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제주4.3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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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다. 페이지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건 증언집이고, 여기 증언하고 있는 열 명은 아주 작은 수이다.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아직도 두려워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딱 열 명이다. 지금은 늙은 얼굴이지만, 젊고 어렸던 어떤 날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한 이야기, 뭍의 형무소에서 살던 이야기, 전쟁과 다시 귀향의 이야기, 귀향과 감시당하는 일상의 이야기, 여전히 두려운 삶에 대한 이야기,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읽는 내내 목이 메었지만, 무얼 내가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이 사건들을 알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또 무엇이 가능하게 할 지 알지 못한다. 그런 아픈 삶을 아예 모른다는 것, 혹은 모른 체 했던 것이 미안해서 당신이 알길 바라는 거다.

다 늙어 친구들과 가는 해외여행의 비자를 거절당하던 심정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데, 4.3을 이미 반 세기 전에 지나간 일이라고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라고 생각해버릴까봐.

하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혹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안쓰러워서 당신도 알기를 바라는 거다. 할 수 있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잘못하신 게 없으세요, 하고 손을 잡고 못 알아듣는 사투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으면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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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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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묘사하는 작은 소년의 입을 보면서, 이야기를 기다린다.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랑이 미움으로 오해받는 꽉 막힌 가족안에서 여동생이 태어나 갑자기 죽을 때까지, 오빠이면서 아들이면서 손주인 동구가 이 소설의 화자이다. 사랑받지 못했는 데도 사랑하고 있는 마음깊고 따뜻한, 게다가 아직도 '어린' 소년이 거기 있다.

작가의 마음에 들어와서 이 소년을 만나게 했던 난치병 소년의 동생처럼, 절대적으로 부족한 관심 속에서 알 수 없이 깊어진 마음을 가진 그래서 지나치게 안쓰러운 소년이 거기 있다.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상처만 내고 있는, 답답하고 답답한 그런 현실이 거기 있다. 꿈결같은 사람은 또 그렇게 꿈결같이 사라지고, 앞도 뒤도 없어보이는 상황에 길을 내야 하는 것은 자신말고는 없는.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 궁금하다. 그 꽃을 안다면, 그 꽃을 사랑하는 동구의 마음도 더 가까이 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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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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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다.

소설을 덮으면서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옛말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사기를 쳤으면 크게 쳤을 능청스런 거짓말쟁이를 보고 있으려니 떠오른 생각이다. 작가가 옛날에 살았으면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팔고 있을 비루한 행색이지 않을까. 눈을 빛내고 이야기의 강약에 따라 손도 휘젓고, 이상한 노래도 부르면서, 둘레의 남녀노소를 울고 웃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거짓이 분명한 '향수'같은 걸 읽으면서는 들지 않던 생각이 '천하제일 남가이'를 읽으면서는 든다. 어, 이 사람 능청이 고단수인걸. 그게 '향수'와 달리 '능청'인 이유는 내가 그 정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국의 정서가 아닌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정서, 굳이 해석을 달지 않아도 웃게 되는 그런 거다.

내가 소설 속에서 본 작가는 어릴 적 '전래동화집'에 한겨울 양반의 집에 들어가 '가마니만한 푸른 대추를 보았다'고 사기를 치는 모습이다. 주의를 딴 데 돌리고는 재빨리 이것 저것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익살꾼, 말이다. 크기에 집착하고, 이것저것 반박하는 사이 지금이 겨울인 걸 잊게 만드는 사람.

황만근은 그래서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농부가 되어 내 머릿속에 남고, 남가이는 그래서 또 천하제일 미색으로 기억되고. 이렇게 말하면서 또 웃음이 나고. 이미 난 속았으니, 당신이 속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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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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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그렇죠. 그냥 제 성품에는 고를만한 책이 아니예요. 추천으로 읽었는데, 너무 울어서 부끄러웠어요. 어떤 사람이 추천한 거냐면, 조금은 필요에 의해서 친해야겠다, 생각한 사람이 음, 내 취향은 아니네,라는 당신의 취향으로 골라주신 책이지요.

그래요, 제가 좀 쿨한 척 하느라고 혹시 너무 유치하지는 않을까, 혹시 너무 진부하지는 않을까, 너무 교훈을 주려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래도 내가 이분과 친해지려면 읽는 것도 좋아, 그게 어디야, 하면서 읽은 거지요. 그래요. 그랬어요. 그런데, 가슴이 먹먹해져서 바보같이 울었어요.

메마른 정복의 역사가 드러나지요.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백인들과 빈 마차를 뒤에 두고 시체를 안고 걷는 인디언들의 묘사는 가슴이 아파요. 정직하고, 가난하고, 사랑이란 걸 할 줄 아는, 필요한 것 이상 자연에서 취하지 않고, 다섯살짜리에게도 '비밀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언 노부부를 사랑하게 되지요. 작별의 말 대신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라고 말하는 '이번 생은 좋았어, 다음은 어떨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하는, 이 노부부를 알게 된 게 기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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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여성들 - 늑대를 타고 달리는
막달레나의 집 엮음 / 삼인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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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복잡한 문제였다. 성매매란 것은, 성산업이란 것은. 그런데도 이 복잡함은 역시 버겁다. 화마가 쓸고 간 자리에서 반쯤 타버린 일기장이 나오기를 벌써 몇 번째, 그 자리의 여성들은 갇혀있는 희생양이다. 명백히 사라져야 할 매춘과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의 대결구도를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 지역으로 걸어들어가기로 결심한 연구자들처럼 책을 읽는 나도 당황한다. 내가 갇힌 이미지- 살아있을 때는 음탕하였다가 죽은 다음에는 창살에 갇힌 피해자가 되는 모순 같은 것-들이 깨어진다.

선량한 얼굴을 하고서는 매매춘여성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왜'를 연발하는 연구자와는 또 얼마나 다른가. 필리핀 여성이 카톨릭교도인 자신을 어떻게 납득시키면서 클럽에 일하는지, 그녀가 얻는 가족내 권력은 또 어떻게 기형적인지, 문제는 명료해지지 않고 더 복잡해진다. 아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은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조각난 모습으로 아니라, 이상하게 변덕스럽고, 또 그럴 수도 있는 모습들을 보려고 마음먹는 것. 내가 복잡해지는 걸 버티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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