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그늘’이 될 수 있기를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


  1. 안타까운 기억 하나

“교장선생님 다른 데 말고 꼭 거기에 써주세요. 비가 오면 비를 맞지 않게, 여름이면 해가 너무 뜨겁지 않게, 거기에 지붕을 덮어주세요. 혹시 형을 기다리고 서 있는 어린 동생이 비 맞지 않도록……. 그래서 그걸 바라보는 형이 가슴 아프지 않도록…….”


  그 누군가에게 뜨거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거나, 비가 쏟아질 때 우산을 같이 나눈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아니 나의 제자, 나의 피붙이에게는 그런 배려를 했을지언정 이 책에 나오는 윤수나 은수 같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한 번도 손 한 번 제대로 내밀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부끄럽고 가슴 아팠다. 더군다나 사회로부터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힌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려고 해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이 사회로부터 받았을 냉대, 무관심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정윤수의 삶의 기록인 ‘블루노트’를 읽는 내내 가슴이 너무나 시려왔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한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도 이런 삶을 살았을 터인데. 지금 그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 가슴 한 편이 싸해진다.

  

  몇 년 전,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느 토요일. 결혼식에 가져갈 짐을 아침부터 급하게 꾸려 시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라디오 뉴스에서 들려오는 기사가 문득 우리 반 그 아이의 이야기가 맞을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무섭도록 강하게. 모중학교 모양이 아버지에게 재떨이를 던져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단 몇 분도 안 되는 아나운서의 그 몇 마디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온 몸이 떨려왔다. 결국 올 것이 온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며칠 전에 형사가 그 아이가 특정한 시간에 학교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러 왔을 때도 그 아이가 설마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당시에는 빡빡한 학교 일정과 결혼을 앞두고 이런 저런 개인사로 인해 그 아이에 대해 잊고 지낼 때가 많았다. 아니 일부러 잊고만 싶었다. 내 힘으로는 그 아이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음부터 그 아이는 우리 학교에 정을 못 붙였다. 수시로 가출을 했고, 심지어 지방의 공장에 가서 한 달 남짓 일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고, 강릉까지 놀러갔다가 그 곳으로 전근 간 체육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 토요일까지 반납하며 친구를 동원해 지하철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 아이를 잡아놓고 큰 소리로 훈계를 하기도 했었다.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집에 있을 수 없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 아이가 가정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그 때는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었기에 그 아이를 배려할 수도 없었다.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한 번이라도 가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더라면, 아니 그 아이 집에 같이 가 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아마도 나 또한 겉모양만 다 큰 어른일 뿐, 그에 걸맞는 성숙한 인격은 아직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가 알콜 중독자이며 끼니도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빈사상태인 아버지에게 매일 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종료된 뒤였다. 그 아이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감호소에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1년 남짓 교육을 따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아이에게 면회를 가보지도 않았고, 가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 때 나 또한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 아이에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나 사연이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와는 전혀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그래서 근접해서는 안 되는 흔히 보통사람들이 ‘범죄자’에게 갖고 있는 선입관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도 지독한 편견인가?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규정지은 ‘범죄’를 저지른 그들을 집단적으로 격리시키는 것이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을 ‘사형’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정윤수가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의 매질을 피해 동생과 함께 어느 누구의 도움도 닿지 않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내가 가르쳤던 그 아이의 삶의 진실에 대해서 다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원에서 힘이 센 아이들이 둘러쌌을 때 윤수와 은수가 맛 보았던 극도의 불안이나 치욕도 몰랐을 것이고, 어른들의 앵벌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당하다 눈이 멀어 죽어 가는 동생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절함이나 세상에 대한 끝없는 배신감도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살인자에게도 그만의 ‘양심’과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윤수가 그런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어주고, 조금만 배려해주었던들 그가 그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또한 그 아이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기억은 없다. 단지 빨리 그 아이에게서 벗어나서 덮어버리고픈 충동만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정윤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 아이가 떠올랐던 것은 어떤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2. 사회적인 공명(共鳴)의 필요성


 우리들은 그저 이 책에 나오는 문유정처럼 나의 삶이 얼마나 버겁고 힘든지 세상이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는가?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일상의 지루하고 남루한 삶 조차도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하지만 문유정은 정윤수라는 사형수를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룻밤만 지나면 처음으로 자신의 맘을 열어 이야기했던 정윤수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 오열하고 만다.

  윤수에게 닿을 수는 없지만 그와 아픔을 같이 하고픈 유정은 자신이 죽기보다 싫어하는 어머니를 용서하게 된다. 어렸을 때 부잣집 사촌 오빠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집에 돌아온 유정을 감싸주고 이해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유정이 꼬리를 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유정의 잘못으로만 생각했던, 그래서 사촌 오빠 보다도 더욱 이해할 수 없고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던 어머니를, 내일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윤수를 위해 힘겹게 용서를 했던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기에, 산간 오지 학교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얼마 되지도 않는 사비를 털어 학용품을 사서 보내고 그 아이들과 새 해 일출을 보고자 했던 윤수를 위해서. 그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고, 다시는 해가 떠오르는 것도 볼 수 없는 윤수를 위해서 유정이는 온 몸을 다해서 어머니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삶을 간절히 살고자하는 한 청년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 그가 그토록 원하는 아이들과 함께 일출이라도 볼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줄 수 없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법과 사회 제도라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도 비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약자에게는 조금의 배려도 없는 것이었다니.

  문유정이 어머니를 힘겹게 용서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가 ‘공명(共鳴)’이었다. 함께 울림. 유정이가 윤수를 위해 자신의 치부도 어머니에게 드러내었듯이 우리도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줘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도 그들이 느낀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유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사형 폐지론에 대해서 좀더 심도 깊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피릿 베어’라는 소설을 보면 사회적으로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스스로 뉘우칠 수 있도록 ‘원형평결심사제도’라는 것을 시행한다. 절대로 혼자서는 도망칠 수 없는 무인도에 죄를 지은 사람을 풀어 놓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만 주고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형제도는 소설 속에서 문유정이 말한 것처럼 살인한 자에게 다시 법적으로 공인된 사형이라는 이름의 ‘살인’으로써 보복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한 번 쯤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사회적으로 같이 마음을 마주 울릴(공명)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 모니카 수녀님의 헌신적인 모습은 아주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모두가 꺼리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고 이해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3. 다시 일상으로


  뜨거웠던 여름, 계곡 산 그늘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책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저 약간의 교훈을 가미한 한 사람의 안타까운 삶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하며 가볍게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특히 문유정이 자신의 아파트 주변에서 한 아이를 둘러싸고 마구 때리는 아이들을 경찰에 신고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답답했다. 아무리 신고를 해도 곧장 달려오지 않는 경찰.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지나쳤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된 채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그 아이들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누군가를 죽인 사람은 당연히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제자들에게도. 적어도 그들에게도 아무에게나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거라고, 그걸 어느 누군가에게 말하고 이해는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울림에 더욱 힘을 실어 사회적으로 크게 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정윤수 같이 안타까운 생명이 삶을 아예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적인 ‘보살핌’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 사회가 윤수의 동생처럼 비오는 날 오갈 데가 없어 형을 기다리는 불쌍한 아이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운동장 가에 지붕’ 하나 정도 만들어 줄 수 있는 배려 정도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에게 작으나마 ‘그늘’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진샘 2005-11-2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체한 문예공모전에서 작은 상을 하나 수상했다. 사실 이 글에 인용된 그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 그 아이에게 미안해서 수상식에는 못 갈 것 같다. 그냥 좀 뿌듯하다. 하지만 내 주변 샘들에게는 알리지 않으련다. 너무 부족하고 부끄럽기 때문에. 그래도 이것도 작은 삶의 기록이니까 이 곳에는 올리고 싶었다. *^^*

abraxas 2010-04-0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전 이 작품을 읽고 그저 사형제도 그 자체에 대해서만 논했는데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를 품자는 이런 글이 나올 수도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