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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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보다 먼저 이 책과 내 인연부터 말해야겠다. 책을 산 날짜를 보니 2000년 6월 8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읽히지 못하고 계속 책꽂이에서 나를 기다렸다. 무려 6년간이나.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에 집안 정리를 하는 중에 이 책은 청산대상이 되어서 처가로 분양이 되어갔다. 어떤 친구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보내려고 하니 마음이 좀 쓰렸다. 이번 설날에 처가에 갔다가 심심하던 차에 그 곳에 있는 이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설날 휴가 덕분에 나는 이 책을 다 읽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독후감을 올리려고 <알라딘>에 들어가보니 개정판이 2006년 1월에 나왔네. 쪽수도 80쪽 가까이 늘었다. 개정판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 옛날판으로 읽은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책의 두께는 260쪽 정도이고, 내용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고흐의 그림을 원색으로 보지 못하고 흑백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진정 괴로운 것은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치고 서른 여덟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고흐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글쓴이 박홍규 교수가 아무리 고흐의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를 말하며 의미부여를 해도 나는 생활인의 눈으로 고흐의 삶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구필 화랑의 화상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버리고 온갖 고난의 길을 자청해서 떠나는 고흐의 삶은 보기에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생전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삶을 자살로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한 인생이 그의 삶이다.  겨우 서른 여덟의 나이에 죽었으며, 가진 것도 없었고, 아내나 자식도 없었다. 죽을 당시의 그는 실패한 인생이었다.

박홍규 교수는 고흐의 삶을 성장, 구도, 모색, 방황, 해방, 회귀의 여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에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밑으로 태오라는 동생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는 북방미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들이 활동한 곳이다. 렘브란트, 루벤스, 브뢰겔, 홀바인의 걸작들을 고흐는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렘브란트는 자화상의 화가라는 점에서 고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평범하게 자랐던 고흐의 삶이 격동을 맞게 된 계기는 스무살 무렵이다. 구필화랑의 런던지점에서 근무하던 고흐는 그 곳에서 첫사랑의 시련을 맞이한다. 그 뒤 화상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잃어버린 고흐는 교사, 전도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밑바닥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지기 위해서 애쓴다. 이 과정이 8년 가까이 되는데 박홍규 교수는 이 때를 ‘구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흐는 스무살 시기를 민중 속에서 보낸 셈이다.

 

고흐는 1880년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데생수업을 시작한다. 죽기 전까지 10년 정도의 세월을 화가의 삶을 살았다. 이 때는 화단에 인상파가 등장해서 새로운 기풍을 실험하던 시점이다. 나중에 고흐는 ‘후기 인상파’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평생 고흐는 인상파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고흐가 인상파에서 배운 것은 기법이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고흐는 평생에 걸쳐서 밀레나 도미에, 쿠르베 같은 농민을 주로 그리거나 좌파적 경향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친근하게 여기고 따라 배우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한다. 박홍규 교수는 고흐의 회화정신을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라고 본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고흐는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다르게 그림의 대상을 대부분 자연풍경과 평범한 민중들에서 취했다. 10년 세월 동안 고흐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그려댔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는 그림을 그린다. 그야말로 그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고흐는 온 삶을 그림에 바친다. 죽기 얼마 전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고흐는 평생 동안 겨우 한점의 그림을 팔았을 뿐이었던 무명화가였다. 그런 고흐의 그림이 지금은 세계최고의 값으로 팔리고 있다.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그의 동생 테오를 들 수 있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형인 빈센트를 후원하고 형의 그림을 대부분  보관하고 있었다. 테오는 고흐가 죽고 난 뒤 6개월 뒤에 죽었다. 테오에게는 요한나라는 아내가 있었다. 겨우 1년 반 밖에 같이 살지 못했다. 요한나는 테오와 빈센트 간에 오고간 6백여통의 편지와 메모를 정리했고, 빈센트의 그림도 정리해서 수집했다. 또한 요한나의 아들인 빈센트 빌렘은 고흐의 작품을 한점도 팔지 않고 국가에 기증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국립 미술관’을 지어서 그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테오와 요한나의 노력 덕택에 고흐는 무명화가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예술사에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고흐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도 놀라운 것이지만 테오와 요한나라는 의인의 존재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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