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0년 쯤 전에 창비에서 나온 <소설 소현세자>를 읽은 적이 있다. 상하권으로 나뉜 책이었는데, 읽고 나서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강빈의 현실주의적 사고,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류의 역사소설이었는데,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의 행간을 메꾸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거기서는 소현세자가 비극적인 영웅이라면 무지에 의한 악인 역할을 인조가 맡는다. 인조는 병자호란이라는 치욕 때문에 국제현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어리석은 통치자의 전형으로 나온다. 이렇게 선명한 갈등구조를 가지고 대립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은 사람을 흥분시킨다. 다 읽고 나면 괜한 흥분 같은 것도 가지게 된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그런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 인조나 김상헌, 최명길, 청태종 누구도 초인적이고 영웅적인 면모가 없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물들의 선택은 최선이 아닌 차악 정도이다. 누가 최악도 아닌 차악을 좋아하겠는가. 버틸 수도 없는 곳에서 적을 맞이해서 버티려고 한 무모한 조선의 통치세력은 쓰나미 같이 거대한 물결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을 뿐이다. 김상헌의 주전론과 최명길의 주화론, 영의정 김류의 모호한 태도 사이에서 주상인 인조는 특별한 입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에는 거대한 힘에 굴복하는 쪽을 택한다. 다른 선택의 길은 없기에. 치욕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사대부들 뿐이다. 결국 조선은 사대부들의 나라인 셈이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은 대장장이 서날쇠다. 그는 글과 말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몸과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신민이 아니다. 단지 먹고사는데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나라는 그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사대부들과 관료들이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큰 소리로 떠들어댈 때도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할 뿐이다. 어서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려서 자기의 생업인 농사와 대장간 일을 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는 성심껏 병장기를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병장기는 생생하다. 또한 조정이 부탁한 격문 돌리기도 아무런 무리없이 해낸다.  그러나 마치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처신한다. 병장기 수리도 그가 수행하는 생업의 일부일 뿐이다.

김훈은 '하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어떤 선언처럼 들리는데, 이 말이 과연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나라 간의 전쟁이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김훈은 김상헌과 최명길, 김류, 이시백 같은 고위관료들(당상관)의 처신과 말을 많이 보여준다. 이른바 국제외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책에서는 최명길보다는 김상헌을 비중있게 다룬다. 서날쇠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것도 김상헌이다. 그 김상헌의 노선은 철저한 주전론이다. 차라리 싸우다 죽어서라도 명분을 세우자는 것이다. 청나라 같은 오랑캐-문화적 후진국이라고 할까-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상헌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강경하게 싸우자고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청나라의 대병력이 들어와 있는데도 조선의 정규군은 제대로된 싸움 하나 하지 못한다. 결국 기대를 거는 것은 서울 아래의 삼남지방의 지방군과 의병인데, 그게 과연 기대를 걸만한 것인지.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지원군이라도 보내주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는 명나라는 아무런 도움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상헌과 같은 주전론자들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붙은 것은 안된다고 목소리 높인다.  무언가? 결국 광해군과 대북파 정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숭명배청, 재조지은이라는 -를 위해서 싸움도 아닌 싸움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는지. 참 병자호란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이미 10년 전에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청의 강성함과 명의 허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인데도 조선의 지배세력은 바뀐 것이 없었다. 묘하고 묘하다. 제대로 된 정치가는 최명길 밖에 없다. 최명길은 존명론자들이 판치는 조선에서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 뻔한데도 청에 보내는 국서를 직접 작성한다. 청태종에게 보내는 답서를 쓰라고 명령했던 당하관들 세 명은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는다.  여기에 최명길이라는 정치가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정치와 외교란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힘있는 자 뿐인 것이다. 청태종이 삼배구고두를 받는 자리에서 오줌을 누는 장면을 보라. 통역관 정명수가 조선의 조정을 능멸하는 것을 보라. 오로지 힘있는 자만이 최선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명길의 고뇌와 선택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가가 행동할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소설가는 닫힌 공간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벌이는 말의 잔치를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서날쇠나 나루 같은 백성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너무 허약하다. 여기에 차선의 정치는 없다. 차라리 전쟁통에서 지배세력들이 보여주는 무능함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대장장이 서날쇠가 기껏 꿈꾸는 희망이 올해 농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쌍둥이 자식들 중에서 누구를 나루와 짝지어줄까 고민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민중은 희망의 정치를 꿈꿀 줄 아는 능력을 거세당한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7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