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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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에 책을 구해 읽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외삼촌이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건네는 노트와 같은 구성이다. 소년이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고, 그 사건들 다음에 외삼촌이 소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사랑의 학교'가 생각났다. 

영화를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자국에 대한 변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로 읽으니까,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지만, 부유하고, 그 부유함의 배경은 없다. 193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부유한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 사이에서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에게 어른이 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데다가 식민지 조선인이었을 거라서 걸리는 감정들이 생긴다.

아이에게, 얼마나 정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닥치고, 어른이 가지는 모순된 감정들이 닥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야기 가운데 아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소설의 단순하고 밝은 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가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호한답시고, 아이들에게 다른 미래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이 정도 이야기조차 금서라고 막았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쁘지 않은 세상은 가능한가 생각하는 거다. 잔인함을 적당히 막아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톤 다운시킨 이야기 가운데, 삶의 잔인함을 직시할 수도 없는 아이들을 키웠던가 회의하기도 하는 거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아이들도 느낄 지 궁금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부모인 내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렇게만 해도 돼. 하지만 지금 네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단다. 중요한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야. 네 눈이 무엇에서 사람의 훌륭함을 찾고 있는지, 그것을 네 영혼이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기타미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누가 뭐래도"하는 오기가 필요하단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네 엄마가 바라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단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될 뿐 네 자신에게 떳떳한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한단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은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는 하지.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코페르,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마음이 감동받을 때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렴.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해 -p52~53, 용감한 친구


어머니는 코페르를 보지 않고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엄마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엄마가 겪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많이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인생에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단순히 그 일만 놓고 본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잘못했다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후회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경험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너도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은 분명히 보고 계실 거야."-p215~216, 돌층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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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stavrogin/15030330 , 이 백자평을 봤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렸을 때, 티비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데, 초청무용수로 공옥진여사가 나왔다. (https://namu.wiki/w/%EA%B3%B5%EC%98%A5%EC%A7%84)

어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지금 저기 티비에서 흉내내는 춤을 추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들 보고 있다. 그 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모습을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면서, 웃었을까, 따라 춤을 췄을까. 내가 받은 충격은 춤 때문이었을까?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내 기억이 정확한지도 자신하지 못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손가락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을 못하는 사람, 살면서 쉽게 만나지지는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볼 지 어떻게 대할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지나치게 무심한 것도. 


그런데도, 이런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장애人' 대신 '장애友',

'귀머거리' 대신 '농인',

'벙어리' 장갑 대신 '손모아'장갑,

'장님' 대신 '시각장애인',


약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내 전부가 약하지는 않고, 친구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처럼 직관적인 우리말 표현 대신 알아차리기 힘든 한자 표현을 쓰는 것은, 무언가 거리를 만드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혐오표현,에서 '혐오'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도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사진을 보고 설명해 주세요'에 말을 찾느라 옴싹달싹 못 하는 사람 이야기를 만난다. 


'긴 의자가 양쪽으로 있는 곳에, 흑인인 엄마와 아이가 울고 있어요'라고 설명할 수 있을 사진 한 장인데, '흑인'이 혐오표현이라고 수정하려고 '아프로아메리칸'을 선택하려 든다.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사진을 보고, '흑인'이란 표현대신 '아프로아메리칸'을 택할 수 없다. 

'아메리칸'이란 표현은 부정확해진다. 관찰하는 행위, 표현하는 행위, 에 판단하고 검열하는 개입이 일어나고, 관찰은 부정확하게 표현되면서 부적절한 의사소통을 일으킨다. 




무언가를 혐오표현이라고 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공옥진 여사의 춤이 혐오스럽다고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곱사,의 움직임을 살면서 평생 못 보았을 수도 있다. 

벙어리장갑이라는 비유 가운데, 나는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간접 체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은 의미를 바꾸는 것 뿐이라고, 자부심의 표현으로 '딴따라'를 쓰는 박진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검열이나 억압으로 혐오표현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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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4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그물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들이지요. 도착증에 가깝습니다.
 

토요일, 아이들 모두와 영화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다. 

보고 나온 차 안 에서, 

"어떻게 제 머리를 그렇게 피가 철철 나게 칠 수 있다니?"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왜 그랬다니?"

"학교가기 싫으니까."


"센과 치히로,도 생각나고, 하울도 생각나고 좋던데."


"어려웠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나는 이 영화에서 노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하려는 말과 같다고 생각했다. 

가상의 공간으로 달아나지 마, 살아. 현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거다. 


악의가 없이 선의로만 가득 찬 세상은 불가능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삶보다 선의만큼 악의도 있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들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노골적이라 싫었고, 별로였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고 싶은 말은 그거지만, 나도 어떻게 말할 지 알 수 없다는 혼돈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어서 좋았다. 

살아가는 가운데 마주치는 모순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로 한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환상적인 모험 다음 순간, 언제나 돌아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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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에서는 아는 형님이 재방송 중인데,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서 데뷔해서 한국어에 어눌한 연예인들이 퀴즈쇼, 형태로 진행하고 있었다. 욕이거나 욕처럼 들리는 말들로 당황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저녁을 먹다말고 

"욕은 왜 하면 안 되?" 

"그거야, 들으면 기분 나쁘니까."

"기분 좋을 때, 하는 건 어때? 혼자 하는 건?"

"뭐 할 수야 있지만, 다른 사람 기분 나쁜 건 네가 어떻게 못 하잖아?"

"옳고 그른 건 누가 정하는데!"

이 무슨 뜬금포인가!!! 중2병인가. 아직 중2는 아닌데. 

"참, 나. 옳거나 그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사는데, 너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거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누가 널 찌를 수도 있는 거고."


오직, 내 마음만 내 마음대로다. 가끔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다들 기분 나쁘다는 이유를 내가 동의하지 못 한다고 해서, 그런 말을 칭찬으로 쓴다 한들 상대가 칭찬으로 듣겠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를 '돼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어린 딸에게,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어. 

다들 칭찬으로 하는 말을 내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말에 화를 낸다 한 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겠냐고. 아유, 내가 본 아기 중에 제일 예쁘네,라고 말하는 언니에게, 그 말이 가지는 어떤 차별성과 비교의 태도, 이미 주어져 개선 불가능한 특성에 대한 칭찬이 아이를 얼마나 한심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서 뭐하냐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적당히 내 의견을 감추는 거지. 

살아남기 위해 조심하는 거지. 

가끔 너무 크게 웃는 것도, 어떤 이상한 사람의 심사를 건드릴지 알 수 없는데.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그래, 한 번쯤 해보고 댓가를 치를 수도 있겠지. 

운이 좋다면 살아남겠지만, 그런 데 자신의 운을 쓰고 싶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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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채로, 

2023년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애달픈 사랑이야기인 '연인'에서 길채는 포로가 되어 노예시장에 서 있다. 

가상의 국가 아스달의 두번째 시즌인 '아라문의 검'에서 아스달의 타곤,은 은섬,이 태우는 숲 가운데, 섰다. 


1.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172449

6.25 전쟁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이 책을 읽고, 전쟁,에 대해 썼었다. 


밥 하기 싫어서 뭐라도 생기면 겨우 먹는 배 곯는 원주민을 부러워하는 나는, 전투기의 비행소음이 멋지다고 방방거리는 평화 중에 자란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책 속의 이상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인 젊은 남자는 전쟁을 겪으면서 이상을 놓치는 거였던가. 


나는 전쟁이라는 문명의 허약한 울타리가 부서진 진공의 상태를 책 속에서 보고는 무서웠다. 


2. 나목, 도둑맞은 가난

https://blog.aladin.co.kr/hahayo/14868275


엄마가 내게, '얼마나 배고플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이나 한심함,을 읽는 내내 느꼈다. 


전쟁을 겪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경외심을 갖는다. 내게 배고픔을 일깨워 나를 부끄럽게 만든 엄마는 군인 구경조차 못 한 전쟁을 겪었다지만, 그 삶을 어찌 내가 알겠나 싶은 순간 순간들을 내게 전한다.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를 바 없는 젊은 여자가 참혹한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강인한 거라서, 길을 잃고 헤매고, 비행기에서 우는 그 여자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음을 본다. 




3. 전쟁같은 맛

https://blog.aladin.co.kr/hahayo/14841842


나목,이랑 같이 이 책을 읽고 있어서, 가소롭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나 보다. 

죽이지 않는데도 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리적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른 걸 폭력이라고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괴롭지, 괴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가소롭다고. 

자기 엄마에게 '배 지나갔다고 티 나냐'면서 양공주라도 해서 돈을 가져오라는 압박에 쫓기듯 결혼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위의 책 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읽다가, 동양인은 하나뿐이라고 소수자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면 참. 싶었다. 전쟁의 맛을 모르는 딸이, 엄마가 도망친 세상이 어떤지 모르는 딸이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친절하기를 바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병이, 어머니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해석하는 딸의 어떤 말이 나는 가소롭다. 그렇게 쪼개기만 해서야 사는 게 가능한가 싶은 소수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말들을 참기 어렵다.


전쟁으로 펼쳐지는 무법의 공간에 대해 듣는다. 

시사인인가 한겨레인가, 과거사위원회가 전쟁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전쟁 중에 군인 신분이었던 사람이 오랜 사적인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그 죽음은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전쟁범죄로 최종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길을 걷다가, 명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에 들어가 일가족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기사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참을 수 없었다고 했던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앙심을 품는 데는 이유를 알 수 조차 없다. 

평화 시에 문제삼는 어떤 말들,의 억압은 결국 사라질 수 없다. 그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또 나타날까.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감수하는 불편이 결국 사라질 수 있을까. 


아라문의 검,에서 예언의 아이들,이 꿈꾼다는 세상이 너무 추상적이라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니. 약하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뇌안탈은 어떻게 약한 존재들에게 밀려났는가. 약하면서도 연합으로 강해졌다면, 이제 그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약하고 강하다는 건 불변이 아니고, 거대한 나라에 대해 강한 나라라고 해도 모두 다 강한 건 또 아니고 말이다. 약하다고 해도 뭉치면 강하고, 강하다고 해도 하나 뿐이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다음이,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꿈을 증명하는 공간이 될 테지만,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보복의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연인,에서 길채는 '일하는 언니가 사람들 입길에 올라서 부끄럽다'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사람은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거'라고 말한다. 


살고 죽는, 단순함이 가득 찬 서사 가운데, 수없이 쪼개는 말들이 하찮아서 어떤 괴로움의 토로가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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