시행착오쯤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이 '근대'를 향한 열망과 결합되면 사정은 심각해진다. 근대를 확고한 기준으로 삼고 모든 문학적 운동이 근대를 정점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관점 아래 문학사를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과 발전상 자체를 치명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조선 후기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말 가운데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것이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해, 민족주의와 더불어 근대성의 한 축을 이루는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형성될 조건이 조선에서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리고 이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테제가 바로 1970년대 한국 학계의 주도적 담론이었던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바는 조선의 근대적 성격이 개항과 더불어 '이식'된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발현되고 있었던 것임을 밝힘으로써,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함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강명관 교수에 따르면 근대는 서구에 한정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에, 식민사관의 극복에만 얽매인 나머지 근대성의 단초를 찾아내고 이를 역사적 발전의 자연스런 전개과정으로 봉합시키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사에서 서양사를 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어 역사 기술의 왜곡과 오류, 기형화를 필연적으로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낳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미 정답으로서의 결론을 미리 전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사 내부에서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는 그것의 객관적 존재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구 결과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인 스스로 식민지 사학의 정체론을 인정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한국인의 트라우마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도 근대로 향한 자생적 주체적 발전경로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부정의 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106쪽)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근대/근대의 도식적 이항대립들을 달달 외워왔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곧 근대로의 이행과정이라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주자학/실학, 한문학/국문학, 이(理)/기(氣), 평시조/사설시조, 사대부/평민 등등. 강명관 교수가 이 책에서,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 작년 여름에 한꺼번에 발간한 [안쪽과 바깥쪽],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에서 동시에 천착하는 작업은 이러한 이항대립이 국(문학)사에서 근대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구축된 상상적 가공물임을 자세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주자학이라는 탁상공론의 관념세계를 탈피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 실용적인 학문이자, 중국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토착 학문으로, 자생적인 근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실학은 부분적으로 주자학과 차별되는 면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주자학을 대체하고자 했던 학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으며, 오히려 주자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이 더욱 강했던 학적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강명관 교수의 주장이다. 즉 어떻게든 근대적인 무언가를 찾아내고 이를 개념화하려는 의지가 앞서 나열한 대립쌍들을 구성하여 한쪽을 열등한 전근대적인 것으로, 다른 한쪽을 우월한 근대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잡으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강명관 교수의 결론은 자명하다. 자생적 근대성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 설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다고 믿어 왔던 '조선 후기의 근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구의 '근대 찾기'가 만들어낸 가공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내부에 있는 서구사는 명백히 타자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주체를 찾는다면서 헤맨 끝에 우리는 나의 내부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고 주체로 오인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중세니 근대니 하는 시대 구분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 구분을 따른다면, 서구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서구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162-163쪽)

강명관 교수의 결론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 문장들에는 한국학, 아니 식민주의를 경험한 비서구에서의 '자생적' 학문이 결코 피해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고민과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소 원론적이고 상투적인 문제 제기에 불과하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세한 찬반여부를 떠나서 강명관 교수의 주장을 일단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면밀한 당대적 인식 아래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거친 뒤에 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강명관 교수는 사후적으로 구축된 현재의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텍스트의 구성요소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해당 텍스트가 생산된 당대의 맥락에 텍스트를 배치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절실함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문학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법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민족과 근대라는 개념을 집어던지든, 아니면 좀더 믿어보든지 간에, 힘들더라도 먼저 텍스트 하나하나를 자세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이 모든 것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학이란 무엇인가, '민족' 없이 한국문학, 한국역사, 한국철학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라는 문제설정 대신 그 무엇으로 생성과 변이를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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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1-1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량님,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
저도 이제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돼서 그렇지 않아도 이런 류의 책들을 찾고 있던
참인데, 마침 사량님이 좋은 선물을 하나 주셨네요. ^^
앞으로도 좋은 선물 계속 부탁해용~~~

사량 2008-01-1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 님께서 저와 알라디너들에게 선사한 선물들을 생각하면 마지막 문장이 심히 부담되는 걸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셨다니 무척 궁금합니다. 발마스 님 서재에서 관련 이야기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balmas 2008-01-3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앞으로 이쪽 이야기를 좀더 자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