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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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철이라, 분위기가 싱숭생숭하여, 노조 사무실에서 책을 빌려다 읽었다. 책은, 예전에 본부장이 우수사원?이라고 선정해서는 그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책이다. 표지 앞에 아마도 선물받았을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책은 현대인의 지나치게 풍요로운 삶을 비판한다.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는 공간으로의 집, 개인화되면서 사라지는 가치, 창작에 요구되는 진정성 등에 문제제기한다. 대부분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읽었다. 

읽으면서 어지러웠다. 직전에 격몽요결,을 읽은 나는, 글쓴이의 지적 배경 그러니까 호주에 사는 백인 여성 건축가가 가지는 기독교 세계관과 서양 철학, 사고방식 더하여 건축학 지식 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계속 반문하게 되는 단정들이 등장하는 거다. 서양식 사고방식.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을 때 느꼈던 잔인한 감정(http://blog.aladin.co.kr/hahayo/603247), 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도 또 최근에 초록불님 블로그에서 본 동아시아 인종의 DNA 분석에 대한 내용(http://orumi.egloos.com/7300179)이 연상되기도 했다. 기성세대의 것들을 부수고 찢고 새로이 등장하는, 은유로서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로 묘사되는 문명 말이다. 그 문명 안에 자연으로 대상화되는 여성 정체성이 그 문명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글이 나한테 잘 오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깨치는 요결,이라는 책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라는 몸과 마음의 일체성에 대한 생각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타이름을 구구절절 듣고 난 다음에 읽는 문명비평서,가 생경한 거다.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결국 성장서사를 쓰는 서양의 문명과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았고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라는 동양의 문명 사이의 거리만큼이 내가 이 문명비평서에 비판하는 대목들에 동감하면서도 어지럽다고 느끼는 감정이 되었다. 내가 무얼 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동양문명은 이분법 위에서 구축되지 않았고, 동양문명 안에서 여성인 나의 정체성은 소외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트에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데 있다'라고 적어주셨다던 작가의 할머니처럼, 여성에게는 이미 있는 그 정체성이 서구문명에서 얼마나 배척당해 왔을지도 알겠다. 여성들이 나섰다면 아직도 초가집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누군가의 비판에 동의하는 저자의 태도는 모호하고 괴롭다. 동양문화권의 내가 '그렇게 살면 뭐 어때서', 심지어 동양문화권에서 그건 은자의 존경받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동양문화권 촌년인 나는, 저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누구나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바 없고, 다들 그렇지 않나,라고까지 생각하는 거다. 

도시의 에너지 발자국이 시골-아마도 정확히는 교외주거지일 거다-의 에너지 발자국보다 작다는 데 살짝 놀라고, 여행과 인터넷을 금지한 이상적 미래도시 모습에서 어, 인터넷은. 이라는 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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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2-09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현대인의 지나치게 풍요로운 삶을 비판한다. ; (산업국에서 사는) 현대인이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삶은 (에어컨, 자동차, 육식, 해외여행 포함) 지구에서 공급하는 태양에너지의 6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개인화의 가차판단은 좀 어렵군요.

별족 2017-02-09 09:06   좋아요 0 | URL
개인화,는 제가 어디 썼나요? 그걸 말한 대목은 많습니다. 극장과 홈시어터, 대중교통과 자동차, 같은 거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즘이 ‘여성도 남성만큼 누릴 가치가 있다‘로 가면서, 어떻게 소비를 촉진하는지를 비판하는 대목도.

별족 2017-02-09 09:51   좋아요 0 | URL
사실, 개인화는 쓰고 싶었으나, 쓰기 어려워서 오래 전에 응답하라 1988 보고 썼던 걸, 다 늦게 올리기는 했습니다-_-;;;

마립간 2017-02-09 10:44   좋아요 0 | URL
개인화 ; 개인화는 동서양 가치관 및 문화, 비교에서 추론된 용어입니다.

보다 진보(?)적 문화를 위해서는 더 개인화(서양)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진보(?)적 문화를 위해서는 공동체화(동양)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 속의 마지막 회는 13회,로 정했다. 14회는 안 본셈 치자. 15회는 보지 않았다. 

나는, 만약 기술이 발달해서 캡슐하나를 몸에 넣으면, 그 캡슐이 몸 속의 온갖 노화를 조절하면서, 불멸의 몸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캡슐을 몸에 안 넣고 도망갈 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그걸 넣는데도, 나는 안 넣을 거다. 사는 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다고. 자꾸자꾸 수명이 늘어나는 것도, 그래서 정년이 늘어나는 것도 심난한 나는, 너무 애쓰고 싶지 않은 거다. 오래살고 싶지 않다고. 지겨울 거 같다고. 다 같이 천년만년 산대도, 그걸 위해 새로 태어날 아이를 통제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그건 아주 끔찍하고. 그럼 나는 지겨워서 살 수가 없다고. 내가 이런 인간이라서,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앞세우면서 혼자만 천년만년 산다는 도깨비가 결국 소멸했을 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칼이 가슴에 박힌 채로도, 아무 고통도 불편도 없는데, 칼이 빠져나왔다고 벌이 사라진 거야, 싶은 14회의 전개에 일없이 딸과 투덜거렸다. 칼이 가슴에 박힌 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게 바로 벌이었는데, 이건 로맨스고, 로맨스의 해피엔딩은 언제나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기 때문에, 도깨비는 다시 나타난다. 그래 나타날 수는 있다고, 나도 생각하지만, 다시 나타난 도깨비가 여전히 도깨비인 것은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사랑을 하기 위해 상대가 전능할 필요도, 불멸일 필요도 없다. 다시 나타난 도깨비가 '대표님'이 아니어도 되고, 문 하나만 열어서 캐나다로 데려다주지 못해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건, 두렵고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홀로 남겨져서 두렵고 슬프고 힘든 일을 겪으라고는 못 하는 거다. 너는 그대로 남아서, 나의 몇 번이 될 지 모르는 그 생들을 기다리라고 나는 못 하는 거다. 사랑은, 더 강한 상대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아니라, 결국 소멸하는,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가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함께 버텨주는 그런 마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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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숙 선생님의 양성평등 이야기
권인숙 지음, 유지연 그림 / 청년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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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학년이 되는 딸이 읽었으면 하고 샀다. 권인숙선생님이 자신의 딸에게 주는 여성학 입문서는 나에게는 익숙한 담론들이라 새롭지는 않았다. 아이가 어떻게 읽을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읽기는 할런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던 나의 상황 때문에, 아주 작은 묘사에 격하게 공감했다. 책에 딱 한 줄 일터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일방적이며 순종적 상하 관계로 훈련된 조직 문화에서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여성은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에 더 익숙하니까 말이야'라는 설명을 읽었다. 이 대목은 어쩌면, 군대식의 조직문화를 가진 일터의 문제점을 묘사하기 위한 거였고, 여성의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여성들의 모임에서 혼자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 지경이어서 왜 이렇게까지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장,이었으니까, 적어도 장,에게는 좀 더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이었는데, 내가 들은 대답은 '장은, 대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의견을 대리하기만 해야 한다'였다. 말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는 지경에 처해서 참담한 와중에 결국 그 말들은 남성인 다른 장,에게 가서 깨졌다.
책에서 그 대목을 만난 순간, 나는 아, 여성의 조직은,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구나,라고 수긍했다. 나는, 보통은 남자들 가운데 혼자 여자였던 경우가 많아서, 내 의견이 하나뿐인 걸 그 상태로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하나 뿐인 의견을 말하는 게 꺼려졌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여성인 채로, 말단인 채로, 혹은 지금 고참직원인 채로, 차츰 발언권이 생기고 있다고도 느꼈다. 그런데, 여성의 조직에서, 내가 장이라고 해도-아, 손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장이기는 합니다만- 권위로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던 나의 동료나 후배들이, 내 의견이 하나뿐이라고 무시하는 상황에 처해지니, 착잡했다. 언제나 말할 시간은 부족하고, 비어버린 소통 가운데 효율,만이 남아서,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 안에서도 나는 고립된다.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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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1-24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예가 되겠지만 모르겠지만, 딸과 딸 친구들의 관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별족 2017-01-24 09:11   좋아요 0 | URL
이러나 저러나, 균형잡기의 문제가 -_-;;;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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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개인보다 힘이 세다. 하나보다 둘이 강한 것처럼, 늘어난 사람 수 만큼 힘이 세지고, 다시, 책임 질 일을 나눠 진 만큼 무책임해진다. 그래서, 조직에 속한 사람은 조직 밖이 두렵고, 입이 없다. 조직에 속하면서, 나눠 맡은 일은, 내 조직의 일이라도,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서는 건조한 극단까지-전체를 보는 존재라면 고민해야 하는 것을, 부분을 보고 고민하지 않는- 치달을 수 있다. 사회 안 에서라면, 교사나 경찰 같은 직업군의 직업병,이 있을 테지만, 다시 그 직업군 안에서는 다시 자기 분야의 특화된 직업병이 존재한다. 조직에 속한 채로 조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조직의 수장 쯤 될 거고, 조직의 수장이라면 벌어지는 일들과는 멀고, 또 조직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자리니만큼 한계가 있다. 조직에 대한 어떤 말도, 조직에 속한 사람은 말하기 힘들고, 결국 입은 사라진다. 그래서, 조직에 대한 말들은 대개 조직을 벗어난 자유인들에게서 나오고, 그 말들 속에 조직은 위험하고 한심하고, 때로는 왜 존재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책은, 오마이에 기사를 송고하는 언니가 사줘서 읽었다. 사인까지 받아 준 책은, 다음 스토리펀딩으로도 몇 번 구경한 이야기였다. 국가폭력에 살인자로 누명을 쓴 사람들,이 등장한다. 법적 지원없이,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누명을 썼다. 진범이 등장해도, 경찰과 검찰은 그저 실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인정하기 싫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방치한다. 책 속에 등장한 억울한 다섯사람 중 넷은 수감 중에 진범이 잡혔지만, 형을 모두 살고도 십수년이 지난 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서, 그 경찰이나 검찰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계속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왜 때리고, 협박해서 자백을 받았을까, 왜 진범이 나타났을 때 되돌리지 못했을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국가권력의 엄정함,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길래 그랬을까. 아마도, 책임을 나눠졌으니, 상사가 사건을 이관하라면 넘겼겠지, 싶고, 아마도 평가를 받을 테니 범인을 빨리 잡아 사건을 종결하고도 싶었겠지, 싶다. 중요도의 선과 후가 바뀌고 본말이 전도되어도, 조직 내에서 사건을 빨리 해결한 사람, 잡음이 없는 사람이 아마도 승격했겠지 싶은 거다. 조직은, 조직 안에 사람들이 존재이유를 더이상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 그래서 조직 안에 사람들은 조직 안에 책임을 나눠져서 무책임해진 사람의 태도 말고, 결국 조직을 벗어날 사람으로 자신의 일을 보고 대해야 하는 거다. 그런 마음과 그런 태도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용맹한 개인이 깨뜨린다고 말해도, 알고 있다. 조직은 개인보다 세고, 조직에 속한 그 각각의 개인들은 조직 속의 개인이 아닌 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서 균형감각을 가져야만 하는 거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내부적인 노력과, 개개인의 성찰, 조직 바깥에서의 노력, 모두 다 필요하다. 모두, 힘 내서, 조직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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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게 싫다. '한국이 싫어서'라고 말하면서, 한국을 등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미워도 이뻐도 '나'란 존재가 보태고 있는 거고, '나'는 그 모든 나쁜 점에도 불구하고 내 나라를 사랑하고, 할 수 있다면 고치고 싶으니까, 싫은 존재에, 나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한국,을 싫어하지 않는다. 

어이없는 일들이 아직은 물 밑에 숨어 있을 때, 사드와 국정교과서로 저항이 불붙었을 때,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가 글짓기 숙제를 받아가지고 왔다. '국가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점'이 글감이었다. 당시 상황의 뻘짓들과 연결되어, 미쳤구나, 싶은 글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아이의 글감에 말들을 보태면서, 나라,란 게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라,를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했다. 나에게 나라,란 나의 부모님이나, 나의 가족이나, 나의 친구들, 어울려 사는 이 마을이, 나의 직장이, 그렇게 나라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내 나라 말을 가지고, 내 나라 글을 쓸 수 있어서, 말 글로 하나되는 사람들, 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벌어진 민족의 수난사에 울컥울컥하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목이 메이고, 다시 그래서 촛불을 들고 길 위에 서는 거다. '애국심'이란 말이 어쩌면 왜곡되었지만, 누가 말하듯이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애국심'이 넘쳐서, '너희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나라'여서, 길 위에 서는 거다. 

무한도전,의 역사힙합 콜라보,를 16년의 마지막날, 촛불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던 그날, 집에서 아이들과 보았다. 길에 서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노래 속의 이야기들에 눈물이 났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가 노래 속의 시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알지만, 아직 윤동주와 안중근은 모르는 아들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힙합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어쩌면 디스와 허세가 난무하는 장르의 이미지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배움은 모자랄 지 몰라도, 마음은 다르지 않은데,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배반당해서, 싫다고, 헬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한 거였나,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스스로를 구속하니, 가능하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가능하면 자신을 귀히 여기고-허세,나쁘지 않다-, 할 수 있는 한 타인을 그렇게 또 귀히 여기면서 아름다운 말들로 노래하자,고 말하고 싶다. 이제 왕의 권력은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나누어졌고, 우리는 이 권력을 우리가 좋아할 만한 나라,를 만드는 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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