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완소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년 1월까지만 해도 나에게 일본 소설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족적 감정을 아직도 껴안고 사는 나란 인간에게 일본 소설은 책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쩌다 손에 쥔 작품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이었다.
그 소설 한권이 바꿔놓은 것은 개인적으로 참 많았다.
그 한권으로 시작하여 이미 내 책꽂이의 두칸을 가득 채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
이제는 어떻게 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완소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런 게이고의 새로운 단편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결국 또다시 구입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런 나의 선택은 대만족이었다.

그 어느 추리소설 보다 재미있는 7편의 단편들.
7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단편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작품들로서 그의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짤막한 길이 때문에 단편이라고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7편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가 독립된 추리소설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들이다.
그 중 몇편은 실제로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과 비슷한 설정을 가진 것들도 있다.
한권의 소설을 읽었으나 7권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 그것도 모두 재미있는 작품들을.
언제나 놀라지만 그의 놀라운 다작과 그 속에서도 전혀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 치밀함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난 또 한번 그의 재능에 질투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살인은 있다. 그러나 범인은 있다.
이 책에 나온 7편의 이야기들은 공통된 형태를 띄우고 있다.
분명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범인은 명확하지 않거나 동정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작은 고의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범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어둠속의 두사람]은 분명 범인은 있으나 그 범인이 진짜 범인인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춤추는 소녀]는 전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범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끝없는 밤]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힌 범인의 슬픔 때문에 동정심이 생긴다.
[하얀 흉기]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범인의 심정이 와 닿아서 가슴이 아팠고
[굿바이 코치]에서는 무서우리만치 치밀한 심리묘사에 범인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
[범인없는 살인의 밤]만은 정상적인 추리소설처럼 범인에 대해 조금의 미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게이고의 특성이 잘 드러난 단편들
내가 게이고의 작품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추리소설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소설들은 분명 추리소설이지만 사건의 해결에 중점을 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이 아닌 사건에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국 독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 [방황하는 칼날], [백야행] 등 그의 작품들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특성이다.
여기에 나오는 7편의 이야기들도 또한 그런 일관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추리의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놓은 치밀한 함정들도 놀랍지만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 특히 범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로는 학원스릴러의 형태로, 때로는 사회의 문제를 찌르는 이야기로, 때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이야기로
그 형태와 양식은 바꾸지만 게이고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의식은 결국 사람이다.
결국 나 역시 그런 마력같은 매력 때문에 게이고의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추리의 계절.
그 시작을 난 게이고와 함께 하였다.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기술은 이번에도 여전하였고
추리소설에서 눈물을 맺히게 하는 몹쓸 재능도 여전하다.
단편이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에 조금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추리의 계절을 시작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강력추천할 만한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