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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삶 -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자크 데리다 외 지음, 마이클 페인.존 샤드 엮음, 강우성.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이론 이후 삶]은 이 책의 편집자가 자크 데리다, 프랭크 커모드, 크리스토퍼 노리스, 토릴 모이, 이렇게 네 사람의 거물들과 개별적으로 진행한 대담 및 토론을 모은 책이다. 영미 학계에서 문학 연구의 주류로 부상한 뒤로 한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다 최근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는 '이론 연구'의 공과를 되짚고, 이론 및 이론의 쇠락이 가져올 문학 연구의 변화가 어떠할지 모색해 보는 기획에서 마련된 대담집이지만, 네 사람이 각자 삼고 있는 화두는 조금씩 다르다. 데리다의 경우 이론, 위증, 약속, 유령, 여성, 윤리, 종교, 책임 등 자신의 관심사를 두루 들춰보이고 있고(그러나 토론의 전제가 되는 데리다의 강연문이 빠진 채 강연 다음 날의 토론문만 들어 있어 감질만 오르게 한다), 노리스는 문학과 철학의 관련상 및 해체론에 대한 속류적 이해가 불러왔던 폐해들을 논의하는 데 집중하며, 모이는 페미니즘 일반과 자신의 지적 여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이론의 보편성과 정치성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데리다의 사진과 서명을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이 책의 표지는 부당하고 또 뻔뻔하다. 데리다가 참석한 토론문이 분량상으로는 가장 많고, 나머지 세 사람의 대담에서 데리다가 빠짐없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 모든 논의들을 데리다만의 것으로 포장하여 마치 데리다의 책인 양 팔아먹으려는 시도는 얄팍한 상술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황당해서 원서 표지를 찾아 보았더니, 거기에는 특정 인물의 사진 같은 것 없이 데리다와 커모드, 노리스와 모이의 이름이 똑같은 크기와 글자체로 공평하게 찍혀 있거늘, 이 무슨 몰염치인지. (물론 번역본에도 오른쪽 하단에 대담 참여자가 '공평하게' 적혀 있기는 하다.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옮긴이들 이름은 번역의 노고가 무색하게 정말 작은 글씨로 써놨다;;) 책을 펼쳐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면 또 한번 실소를 머금게 된다. 데리다의 주요 저서가 "[그라마톨로지], [에코그라피], [시네퐁주], [글쓰기와 차이], [법의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에코그라피]와 [시네퐁주]는 각기 나름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70여 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저서 가운데 두세 번째로 언급될 만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저 책들을 데리다의 대표작으로 굳이 거론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 두 권과 [그라마톨로지]는 이 책을 출간한 '민음사'에서 발행한 바 있는 책들인 것이다! '발행한 바'라고 쓴 건 공교롭게도 세 권 모두 절판되어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라마톨로지]는 동문선에서 새로 번역해서 냈다)어차피 자기네가 새로 펴내지도 않는 책들인데, 쉽게 살 수 있고 또 중요한 저작인 [목소리와 현상]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대신 저 책들을 소개글에 집어넣을 필요가 있나. 한마디로, 가증스럽다.
이른바 '이론가'들의 저작이 상대적으로 잘 팔린다는 알라딘에서조차 세일즈포인트가 그리 높지 않은 걸 보면, 현재까지 이 책의 전체 판매량은 퍽 저조할 것이고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데리다의 저작처럼 몇 년 뒤 절판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데리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 상술이라는 내 말은 틀린 셈이 된다!) 그러나 판매량의 저조한 이유가 출판사 측의 가증스러운 태도가 밉기 때문은 아니다. 판매 부진의 이유는, 이 책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이론, 곧 우리 세계에 대한 '사유'는 벌써 왔다 갔고, '본격' 이론의 전성기도 지나가 버린 듯하다"(5쪽)라는 편집자의 말 자체가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리 적실하지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잠시 반짝하는 유행이란 게 있었을지는 몰라도, "'본격' 이론의 전성기"는 없었다.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지젝 정도를 제외하면 이론가들의 주저조차 번역이 안 된 경우가 허다한데, 다시 말해, 이론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촉구될 정도로 학계가 이론에 지배된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이론 이후'를 들고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황당하다. 게다가 이론의 정치성이 대학 제도 속으로 편입되면서 특유의 창조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린 영미권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이론 연구가 대학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학 밖의 자생적 연구공간에서 더욱 심도 있게 논의되어 온 까닭에, 오히려 이론 본연의 면모가 더욱 충실히 발휘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지난 수십 년간의 지적 흐름들을 철저하게 영미권의 맥락에서 돌이켜 보는 이 책이 한국에서는 내용의 질과 무관하게 조금 뜬금없게 읽힐 수밖에 없다. 대학 정식 교과과정에서 ('문학'만을 위한 이론이 아닌)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여전히 흔치 않은 듯한 이 땅의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 이후'의 삶이 아니라 좀더 '이론과 함께하는' 삶이다.
뭐,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미권 학계와 관련된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며, 레비나스를 바라보는 데리다의 입장 변화에 관한 노리스의 조심스러운 우려나 보부아르 및 실존주의를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모이의 시도 등은 해체론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 볼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책꽂이에 꽂아두면서 두고두고 펼쳐 볼 책은 아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며칠 전 모 인터넷헌책방에 이 책이 '새책수준'이라는 참고사항을 달고 판매되고 있는 걸 보았다. 초판이 작년 8월에 나온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