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도 않았으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스트를 나쁘다, 아니다 평가하지 마라. 나도 그 심정 안다. 알지만, 위험하다. 

내용보다는 제목이 슬로건이 더 많은 걸 말해주는 때가 있다. 

내게 페미니즘은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이론으로 넘어가는 단계나, 문화에 대한 상대주의 같은 것이었다. 절대적인 옳음은 없어,라는 태도. 권위에 저항하는 태도, 어쩌면 지금도 다르지는 않은 것도 같다. 나의 답을 내가 찾겠어. 너무 내게 강요하지 마. 

그런데, 지금의 나는 공동체를 위한 좋은 것과 나쁜 것,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페미니스트의 어떤 태도가 지향이 없어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원해서? 라는 질문이 생긴다. 

유명한 페미니즘 슬로건 중에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가 있다. 나도 좋아했던 거 같은데, 한겨레21에서 웬디 덩,에 대한 기사(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874.html) 를 읽었다. "깨지 못할 가정은 없다, 단지 노력하지 않는 '샤오싼'만 있을 뿐이다"라는 유머로 맺는 그 기사를 읽고는, 아, 저 슬로건의 현현인가 싶었다. 슬로건의 현현을 눈 앞에서 보고, 슬로건 자체를 회의한다. 법이 정의하지 않는 도덕심, 법으로는 심판할 수 없어도 사람들이 하는 심판,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일부일처제, 가족의 허상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래도 되는가,에 대해 회의하는 거다. 저런 삶을 누구에게 권할 수 있지. 나조차도 싫고, 내가 아는 누구라도 싫었다. 아무런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웬디 덩은 누구보다 나쁘고,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고, 페미니스트인 나를 나쁘네, 나쁘지 않네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타인을 평가하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언가 타인에게 권하고자 하는 주의나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의나 주장에 대한 평가를 수용해야 하지 않나. 나를 평가하는 건 안 되지만, 나는 너를 평가하겠다,고 하면 비난받는 건 당연하다. 너의 이 말은 너의 이 행동과 일치하지 않아,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저 '여자'이기만 하면 변호하겠다는 태도가 '페미니즘'인가. 그저 '페미니즘'이라고만 하면 평판에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게 좋은 태도인가. '나쁘다'는 말이 가지는 추상성 때문에, 오히려, 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되어 버리고, 그러지 말라는 말은 모두 배척당한다. 결국 나는 '페미니즘'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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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01-30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생각보다 이 책 저는 괜찮었어요. 꽤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 책 괜찮다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책입니다. 한번 읽어 보심이...

별족 2021-01-30 09:34   좋아요 2 | URL
^^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겠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슬로건‘에 대한 거였어서. 그래도 역시 이 책을 넣을 거 같아요.
 
보다 두려운 것은 저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80205.html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회사의 성희롱고충상담원,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고 나조차도 만족할 수 없었다. 교육을 받았지만, 질문이 생겼고 질문에 들은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생긴 질문은 이 행위가 정말 조직에 이로운가, 였고 매뉴얼 교육을 받으면서 강사에게 한 질문은 '어떻게, 문제제기가 들어오자마자 분리했는데 주변에서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죠?'였다. 그 때 강사는 조직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직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나는 고충상담원이고 어떤 식으로 개입하게 될 텐데, 사건은 처리하는 과정에도 처리한 후에도 충분히 전파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조직에 막 진입한 사람이 원하는 처벌수위는 지나치게 높아서 원하는 수위보다 낮다고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욕을 먹고, 느리고 긴 처리과정에서 '은폐'라고 욕을 먹는다. 교육받은 사례 중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작은 조직에서 벌어진 걸 처리했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작은 조직이라 피해자거나 가해자, 목격자나 증인, 위원회의 위원, 어디든 걸쳐 있었다면서 외부위원으로 참여한 분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들으면서, 그 모든 행위들이 조직에 도움이 되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춘추전국 이야기를 읽다가 '절영지회'라는 고사를 읽었다. 장왕의 연회에서 갑자기 불이 꺼지고 어떤 신하가 왕을 모시던 미인에게 수작을 건다. 미인은 그 자의 갓끈을 끊고 왕에게 고해서는 그 자를 잡아내라고 청한다. 왕은 불을 켜기 전에 모두의 갓끈을 끊으라고 명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신하는 3년 후에 용맹히 싸워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 성과 관련된 범죄들도 법이라면 경중을 따질 수 밖에 없다. 각각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무게에 맞게 벌을 정해야 한다. 가벼운 죄에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이, 무거운 죄를 막는데 도움이 될까? 갓끈을 끊어놓고 왕께 고하는 미인처럼, 벌을 청한다고 벌을 줘야 할까. 지금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가볍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고, 드러냈기 때문에 더 무거운 벌을 받는 상황이 된다. 무거운 죄라면 피해자가 드러내길 꺼리기 때문에 , 형사법의 처리과정에서 확정되기 전까지 보호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벼운 죄라면, 법으로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개되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균형은 깨어지고 적개심은 커진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는가?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관계의 불균형 가운데, 모호한 정의들로 가득 찬 그 말을 정의는 할 수 있을까?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성폭력,으로 뭉뚱그리고, 그 모든 피해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에 이로운가. 강간과 살인을 같은 무게의 범죄로 보는 것은 순결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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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1-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제발 알라딘의 죽림칠현들이 이런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텐데요.

별족 2021-01-28 09:55   좋아요 1 | URL
댓글은 달아주지 않으시겠죠. ^^

Comandante 2021-01-31 09:04   좋아요 0 | URL
느끼는 바도 없는 것 같군요^^

- 2021-01-31 09:20   좋아요 5 | URL
제가 죽림칠현 중에 하나였군요 ㅋㅋㅋㅋ 아 ㅋㅋㅋ 님아 ㅋㅋㅋ 별칭 재밌네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31 20:18   좋아요 3 | URL
어느 지점에서 공감하고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느끼길(그리고 바뀌길) 바라는 건지도 궁금하네요 ㅎㅎㅎ

- 2021-01-31 00: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에 트랙백을 다셨길래 조금더 구체적인 생각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셨을거라 추측해보고, 저의 의견이 더 자세했으면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댓글을 답니다.

1. 제목이 조직에 이로운가 인 부분
저는 정의당의 조직안위에 전혀 관심도 없고, 어떤 연관도 없는 일개 시민입니다. 다만 오랜기간 대의와 조직보위논리로 많은 진보진영의 여성 활동가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꺼내어 말하기 어려워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장혜영 의원의 입장문이 와닿았습니다. 공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진보정당이 척박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의 무려 정의당이니까요. 그의 입장문에 조직에 이로운가를 생각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무겁게 숙고했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당이 아닌 성평등을 외쳐온 정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정치에도, 진보정당의 정치에도 옳은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다니요. 제가 되려 묻고 싶군요. 정의당은 무얼 위해 싸워야 합니까. 공개하지 않는 방법이 정의당 조직에 정말로 이롭습니까?
물론 장혜영을 지지하는 제 초점은 한 동료 시민이자 여성으로서가 더 큽니다. 말하지 않았다면 용기낼 필요 없었고, 용기내지 않았다면 조용했을 거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장혜영이라는 개인과 또 성평등을 외쳐온 국회의원은 그의 표현대로 ‘사건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갇히지 않기로 결단한 그 용기가 어떤 긍정적 징후로 읽혀 뿌듯했습니다. 미투를 비롯해 많은 동료시민 여성들이 용기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정의당이 이 상황을 풀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되려 아주 조금도 없던 정의당에 대한 기대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제겐 장혜영님의 입장문이 조직에 이롭게 느껴집니다.)

2. 인용하신 갓끈에 대해
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구분해야한다 하셨죠. 경중을 따져야한다 하셨죠.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해 더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읽힙니다. (저는 왜 거기서 살아남은 신하가 나라를 구할 거 같지 않고 안희정이 될 것 같죠? .....)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더 큰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인의 직업윤리(?)아닌가요. 희롱, 추행, 강간 다르지요. 그러나 그 모두는 ‘성폭력’ 맞습니다.

덧붙여, 장혜영의 입장문에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진술이 없었던 점은 제가 좋은 글이라고 느끼는 지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뭘했다는 건데, 그건 추행이네/아니네, 여타의 사건에 따라올 자극적 보도들과 언설들... 사법적으로 다투어 결론난사건 마저도 사건 정황에서 피해자의 행동을 탓하며 꽃뱀이니 몰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수대중의 2차 가해를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무엇이 폭력인지 또 무엇이 존엄인지에 대해 미투 이후의 우리 사회가 근본부터 다시 묻고 다시 성찰하고 정립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족 2021-01-31 06:31   좋아요 3 | URL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 조직(정의당)의 안위 따위 관심없다, 2. 작은 죄를 크게 벌하면 큰 죄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거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1. 제가 말하고 싶은 조직은 정의당이 아닙니다. 국가공동체입니다. 저는, 조직이 건강한 상태는 ‘야, 이 미친 놈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추행이 벌어졌을 때 당한 사람이 바로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말 할 수 있고, 그 상황에서 해소될 수 있으면 그건 그대로 건강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못 해, 어떻게 말해?‘라고 하고는 절영지회의 미녀처럼 더 높은 권위로 달려갑니다. 절영지회가 고사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 시대가 왕의 미녀를 추행하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 안에 남성과 여성이 있고, 국가가 여성만을 보호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2. 경중을 따져야 하는 이유는, 장혜영의원이 법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국민들 간 분쟁이 벌어졌을 때, 심판하는 근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큰 질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타가 오히려 정치적 혐오를 키운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지만 정치인은 그러면 안 되지,라는 모순된 말이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일까요? 결국 정치인들이 벌이는 언설을 자기 자신에게도 비춰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그런 자신의 믿음을 법으로 만들어 나를 통제할 사람들인데요.

저는 미투의 처음을 좋아합니다. ‘무언가 성적인 문제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젊은 여성 곁에서 나이든 여성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단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요. 여기서는 그 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라는 위로입니다. 긴 인생에서 짧은 순간, 성적인 문제를 과장해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성적으로 해석하고 바짝 긴장해있는 특정한 시기에 부풀리는 위험들이라고 다독이는 말입니다. 지금의 미투처럼 나의 불안으로 상대를 처벌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 2021-01-31 08:08   좋아요 6 | URL
미투의 변질에 대한 염려와 불만 잘 알겠습니다. 해일 오는데 조개 줍는 소리 하시네요.

Comandante 2022-10-2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족님의 이 글을 최근에 다시 읽게 됩니다... 올바름으로 무장한 파시스트들 정말 넌덜머리가 납니다. 없는 사람 배곯는 사람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는 말뿐인 사람들..

별족 2022-10-20 11:04   좋아요 1 | URL
제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어서, 저는 좀 안타까운 맘이 큽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엄마들, 때문에 오래 전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시즌12, 에피소드 22)범죄수사물을 한참 볼 때, SVU도 꽤 봤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 이 에피소드는 좀 기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으려고 검색한 검색어는 'SVU 영아살해', 'SVU 콘돔 구멍' 따위였다. 콘돔 구멍,이라는 검색어에 나무위키가 걸려서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을 수 있었다. 스텔스,라는 언어 풀이 중에 성적인 은어로 설명하면서 해당 에피를 써놓았더라. 이야기 속에서 남자는 여자들과 성교하면서 일부러 콘돔에 구멍을 냈다. 경찰서에 피해여성들 그러니까, 성교나 진지한 관계는 원했지만 아이는 원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남자때문에 임신하고 아이를 키우는 중인 여성들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아이와 함께 자살한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살해한 여성도 존재하고, 그 많은 여성들은 그 남성을 범죄자로 처벌이 필요하다면서 모였다. 남자는 자신은 양육비를 보내고 있고,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했다. 이야기는 뭔가 사적인 복수로 끝났다. 그 여자들을 상담했던 여자가 그 남자를 살해했거든. 그런데, 그 에피소드를 볼 때 이야기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저런 사건이 있을 수 있어? 남자는 여자의 죽음보다 아이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자신을 고대 왕처럼 남자들은 많은 아이들을 원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면서 강변했거든. 나는 뭐, 그 남자가 사십명이 넘는 자신의 아이들의 양육비를 지불했다는 것에 놀라고!!!! 그 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독점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면서, 그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이나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한다는 것이었다. 합의한 성관계에 임신이 되었다고 범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남자가 법적 처벌을 피한 이유였다. 오래 전 일기를 뒤졌더니 그 때의 이야기가 있었다.(2011. 11. 30) 나는 광고의 '임신강간범'이라는 표현이 의아해서 부러 본 에피였고, 당시 드라마로는 천일의 약속,을 보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고 싶어서 치료를 거부하는 수애를 보는 중이었어서, 더 그 여자들을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피임을 전적으로 남자에게 의지하고 아이가 자신의 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여자들과 나란히 죽음이 닥치는 와중에 절박하게 아이를 원하는 여자를 보는 것은 그대로 대비가 되었다.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아이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또 있다. 이것도 대강의 얼개만 알고, 검색해서 찾았다. 왕이 왕비를 얻어 아들까지 얻었다. 먼 데서 시집 온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이 보고 싶어 왕에게 청해서 동생을 데려와달라고 한다. 왕은 왕비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는 강간하고 문제가 될까봐 혀를 잘라 감금한다. 나중에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고,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해서는 왕에게 먹인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테레우스와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야기(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2t2568a)) 다른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왜 아이를, 이라고 이야기했다. 엄마인 우리는 아이가, 남자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다. 

권력의 위계를 인정하고 그 위계 안에서 힘을 행사하려 한다면 엄마가 죽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엄마라는 존재가 존중받는 이유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 가장 약한 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더 강해질 걸 기대받는 모성은 억압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하다. 오락을 위한 성교가 만연하고, 그 자체에 죄책감을 덜어내는 문화적 맥락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리타분하게도 여전히 '남자는 성교를 원하고, 여자는 아이를 원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엄마,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이 가득찬 세상에서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려고 애쓴다. 먹고 자고 아이를 기르고, 인간이 존재하는 단순한 이유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위에 덧입힌 허명들은 허명이다. 사랑이든, 명예든, 아름다움이든, 그게 뭐든. 반드시 닥치는 죽음 때문에 삶이 간절하고, 이야기를 원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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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를 그래도 챙겨 보고 있다. 꽤 되었는데 유퀴즈에서 '담다' 특집을 했을 때, 광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대 6군데 합격생'이 합격증을 담은 학생으로 출연한다는 거다. 결국 사람은 한 군데 밖에 못 가는데, 6군데 합격한 게 왜 이야깃 거리가 되는지, 비법따위가 있을 리가. 

"저게 무슨 자랑이라고 나온다니?"

"자랑이지, 6군데나 합격했는데."

"어차피 하나밖에 못 가는데, 게다가 저 사람은 과학고 나와서 의대 간 거잖아. 과학고는 국가에서 과학 육성을 위해서 많이 지원하는 학교고, 그런 학교를 중학생부터 의사 될 마음으로 가서는 지원할 수 있는 6개를 다 의대로 넣었다는 게 자랑이야?"

부끄러움이 없는 젊은이에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입시와 교육이 산업이 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학원 강사들, 교육 컨설턴트들,이 큰 부를 이루고, 노력만 하면 갈 수 있고, 노력하지 못한 너는 너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식의 담론을 퍼뜨린다. 애초에 노력한다고 갈 수가 없는데, 그런 말들에 속아서, 장사치들의 배를 불리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삶에 대한 고민을 미루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한 군데를 선택해서 가야 하는 과고생이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서 국가의 지원 아래 좋은 교육을 받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 여섯 곳을 모두 의대를 지원한 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한다는 게 싫다. 모두가 좋다는 대학에 모두가 좋다는 과를 갔고, 또래집단이 다들 대단하다고 말해 준다면 자신의 잘못을 모를 수도 있다. 선배도 그랬고, 후배도 그랬고, 그래서 나도 그랬는데, 무슨 잘못일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좁은 주변만을 보고 생각해선 안 된다. 어른이라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또래집단 안에서 허용될지라도 전체 사회 안에서 허용될지를 고민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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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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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뭘까. 삼백이는 이름이 없어서 삼백살이나 살았는데 말이지. 이름이 없다고 해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과 본질은 연결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세상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원자력발전소와 핵발전소 때문에 한참을 이야기할 때(https://blog.aladin.co.kr/hahayo/7744179), 나는 언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언어에 대해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언어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는 태도의 무용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결국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에 거리두기를 실패한 안타까운 존재로 회자되는 것으로 마쳤지만, 지금도 나는 언어에 옳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먼저 나서서 사회나 문화를 제도를 직조하지 않고, 사회나 문화나 제도 안에서 언어가 꼴을 갖추는 거지. 애초에 그런 언어가 아니었어도, 사회가 변화하면 언어 자체도 의미를 바꾸던지, 모양을 바꾸던지 변해버리는 거다. 

발화되고 사라지는 말뿐만 아니라, 기록되어 전해지는 글조차,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달라진다. 정 반대의 의미로도 변화하고, 오류가 고착되서 변화하기도 한다. 

책은 이적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하고 재밌다길래 구해 읽었다. 표음문자들로만 가득찬 유럽의 말들이다. 거대한 언어의 경계가 세계의 다양한 말들을 품고 변화한 경로들을 보여준다. 인간의 혐오하고자 하는 마음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도, 역사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언어 안에 어떤 식으로 남아 있다. 언어라는 걸 수정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타인을 수정하려는 용맹하고 오만한 태도다. 

표의문자의 세계에 살고 있어서, 우린 좀 덜할까 싶어 다행인가. 우리 언어 관련 책을 찾아볼까, 싶다.  


앵글로색슨 족과 켈트족의 관계가 실제 어떠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학살이 만연했는지,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는 암울했고, 역사는 망각이 심합니다. 애통해하거나 분개할 만한 일도 아닙니다. 역사는 길게 보면, 훔치지 않은 문물 없고 침략당하지 않은 나라 없습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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