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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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다.

소설을 덮으면서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옛말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사기를 쳤으면 크게 쳤을 능청스런 거짓말쟁이를 보고 있으려니 떠오른 생각이다. 작가가 옛날에 살았으면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팔고 있을 비루한 행색이지 않을까. 눈을 빛내고 이야기의 강약에 따라 손도 휘젓고, 이상한 노래도 부르면서, 둘레의 남녀노소를 울고 웃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거짓이 분명한 '향수'같은 걸 읽으면서는 들지 않던 생각이 '천하제일 남가이'를 읽으면서는 든다. 어, 이 사람 능청이 고단수인걸. 그게 '향수'와 달리 '능청'인 이유는 내가 그 정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국의 정서가 아닌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정서, 굳이 해석을 달지 않아도 웃게 되는 그런 거다.

내가 소설 속에서 본 작가는 어릴 적 '전래동화집'에 한겨울 양반의 집에 들어가 '가마니만한 푸른 대추를 보았다'고 사기를 치는 모습이다. 주의를 딴 데 돌리고는 재빨리 이것 저것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익살꾼, 말이다. 크기에 집착하고, 이것저것 반박하는 사이 지금이 겨울인 걸 잊게 만드는 사람.

황만근은 그래서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농부가 되어 내 머릿속에 남고, 남가이는 그래서 또 천하제일 미색으로 기억되고. 이렇게 말하면서 또 웃음이 나고. 이미 난 속았으니, 당신이 속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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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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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그렇죠. 그냥 제 성품에는 고를만한 책이 아니예요. 추천으로 읽었는데, 너무 울어서 부끄러웠어요. 어떤 사람이 추천한 거냐면, 조금은 필요에 의해서 친해야겠다, 생각한 사람이 음, 내 취향은 아니네,라는 당신의 취향으로 골라주신 책이지요.

그래요, 제가 좀 쿨한 척 하느라고 혹시 너무 유치하지는 않을까, 혹시 너무 진부하지는 않을까, 너무 교훈을 주려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래도 내가 이분과 친해지려면 읽는 것도 좋아, 그게 어디야, 하면서 읽은 거지요. 그래요. 그랬어요. 그런데, 가슴이 먹먹해져서 바보같이 울었어요.

메마른 정복의 역사가 드러나지요.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백인들과 빈 마차를 뒤에 두고 시체를 안고 걷는 인디언들의 묘사는 가슴이 아파요. 정직하고, 가난하고, 사랑이란 걸 할 줄 아는, 필요한 것 이상 자연에서 취하지 않고, 다섯살짜리에게도 '비밀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언 노부부를 사랑하게 되지요. 작별의 말 대신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라고 말하는 '이번 생은 좋았어, 다음은 어떨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하는, 이 노부부를 알게 된 게 기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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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여성들 - 늑대를 타고 달리는
막달레나의 집 엮음 / 삼인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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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복잡한 문제였다. 성매매란 것은, 성산업이란 것은. 그런데도 이 복잡함은 역시 버겁다. 화마가 쓸고 간 자리에서 반쯤 타버린 일기장이 나오기를 벌써 몇 번째, 그 자리의 여성들은 갇혀있는 희생양이다. 명백히 사라져야 할 매춘과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의 대결구도를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 지역으로 걸어들어가기로 결심한 연구자들처럼 책을 읽는 나도 당황한다. 내가 갇힌 이미지- 살아있을 때는 음탕하였다가 죽은 다음에는 창살에 갇힌 피해자가 되는 모순 같은 것-들이 깨어진다.

선량한 얼굴을 하고서는 매매춘여성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왜'를 연발하는 연구자와는 또 얼마나 다른가. 필리핀 여성이 카톨릭교도인 자신을 어떻게 납득시키면서 클럽에 일하는지, 그녀가 얻는 가족내 권력은 또 어떻게 기형적인지, 문제는 명료해지지 않고 더 복잡해진다. 아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은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조각난 모습으로 아니라, 이상하게 변덕스럽고, 또 그럴 수도 있는 모습들을 보려고 마음먹는 것. 내가 복잡해지는 걸 버티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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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이사벨 아옌데 지음 / 지리산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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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고, 그러면서도 그 속의 삶들은 얼마나 진하고 짙은지 입이 떡 벌어진다구요. 다른 나라의 고통에 무지한 어떤 사람에게도 이건 칠레에 좌파정권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 좌파정권이 어떻게 자유선거로 집권했는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했는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지요.

그건 거대한 정권의 생성과 몰락에 대한 줄거리가 아니라, 그 속에 어떤 삶, 아버지는 군부정권에 복무하는 지주이고 손녀는 혁명가를 사랑하는 어쩌면 특이하고 어쩌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통해 보여주지요. 고문이나 죽음도 또한 그 안에 있지만, 미로속의 방에서 나누는 사랑이나, 커다란 용서도 또 그 안에 있지요. 이 삶의 모습들은 마술적인 묘사들로 더욱 아름답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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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바트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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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사람은 가끔 당황하면서도 행복하겠지만, 내게는 좀 애석한 습관이 있다. 책을 것도 내게 정말 좋았던 책들을 가끔 즉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다는 거다. 이 책은 우리 집에 묵은 동료에게 주었다. 선물이예요. 아들에게 주세요. 책을 선물할 때 얼마나 기분좋은지 말로 못한다. 가끔 책장을 뒤지면서 그 책 어딨더라, 하고 찾을 때는 정말 애석하지만.

크라바트는 책의 처음에서 비루먹은 소년이었다가 책의 말미에서 멋진 청년이 된다. 그렇게 변모하는 것은 학생이 바글바글한 그러니까 호그와트식의 마법학교가 아니고, 음침한 중세의 외딴 방앗간이다. 난 사실, 학생들 하나하나의 묘사의 상투성에 화를 내고 있었다. 살림하는 방앗간의 일꾼묘사가 내내 '보잘 것 없다'거나 '고작'이거나 였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조금은 기우다. 복선이고, 방앗간 마법사를 속이는 것처럼 나를 또 속인 거니까.

마법사는 착하지도 않고, 크라바트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마법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삶과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선택하는 친구의 죽음을 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삶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자기 대신 다른 이를 죽이는 나쁜 마법사에 대한 응징으로 마땅히 후자의 선택을 해야 하지만, 난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운데, 둘 다 가능하면 안 되는가, 하고. 쉬운 선택이 결코 아니다. 사랑도 없고, 우정도 없어도, 가끔은 욕망이 크면 마법이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는 거짓 믿음에도 속으니까. 내가 이런 유혹에 자신없으니까, 땀을 흘리기로 결심한 이 멋진 크라바트가 더 좋은 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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