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세트 - 전5권
다니구치 지로 지음, 유메마쿠라 바쿠 원작 / 애니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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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읽어가다가 무언가 전형적이라고 느꼈다.

책 속의 사람들은 굉장히 진지하지만, 나는 시큰둥.

시마과장에게 '그렇게 까지 회사를 다녀야겠어?'라고 속 말하게 되는 기분. '뼛속부터 그래야만 하는 인간'이라고 열심히 설명하지만, 그래, 그러라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라고 구경하는 기분.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원정대 사진기자인 화자가 등정 중 죽어간 동료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방황하다가 시내 골동품가게에서 에베레스트 초등정 원정대가 가지고 갔던 동일모델의 카메라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초등정 미스터리보다는 카메라의 발견자라는 일본인 산사나이를 추적하는 이야기 비중이 큰데, 산을 오르는 이유 등반가의 경쟁에 이입이 되질 않았다. 나는 산을 오르는 열정은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산만 타는 게 좋아,라고 했어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다른 누구보다 먼저 산을 오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삐딱하게 보게 되는 거다. 비장한 표정으로 '최초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라고 말하는 데는 뭐래,라고 하는 거다. 내가 이상한 건지. 책 속의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그런 남자에게 열광하거나, 달떠서 뒤따르는 사람이 의아한 거다.

그토록 강렬한 열정을 나같이 뚱한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거다. 사람마다 사는 이유는 다르고, 한 사람에게도 삶의 순간마다 사는 이유는 달라지고, 또 그 이유라는 게 당사자에게만 소중하기도 하고, 가끔 전혀 무관해보이는 선택지 안에서 사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모호하고도 강렬한 열정을 굳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야기의 열기는 과정에서 나와야 하는 거고, 전체 이야기 속에서 그 과정은 나름 치열하기는 하다. 그러나, 초인처럼 묘사된 남자는 내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원작이 있는 소설을 만화로 그린 거고, 산을 오르는 남자, 그가 묵묵히 걸어가는 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은 그대로 고독감이나 압도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산을 오르는 게 유일한 삶의 이유인 남자가 있고, 역시 그를 쫓으며 산을 오르는 남자가 등장하는 이 이야기를 나는 이야기 바깥에 여자가 존재하는 일본의 남자가 남자들을 위해 만든 남자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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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 동화는 내 친구 17
알프 프료이센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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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랑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 자기 대출카드에 내 대출카드를 만들어 열권씩 빌려오는데, 아빠도 만들고 동생도 만들어서 스무권씩 빌리자는 걸 말렸다. 들어봐, 어때? 무겁지. 열권만 빌려, 라고. 그 열 권 중에 내가 보고 싶은 두 권의 책을 겨우 넣었다. 하나가 이 책이다. 어렸을 때 재미나게 봤던 기억이 있는 만화의 원작동화다. '꼬마친구, 숲속 친구, 모두 모두 즐거워~'라고 따라부르던 만화 생각이 나서 빌렸다.

이유가 궁금했던 것도 같은데, 책 속에도 이유는 없다. 집에서 살림하고, 일하러 나간 아저씨의 점심을 준비하는 아줌마의 일상에, 가끔 갑자기 작아지는 아주머니의 특이한 일상이 섞여 있다. 재미있다. 현대물과 달리, 자동차도 없고, 집과 작은 동네, 숲 속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소박한 동화다. 아주 신기한 일-사람이 찻숟가락만큼 작아지는 일이!!!-을 아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줌마의 태도도 맘에 들고, 이런 상상을 하는 어린이는 '심심할' 새가 없어서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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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날아라 노동
은수미 지음 / 부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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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나는 이 이야기를 남편한테 들었었다. 그 때, 나는 일과 육아의 양립불가능성과 양육을 위해 이러저러한 제도가 조직에 도입되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남편은 저 말에 더하여, '너만 아이 키우냐, 작작해라'라고 했나보다. 나는 상처받았다.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양육의 노동을 어머니들께 의지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결심, 이란 걸 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속한 조직을 대하던 이제까지의 나의 강경한 태도, '나는 너에게 나의 사적인 생활을 간섭받고 싶지 않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나는 이러저러한 나의 사정을 들어, 무언가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어려움을 토로해야 했고, 그게 무척이나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르고', '주변에 피해를 주며', '조직에 누가 되는', 무언가 되게 한심한 인간이 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도 나는 합리화의 달인이라서, 조직에 도입된 양육기간 근로시간 단축근무제도의 두번째 신청자가 되어 오후 네시가 되면 혼자 퇴근하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저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어제 회사 익명게시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익명게시판에서 저 말을 한 사람은 내게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한 데에는 회사가 추진하는 '강제 순환'에 대한 논쟁이 있고 저 사람의 주장은 회사가 그걸 하겠다는데, 싫으면 네가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뜻이기 때문이다.

'회사'와 '나'의 관계설정에서 이러한 말들이 주고받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다. 나는 이런 태도들이 책속에서 말한 '담론에 먹힌'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책 속의 저자는 우리나라처럼 사용자 담론이 넘치는 나라에서 말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서, 나는 '이기적인'-불법은 싫어하면서,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무시하고- 노동조합에 시큰둥했고, 언제나 반보쯤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그러한 내가 싫어한 노동조합의 태도는 법과 환경 속에서 조장되었고, 불가피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필요한 것들, 더 많은 노동권에 대한 발언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노동권, 이란 생경한 단어를 내게 깨우쳐 주는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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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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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이야기다. 나는 계속 속는다. 그러면서도 내내 뻔하다고 중계해놓고, 결말에 닥쳐서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는, 충격을 왜 받았는지 생각했다.

남의 눈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병든 커플의 이야기인데, 나는 그런 병든 결말에 충격을 받은 거다. 최근에 읽은 잡지-'나들'에서 연애강박으로 가짜연애를 한다거나, 수백만원하는 연애강의를 듣는다는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속 사람들에게 느끼는 이질감 때문에 결국 그런 결말이 가능도 한 건가 생각하고 말았다.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을 본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타인의 시선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미디어를 통해 가공되는 쉬운 이야기와 복잡하고 기이한 진실 중에 나라면 진실을 택하게 될까. 기묘하게 움직이는 미디어와 대중을 책을 읽는 나는 놀라며 구경하지만, 현실 속에 나는 그런 대중이 되지 않을까. 미녀의 용기에 열광하고, 단순한 이야기가 언제나 더 진리에 가깝다고 믿는 나는 책속의 대중에 가깝게 움직일지도 모르겠다.

 

자기자신을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채로 타인의 시선 속에 자란 병든 미녀가, 어머니를 경멸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 쉽게 조종당하는 남자를 조종하며 살기로 하는 이야기 속에서, 역시 충격은 조종당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내를 경멸하지 않기 위해 조종당하기로 한 남자에게서 받은 것. 구제불능의 결국 좋은 짝이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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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한다.

직장의 신,을 보면서 내가 한 최초의 코멘트.

회사란, 무엇일까,가 요즘의 화두.

미스김에게 회사란, 잔인하고 냉정한 존재라서 일한만큼 돈을 받으면 그 뿐이고, 그 안에 속한 사람들과 회사밖에서 만나는 일은 끔찍한 일이 된다. 장규직에게 회사란, 타인에게는 잔인하고 냉정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중요한 존재라서 회사 안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하고 '회사'에 애정없는 미스김이 그렇게 끔찍한 거다.

 

15년차 직장인인 나는, 회사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미스김처럼 정의하기에 나는 회사에 이입하는 순간이 많고, 장규직처럼 정의하기에는 나는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다.

아직 아이가 있기 전에, 가정이 있기 전에, 나는 회사를 '이윤추구를 목표로 움직이는 조직' 이라고 생각했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 혹은 타인의 존재가 회사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내 딴에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고 더이상 회사에 그 이전만큼 헌신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정의한 회사의 방식에 비추어 내 자신을 경멸하거나 혐오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회사를 특정하게 가상하지 않는다. 회사는 회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정의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회사를 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 회사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고도 생각한다. 회사 안의 사람들이 '회사'가 이윤추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회사 밖의 사람들이 '회사'가 이윤추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회사는 결국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계약직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우리에게 있었고, 우린 드라마의 시작에 언제나 되풀이되는 'IMF' 이후로 '회사'는 회사 '안과 밖'에서 그런 존재로 정의되어 버린 거다. 우리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그렇게 바뀌었다면, 회사가 다르게 움직이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다른 회사를 바란다면,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회사는 '이윤추구를 하는 조직이라서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믿음 대신,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으로 함께 가기 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믿음.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인 나는, 나의 회사를 다르게 정의해야, 나의 어떤 식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것이다. 회사밖에서 회사에 청렴이나, 사회공헌을 요구하는 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특정하기 어려운 '회사'라는 조직에게 '사회적 책무'를 원하는 것이라면, 회사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구성하거나 정의할 수도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하는 회사던지간에, 그 회사가 그 회사에 속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단지, 회사에 속한 사람들의 얼굴로만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회사의 얼굴로 드러날 때, 아픈 당신을 위해 짐을 나눠질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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