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즐기기 - 성찰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한 기념비적 역작
닐 포스트먼 지음, 홍윤선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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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만화를 보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오웰의 1984를 병치시켜서는 현재가 헉슬리가 상상하던 미래가 된 거 같다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덕분에 우리가 이상한 정치를 감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만화였다. 만화의 번역본에도 닐 포스트먼의 이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원본 링크는 저자와의 저작권 문제로 아예 내려가 있었다. 나는, 이 만화가 책을 읽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가, 이 책은 내용이 만화의 딱 그것 뿐인가, 싶어 책이 궁금해졌다. 그래, 만화를 봐서가 아니라, 원본만화에서 '저작권자의 요구로' 링크가 내려가 있어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배계급의 통치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마약으로 통제당한다. 무언가 맥락이 남지 않은 오래된 기억 속에-그래, 내가 분명히 언제 읽었었다- 남아있는 책 속의 장면은 성난 군중에게 뿌려대는 환각제,였다. 마음 속에, 그런 방식으로 행복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읽었나보다. 

책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환각제'-소마-의 역할을 '텔레비전'이 하고 있다고,아마도 헉슬리가 지금의 세상을 본다면 동의할 거라고 말한다.  

책은 형식,이 내용,을 제한한다고, 혹은 적합한 형식,이라는 게 있어서, 텔레비전,이라는 형식-기술-은 오락,에는 특화되지만, 다른 진지한 주제들을 '오락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히려 티비로 무해한 것은 오락이나 드라마고, 유해한 것은 정치토론이나 뉴스나, 교육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이라며, 그 자체로는 아무 지향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그 '기술'은 지향을 가진다고도 말한다. 나는, 읽으면서 공감했다. 

사람의 생각이 대면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사회와 글,이 보편화된 사회는 다른 구조를 갖게 된다며 중세 유럽와 초창기 미국을 비교한다. 그리고 티비가 보편화된 사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게 될 때, 공명같은 게 일어난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어도, 그 말이 싸움이 되어서 결국에는 화를 내며 끝났더라도, 말로 주고받은 것 말고 다른 것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쓴 시간, 말 밖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때문에 그 사람과는 다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글로 말해야 할 때, 시작과 끝, 전과 후, 논리에 대해 생각한다. 말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글이 된 다음의 삶이나 그러니까 '일관성'이란 게 중요해진다. 

그런데, 티비처럼 '말'이지만 '말 외의 말'이 사라진 방식으로 전해지는 것은 그 방식 때문에 '오락화'가 일어난다. 그건,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라고.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개입이 필요없는 '뉴스들'을 듣는 건 사회에 대한 '무력감'을 강화시키고, 병렬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뉴스는 이전 뉴스,를 잊게 만든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고, 지배계급의 통치방식에 순응적인 '긍정'이 넘친다. 

이미, 정치인의 일관성은 문제가 되지 않고, 재벌가의 행태는 포장된다. 

아, 화가 막 나는데, 이미 너무 많이 매체에 잠식당했는지, 하려는 말들이 전해지지 않는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들은 허공에 맴도는 거 같다. 


말,을 하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는 거 말고, 전화로 말하는 것도 말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걸로, 진지하고도 길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시간도 흔치 않다는 걸 아는데도, 나이들어 꼰대가 되려나 보다. 


쉽게 전달된 것은 쉽게 사라지고, 형식이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에, 책이 말하는 것이 그거라서,

아마도, 만화를 내려달라고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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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봄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4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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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시다가 학교아저씨로 일하셨고, 어머니는 농사를 지으셨다. 그래도, 결혼하면서 딸들도 가르치겠다는 약속을 받으셨던 어머니 덕에, 약속을 무던히 지키시던 아버지 덕에, 혹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성취했던 자식들 덕에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모두 대학 졸업시키셨다. 대학,에서 '에, 집이 '리'야?'라는 반문을 듣던 나는, 다행히도 IMF 직전에 그래도 취업을 해서, 무난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리뷰 창을 펼쳐놓고,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나의 삶이 나를 제약하는 한계를 내가 인식하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몇십억을 호가하는 아파트에서 그 삶을 내려놓지 못해 죽기로 결심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죽을만큼 가난한 삶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것도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지만, 용케 교육받아 노동자로 살아가는 정도의 삶을 겨우 이해한다. 다른 삶이 궁금해,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지만, 그 다른 지점이 너무 크게 닥쳐서 몰입이 안 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그랬다.  


똑같이 부르주아 여성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인 '봄에 나는 없었다'를 무척이나 공감하면서 읽었으면서, '딸은 딸이다'와 '장미와 주목', '인생의 양식'까지 읽어가면서, 차츰 그 공감이 옅어졌다. '인생의 양식'에서도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는 한데, 이번 책에서는 그들의 삶이 풍경이 계속 걸렸다. 한 여성이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죽음까지 결심했다가 다시 새로이 살기로 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다. 그녀의 삶이나 성향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녀의 결혼 이전의 삶은, 아 제국인 영국에서 부르주아지의 삶이 저랬구나, 라는 자각이 닥쳐서 공연히 식민지 국민이던 역사를 떠올리며 억울해했다. 남겨진 재산을 쓰면서, 부자 남편을 만나기 위해 멋진 옷을 차려입고 파티에 나가는 삶, 하녀와 요리사를 부리는 삶. 남편이 바람을 피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배부른 고민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놀라는 거다. 역사 속에서 아마도 그녀가 부자인 이유는 식민지를 착취했던 아버지나 할아버지 때문이었을 텐데. 그녀의 그런 식의 삶이 참 좋아보인다는 건, 그 착취를 모른 척해야 가능할 텐데. '언제까지고 아름다워 주시오'라는 불가능한 주문을 해대는 남성에게 자신을 맞추는 수고를 감수해야 가능할 텐데. 그 모든 골치아픈 배경들에 머리가 들끓다가도, 장기간 해외에 나가서는 당나귀를 타고 트레킹을 하는 가족의 모습, 호텔에서 다른 방의 다른 나라의 아이와 친구가 되는 아이의 모습, 호텔에 장기투숙하며 아이를 위한 현지어 개인 교사를 붙여주는 모습, 이 순전히 부러운 순간이 생겨서 부끄러웠다. 

모두가, 저런 삶을 원한다는 건 탐욕일 텐데, 저런 삶도 공허로 가득 차 버리는데, 그 삶이 참 편해 보였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편안함이나 안락함에 길든다면, 언제라도, 못 본 체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부유함,을 동경하는 마음,이 닥칠 때마다 생기는 심란함 때문에 감성적인 그녀가 현실적인 남편과 결국은 헤어지는 이야기에 충분히 몰입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통속극이고 충분히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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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민,옹꾸라 방송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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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고양이 걱정하는 쥐가 되어서, '틀린' 말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데, 틀린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중권이나 한윤형이나, 박가분이나,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장동민이나, 유세윤이나, 유상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막말하는 나쁜놈이라서,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도 생각하구요.

 

이책은, 자기도 부채가 필요하다는 아들때문에, 오만원어치 책 상자를 꾸리면서, 넣었습니다. 가끔 이슈에 기대어, '카피가 전부'인 책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 끝까지 안 넣으려고 했었습니다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일 좋았던 것은 표제작인 에세이보다 '울프의 어둠'이었습니다. 가르치려는 남자들,에 대해 발언의 기회를 잃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어둠,에 대한 이야기, '미래는 깜깜하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제 여성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다시 상자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페미니즘의 층위가 얼마나 다양한지, 어떤 페미니스트는 '과학이 여성을 해방시키리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고, 어떤 페미니스트는 '자연과 조응하는 여성의 능력,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살리는 그 살림이 가장 큰 가치'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저는 페미니즘은 '약자'인 '여성'의 '감수성'이고, 그걸 단련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책 속에서 말한 것처럼 갈 길이 어찌나 먼지, 역사의 반역은 어떤 식으로 닥치는지, 그래도 먼 길에 이만큼 왔으니, 또 이만큼 가겠지 생각합니다. 


책 말미에 트위터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페미니스트를 다른 뜻으로 읽은 김태훈때문에 촉발되었다는 역자의 말이 있습니다. 그럼, 나도 '선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예 의미를 다르게 쓰고 있으니까. 현실을 사는 나는 현실계에서 '선언'할 일이 없었습니다. 사안에 의견만을 제시할 수 있죠. 

트위터도 안하고 뒤늦게 이슈를 따라잡다가, '장동민의 발언이 혐오스럽지도 않고, 장동민을 옹호하고 싶어한다면,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선언하거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지 않겠다는 걸 글로 남기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대답으로, 저는 페미니스트임,을 여기 선언하겠습니다.-사실,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제 서재 사람들 별로 안 오는데- 

더하여, 그렇게 '사안'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페미니스트를 그렇게 좁게 해석하고 싶은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과 똑같은 짓을 한다고 아들을 팬다면, 그 엄마는 '저열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인 저는-김태훈의 글에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고 트위터를 했다면 아마도 선언했을 저는- 그런 맥락에서 '페페페의 옹달샘 퇴출'에는 역시 '너무 심하지 않아?'라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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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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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동안, 존경하던 선배에게서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문자를 남편이 받았습니다. 나도 그 분을 알고, 그 분의 삶의 모습들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함께 겪으며 어떤 분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왜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베라는 남자,를 마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국가에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국가가 그런 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열여섯에 고아가 되고도, 결혼을 하고, 직장을 구해 삼십년을 일하고, 매 3년마다 차를 바꾸는 것이 돈을 아끼는 것이라 생각하는, 집도 손볼 줄 모르는 젊은 것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런 남자가 아마도 정치적으로 작은 정부,를 택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성석제가 만든, 황만근,을 압니다. 아예 자본주의적 삶에 포박되기를 거부한 그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형일 수도 있는 '황만근'씨처럼. 작가는 지금 정보화사회에서 가장 입지가 좁아졌다는 '블루칼라 남성 노동자'로 '오베'씨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읽는 동안 오베,씨를 좋아했습니다만, 오베,씨가 사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오베,씨는 오베,씨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스웨덴은 열여섯의 고아가 나오면, 위탁가정을 주선해주는구나, 아, 스웨덴에서는 군대도 갈 수 없는 기형 심장을 가지고도 직장을 잡아 삼십년동안 일을 할 수 있구나, 아, 스웨덴에서는 휠체어를 타는 선생님이 직장을 구할 수 있구나, 아 스웨덴에서는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 휠체어를 타는 아내를 출근시키고 또 다섯시에 퇴근도 시킬 수 있구나, 아, 스웨덴에서는 치매걸린 가족때문에 힘들면 가정도우미를 신청할 수 있구나, 아, 가정도우미를 파견할 지 치매에 걸린 가족을 시설에 보내는 게 좋을지 함께 심사하는구나.

아, 스웨덴은 느려터질지는 몰라도, 산 사람을 죽으라고 하지는 않는구나.

아, 우리나라는 아직 스웨덴만큼도 뭘 하는 게 없는데도, 사람은 자신의 삶이 '독립적'이라는 걸 믿고 싶어서, 국가에 요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국가가 오베에게 드러내는 모습이 적대적이었더라도, 오베가 자신이 자신의 삶을 꾸렸다고 믿었더라도, 오베의 삶을 받쳐주던 많은 모습들-믿음직한 아버지를 닮은 오베를 계속 고용하기로 하는 고용주나, 그런 오베를 사랑하는 여자나, 그런 오베와 이웃이 되는 사람들, 그런 오베가 자치회 회장을 하고, 자잘한 규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받는 존중 같은 것-이 단지 오베, 자신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능한 사회였다는 걸 오베가 알기를 바랍니다.  

사는 데는 각오나, 노력이 필요합니다. 독립의 노력,은 물론 중요합니다만, 국가는 내버려두면, 얼마나 타락할지 모르고, 오베씨의 노력-민원과 편지, 항의와 행동-들은 필요하고, 단순한 일상을 원한다고 해서,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려고만 해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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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5-06-2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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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5-06-22 13: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 KBS <TV, 책을 보다> 선정 도서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 지음, 송병선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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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도시락대화라는 걸 준비하면서, 회의실 헤드테이블에 제일 높은 사람을 혼자 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수직적 위계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에, 권력을 가지면 어떨지 모르겠다는 것에 두려웠다. 

민주노동당,에서 전국 10%이상 지지를 얻고 세력을 키워갈 때, 뉴스에서 민주노동당 소속 군의원?이 군청에서 난동을 피우는 장면이 나온 적 있었다. 언론이 얼마나 쉽게 길들여지는 알고, 뉴스가 얼마나 쉽게 조작되는지 알고 있다고, 쉽게 속지 않겠다고 늘 다짐하지만 팔랑귀인 나는, 그 뉴스를 보면서 '내가 누군지 아냐'며 난동을 피우는 그 장면에, 권력을 가지면 저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가, 생각했다. 죽음보다 삶으로 증명하길 원했던 대통령을 보내면서도, 그 사람이 그런 게 아니라, 권력의 주변이 그럴 수도 있어서, 참 힘들겠다,라고도 생각했다. 정치라는 게 국민으로부터 갹출해서 만든 커다란 자본의 이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거라면,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도 했나보다. 


'지금 민주당은 결국 새누리당 놈들처럼 되고 싶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어'라는 경멸의 말을 '그래도 민주당이 낫지 않냐'는 나에게 쏟아내던 남편에게, 내가 이 책 이야기를 한 다음, 남편의 택배상자에 이게 들어있었다. 나보고 보라고 산 건 아니겠지만, 소개 몇 줄만으로도 궁금했었기 때문에 먼저 덥석 읽어치웠다. 

읽고도, 여전히, 내가 그럴 수 있을지나, 우리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주노동당,의 포스터가 예쁘다고 사진이 잘 나왔다고 좋아한, 나는, 그러니까 예쁜 게 좋은 사람이라서, 내 나라의 대통령이 후줄근한 옷을 입고 아침일찍부터 짓던 농사를 조금쯤 손 보고는 털털대는 고물차로 출근하는 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할 지 자신이 없었다. 수직적인 권력의 위계에 길들여진 내가, 멋진 옷과 온갖 멋진 것들에 현혹된 내가, 경쟁과 비교에 익숙한 내가, 다른 나라 정상과 나란히 서 있는 이웃집 아저씨같거나 할머니 같은 '우리' 정상을 좋아할지, 좋아하다가도 불쑥 '일국의 대통령이 그런 차림새가 예의가 아니'라거나, '부끄럽다'고 욕해대는 기득권 언론에 기사라도 나오면, '굳이 별 거 아닌데 책잡힐 일을 왜 해?'라며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지 자신이 없었다. 

읽으면서, 집이나 옷 삶을 구성하는 드러나는 것들을 바꾸지 않는 것이 바로 각오,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직업은 농부인 정치가이고 대통령이었던 무히카를 보고 있자니, 대통령일 때조차 자신의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대통령을 보고 있자니, 나의 이런 태도 때문에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는 피부과에서 관리받는 정치인들만 가져왔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 자체의 감동이 제일 크다. 책 속의 이야기는, 그 존재가 '~카더라'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임을 보여주고,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모호함과 모순이 있어 그렇게 명쾌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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