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 고백 에세이
노무현 지음 / 새터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손으로 만든 유일한 대통령.
내가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던 대선은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92년 대선이다.
그 당시 난 3당야합으로 후보가 된 영삼이를 싫어했고 결국 김대중을 찍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투표권의 시작은 결국 번번히 '죽은표', 즉, 사표가 되었다.
정계은퇴를 번복한 김대중이 싫어서 투표를 포기했던 97년의 기억.
그러는 동안 난 기성의 정치권에 염증을 느꼈고 서서히 정치를 멀리했기 시작했다.
그 놈이 그놈인 한국 정치판에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 인물은 바로 '노무현' 이었다.
5공 청문회를 통해 벼락스타가 되었던 그가 고집스런 바보 노무현이 되더니 조용히 잊혀졌다가
그해 2002년, 월드컵의 광풍처럼 몰아친 '바보 노무현'의 노란 열풍에 난 열광했고
선거 전 날 전격적으로 이뤄진 정몽준의 배신에 눈물을 흘리며
또 한번 나의 선거는 '사표'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기적과 같은 그 선거의 결과 그는 내 손으로 뽑은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거짓말 같은 그의 죽음. 그리고 때늦은 후회.
토요일 새벽에 정말 거짓말처럼 전해진 그의 죽음.
제발 오보이기를, 정말로 거짓말이기를 그렇게 바랬던 그의 죽음은 결국 현실이었고
500만 국민의 슬픈 추모와 수십만 시민의 눈물을 벗삼아 그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어느덧 한달이 지나고 이제서야 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서야 그가 남겨둔 작은 유작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난 그를 잃은 슬픔에 가슴이 메이는 아픔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를 선택했던 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그를 선택한 것이 결코 후회가 없는 선택이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드라마 같은 그의 여정. 그 속에 담긴 그의 의지.
고졸 출신으로 기적 같은 사시 합격,
잘 나가던 변화사를 집어치우고 노동자의 곁을 지킨 인권변호사로의 변신,
깨끗한 이미지로 13대 총선에서 국회로 진출,
그리고 5공 청문회에서 증인들을 쩔쩔매게 하며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영웅,
3당야합에 반대하며 그의 정치적 스승 김영삼을 단번에 버리고 끝까지 저항했던 무모한 인물,
어느날 갑자기 의원직 사퇴서를 던지고 국회를 내던지던 철부지 정치인,
모두의 만류를 무릎쓰고 부산에서 4번 출마하여 4번 모두 낙선한 '바보 노무현',
국민들의 열광으로 권력의 최고봉에 올랐다가 비극적인 최후로 마감한 정치인 노무현.
그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던 그의 삶.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세상과 싸웠던 그의 뚝심.
적당한 타협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은 과감히 거부했던 사람.
떠나 보내고 나서야 그를 그리워하고 잃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은 나의 허무함이여.

정치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아들이었던 바보의 이야기.
이 책은 그가 14대 총선에 낙선한 직후 자신의 짧았던 국회의원 4년을 회고하며 써내려간 이야기 이다.
여의도에 들어갔으나 아무런 빽도 없는 힘없는 국회의원으로써 겪은 4년의 정치판.
미우나 고우나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과 그의 정치적 동지인 김대중과의 인연.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갔던 자연인 노무현의 이야기.
그의 영원한 고향마을과 가난했던 어린시절부터 고시에 합격해 정치인으로 성장한 시점까지의 그의 인생 이야기.
내가 바라보았던 노무현과 내가 알고있던 노무현과는 다른 인간 노무현의 냄새.
이제는 다시 맡고 싶어도 맡을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사람 노무현'의 냄새가 가득 담겨있는 에세이이다.
왜 이제서야 난 그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가?
왜 이제서야 난 그의 신념을 알려고 했던 것일까?
그저 표를 던져놓고 그가 잘하기를 바라기만 했던 나의 지독한 무관심이 그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금이나마 실망했던 나의 작은 배신이 그를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 버렸다.
지독한 반성과 후회 속에서도 내가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그를 위해 던졌던 나의 한 표가 나에게 던져주는 비겁한 변명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아들이 세상을 알게될 나이가 되었을 때 난 자랑스럽게 그를 찍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테니까.

나는 그때 지식이 잘못 쓰여질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거꾸로 서 있거나 가치 판단이 흔들릴 때,
잘못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지식은 어떤 도둑질이나 살인보다도 위험한 범죄인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국민을 속이는 머리를 빌려주고 이론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전두환 씨 같은 사람이 8년간이나 독재 정권을 유지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 P. 24

"여보, 나좀 도와줘. 나는 꿈이 있어. 나는 그 꿈을 실현하고 싶어.
 정치를 하려면 미쳐야 된대. 여보 양숙 씨, 우리 같이 한 번 미쳐보자. 응?"
- P. 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으로 매력적인 작가. 미야베 미유키.
[모방범], [낙원], [화차]에 이어 4번째로 만나는 '미미여사'의 작품이다.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쓴다는 그녀지만 우연히도 내가 읽은 소설들은 
하나같이 사회성이 짙은 작품들이었고 이번 소설 [이유]도 지극히 사회적인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은 선뜻 집어낼 수 없는 두께의 압박이 언제나 부담이 된다.
이 책 또한 그런 압박은 여전하지만 읽고나서 남는 아쉬움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두꺼웠으면, 조금 더 이야기가 전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
사건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을 따라가는 추리소설.
사건의 해결에 중점을 두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소설.
그렇기에 언제나 두께의 압박을 주지만 절대로 지루하지 않는 매력을 지닌 소설.
엄청난 필력을 보여주는 대단한 작품들로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
치밀한 구성과 짜릿한 반전으로 승부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작가.
'미미여사'는 읽으면 읽으수록 매력을 느끼게 하는 참으로 매력적인 작가이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숨겨진 현대사회의 치부.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직전에 분양되어 거품경제 붕괴 후 입주하기 시작한 고급 아파트.
우리로 치면 '타워 팰리스'와 비슷한 최고급 아파트에 최악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아파트 분양회사 부장의 말대로 비싼 아파트일수록 이웃은 사라진 것인지...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심지어 그들이 언제 이사를 왔는지도 모른다.
살해된 4명의 신원을 밝히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이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현대와 과거를 일통하는 일본사회의 온갖 치부가 드러난다.
또한 그들의 치부라는 것이 결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거부할 수 없기에 그대로 우리의 치부가 된다.
그런 치부가 마냥 부끄럽지만은 아니게 만드는 것을 결국 가족의 힘이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가족의 위대함이다.
수많은 이유로 인해 이미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있는 현대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것도
결국 가족이라는 말로만 대신할 수 있는 끈끈한 유대감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살인이 있고 범인은 있으나 추리는 없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결국 범인을 밝혀지지만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일단 소설은 작가가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인터뷰로 이어지는 르포 형식이다.
일반적인 소설에 익숙한 나로서는 생소할 수 밖에 없는 형식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형식이다.
작가가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4명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독작의 짐작으로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탐정이 나오지도 않고 경찰의 수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66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중에서 570페이지가 넘어서야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
그러나 그 진상이 그리 궁금해지지 않는 것은 소설이 사건에 대한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살해된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들과 주변인들을 훑어 나가면서
현대 일본사회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과 그들의 얽히고 설킨 가족사와 아픔들을 따라가고
그 과정을 통해 현대와 과거를 아우르는 일본 사회의 아픔을 어루고 달래는 방대한 작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결코 추리소설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이야기.
일본의 이야기이고 소설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러나 집이 가족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투자와 허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금의 한국사회,
아빠는 회사로, 엄마는 부업으로, 아이들은 학원으로 떠밀려서 뿔뿔이 흩어진 한국의 가족,
소설에 나오는 10여년 전의 일본의 현실이 지금의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러다보니 소설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난 이 소설이 무섭다.
점점 더 우울해지고 삭막해지고 박다른 구석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이미 일본은 10여년 전에 겪었고 작가는 그런 일본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치료제를 처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외국작가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시대 우리작가의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과 가난하지만 뭉쳐사는 가족들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사회의 가치는 부유함과 명예가 아니라 가족에 있음을 보여주는 의도적이 차별이다.
인간이란 뿌리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가족에 얽혀있음을 말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결국 따뜻한 소설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미미여사'의 소설 중 단연 최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미미여사의 대표작을 만나다 !!!
[모방범], [낙원]을 통해 접하게 된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미유키.
'미미여사'라는 애칭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대표작 [화차]를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모방범]과 [낙원]을 처음 보았을 때 책의 두께가 주는 압박감에
쉽게 읽어내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화차] 또한 그 두께의 중압감은 여전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같이 두께의 압박감이 다 읽은 후의 두께의 아쉬움으로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책의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빠져드는 소설의 몰입도는 여전히 최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들에 그렇게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사회적인... 그러나 결코 따분하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은 지극히 사회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화차] 역시 신용카드와 대출로 대변되는 소비자 금융의 폐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자칫 신용카드의 계획적인 사용을 이야기하는 캠페인적인 내용으로 지루할 수 있지만
그녀의 작품은 단 한순간도 그런 지루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쉴틈없이 사건을 이어지게 만들어 긴장감을 높히거나 박진감 있는 전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아주 조금씩 드러내는 사건의 단서들과
그 단서들을 조합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지극히 사회적인 내용이지만 또한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더욱 무서운 이야기이다.
소설속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사실적이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결코 과장이나 비약이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상으로 사회문제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상상으로 사회문제를 파헤쳐 나가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오히려 소설에 나오는 뛰어난 능력의 형사가 실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범인의 실체는 결코 드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처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사회적이면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신용카드... 언제든지 화차(火車}가 될 수 있다 !!!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들은 모두 양날의 칼을 숨기고 있다.
모든 제도나 문명들이 사람들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개발되고 만들어지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그 이기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라는 것도 애초의 의도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함이지만
카드사의 잘못된 홍보와 사용자들의 한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도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다'는 이유로 사용한 신용카드과 결국 비극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잘못은 물론 있지만 누구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누구나 '화차'에 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다만 작가가 의도한 것은 신용카드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극을 경고하는 것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화차'에 대한 경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고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랑을 빼앗긴 여자. 요리로 돌아가다
4년간 사귄 남자를 자신의 쿠킹 클래스에 다니던 전직 모델에게 빼앗긴 요리사.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그녀에게 이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사랑에 빠져 그만두었던 레스토랑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 요리에 빠져든다.
이별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요리에 빠져든 그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복수를 꿈꾼다.

생소한 요리의 세계. 그 매력에 빠지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에서 요리의 세계를 다루었지만 개인적으로 읽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요리사라는 직업의 세계가 다루어지는 이 소설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저 배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나에게는
소위 미식가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도 그들의 모습을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지만 시각의 변화는 있었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요리사의 세계, 요리의 세계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재료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들, 요리사가 요리에 담는 생각들,
그리고 주인공의 삶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요리들.

사랑....이별... 그리고 복수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사랑이야기가 나오고 이 소설도 그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이 책은 이별을 했으나 이별을 거부하는 한 여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이별이란 것이 한 쪽의 일방적인 통보로도 가능한 것이라고 하지만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쪽에서는 너무도 황당한 일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받은 상처의 깊이는 그가 상상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지만 
이별을 통보한 그의 입장은 그녀의 상처만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별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던져진 그녀.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아픈 기억의 시작이라는 것,
사랑이란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버리면 그만인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
사랑할 때 내 뱉은 사랑의 약속들이 이별의 순간엔 날카로운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사실들이 무시무시한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일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이 소설을 이미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고 수많은 찬사들이 붙어진 베스트셀러이다.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면서 최근 표절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이기에 꼭 읽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일까?
소설의 이야기는 약하고 소설의 문체는 어지럽다.
소설의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내가 읽을 만한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니홈피에 열광하고 밥을 먹으며 사진을 찍어대는 요즘의 젊은 여자들이 대상이었을까?
그러나 가장 큰 불만은 소설의 말들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국 소설과 우리나라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런 문체의 차이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문학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가볍거나 쉬워서는 안된다.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뭔가 애매모호하면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베스트셀러를 읽는다는 것이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어가 버리는 느낌이다.
이 소설을 그런 나의 인식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그런 소설이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완소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년 1월까지만 해도 나에게 일본 소설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족적 감정을 아직도 껴안고 사는 나란 인간에게 일본 소설은 책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쩌다 손에 쥔 작품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이었다.
그 소설 한권이 바꿔놓은 것은 개인적으로 참 많았다.
그 한권으로 시작하여 이미 내 책꽂이의 두칸을 가득 채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
이제는 어떻게 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완소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런 게이고의 새로운 단편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결국 또다시 구입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런 나의 선택은 대만족이었다.

그 어느 추리소설 보다 재미있는 7편의 단편들.
7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단편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작품들로서 그의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짤막한 길이 때문에 단편이라고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7편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가 독립된 추리소설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들이다.
그 중 몇편은 실제로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과 비슷한 설정을 가진 것들도 있다.
한권의 소설을 읽었으나 7권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 그것도 모두 재미있는 작품들을.
언제나 놀라지만 그의 놀라운 다작과 그 속에서도 전혀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 치밀함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난 또 한번 그의 재능에 질투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살인은 있다. 그러나 범인은 있다.
이 책에 나온 7편의 이야기들은 공통된 형태를 띄우고 있다.
분명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범인은 명확하지 않거나 동정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작은 고의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범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어둠속의 두사람]은 분명 범인은 있으나 그 범인이 진짜 범인인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춤추는 소녀]는 전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범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끝없는 밤]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힌 범인의 슬픔 때문에 동정심이 생긴다.
[하얀 흉기]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범인의 심정이 와 닿아서 가슴이 아팠고
[굿바이 코치]에서는 무서우리만치 치밀한 심리묘사에 범인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
[범인없는 살인의 밤]만은 정상적인 추리소설처럼 범인에 대해 조금의 미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게이고의 특성이 잘 드러난 단편들
내가 게이고의 작품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추리소설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소설들은 분명 추리소설이지만 사건의 해결에 중점을 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이 아닌 사건에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국 독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 [방황하는 칼날], [백야행] 등 그의 작품들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특성이다.
여기에 나오는 7편의 이야기들도 또한 그런 일관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추리의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놓은 치밀한 함정들도 놀랍지만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 특히 범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로는 학원스릴러의 형태로, 때로는 사회의 문제를 찌르는 이야기로, 때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이야기로
그 형태와 양식은 바꾸지만 게이고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의식은 결국 사람이다.
결국 나 역시 그런 마력같은 매력 때문에 게이고의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추리의 계절.
그 시작을 난 게이고와 함께 하였다.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기술은 이번에도 여전하였고
추리소설에서 눈물을 맺히게 하는 몹쓸 재능도 여전하다.
단편이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에 조금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추리의 계절을 시작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강력추천할 만한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