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의 침묵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2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여전히 유쾌한 다구치와 시라토리. 

아마도 다구치가 펄쩍 뛰겠지만 두사람의 콤비는 정말 찰떡궁합이다.
명확하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속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다구치와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서 숨길 수 없는 본성을 느러내는 시라토리.
작가의 전작인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콤비는
이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기본적인 성향을 설명해야 했던 전작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바로 끌어낼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의 등장. 새로운 라이벌(?)의 형성. 

전작에서 주인공 이상의 포스를 보여주었던 후지와라 간호사.
이 작품에서는 그에 견줄만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천리안 고양이' 네코타 간호사장.
네코타가 후지와라의 수제자라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녀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다.
다구치에게는 경이로운 인간인 시라토리.
그런 시라토리를 이용해 먹는 다구치가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디지털 하운드 독' 가노이다.
학교때 부터 시라토리와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로 등장하는데
다구치가 시라토리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당황하는 시라토리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다구치와 마찬가지로 가노의 그림자 아닌 그림자가 되어버린 다마무라.
다구치와 다마무라, 가노와 시라토리, 후지와라와 네코타.
각각의 인물들의 묘한 관계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이들. 

망막아종을 앓고 있어서 안구를 적출해야만 하는 두 아이, 미즈토와 아쓰시.
백혈병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유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이 아이들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썼듯이 '아이들과 소아과를 경시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의도도 아마 소아과를 경시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들이어야 한다.
다구치가 패시브 페이지를 하는 대상도 아이들이고
시라토리가 액티브 페이지를 하는 대상도 아이들이다.
살인사건과 아이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상이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생각된다.
책에 나오는 '울트라 맨'의 이야기는 그런 아이들의 세계를 아주 조금 엿보게 해준다.
 

의사인 작가가 환자에게 갖는 미안함.

작가는 현직 의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작가이기 이전에 의사의 모습이 보인다.
더 이상 치료의 길이 없는 알코올 환자 사에코에게 알콜을 처방하고
생명을 잃어가는 유키에게 잠깐의 탈출(?)을 주는 장면은
어쩌면 작가 이전에 의사로서 환자에게 갖는 미안함에 대한 사과인 듯 하다.
자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는 요즘의 젊은 의사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도 기요미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역시 직업은 못 속인다.
 

학대가 아닌 듯한 학대, 방임. 

꼭 때리고 상처를 입혀야만 아동 학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미즈토의 아버지 처럼 아이를 그냥 방치해 두는 것도 학대다.
어차피 자기가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아이라면 자기가 책임은 지어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도덕성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고 학대가 아닌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도 비슷한 사람을 보았기에 미즈토의 분노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추리소설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작이었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도 추리소설이라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있었으니까.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은 추리소설 보다는 논리학 교과서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범인은 누구인데 왜 그가 범인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라.' 라는 문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듯한 느낌. 그래서 처음부터 추리소설로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전작에서와 같이 Ai(옵티마 이미지)를 사용한 해결과정도 그렇고
'공감각'을 통한 청각의 시각적 변환도 그렇고
'DMA(Digital Movie Analysis)'를 통한 범죄현장의 재구성도 그렇고
전체적인 사건의 해결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않는 느낌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는 여러 도구들의 사용이 오히려 이해도를 떨어뜨린 느낌이다.
결국 살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는 결말도 아쉽다.
물론 에필로그를 통해서 문제점을 제기하기 위함이라지만 그래도 아쉽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작에 비해 조금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원래 2권짜리 분량을 2개의 작품으로 나누어서 발간한 것이라 하니 다음편이 기대가 된다.
다음 작품까지 읽으면 지금의 이 아쉬움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나 어쨋든 정말 즐겁고 유쾌한 책읽기를 보장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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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 조말생 뇌물사건의 재구성
서정민 지음 / 살림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모두가 성군이라 칭하는 세종이 연루된 부패사건의 전말. 

사극이 뜨면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역사서가 나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책 또한 한창 방영중인 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는 점에서 그런 분위기에 편승했다는 의혹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할 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시류에 편승해서 나오는 역사서들 치고 제대로 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세종시대 조말생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의 법치와 오늘날의 법치를 비교함으로써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참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조말생은 세종의 부왕인 태종때부터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고
개인적으로 아버지 태종을 무서워했다고 생각하는(나 자신의 생각임) 세종으로써는
계속적으로 대우를 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물이 사형의 형량을 10배 가까이 능가하는 부패사건에 휘말리자
세종은 강력한 의지로 철저한 수사를 지휘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이해할 수 없게한다.
대간들의 계속되는 사형 주장에도 굽히지 않고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면서까지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 사면 -> 복권 -> 복직의 무리수를 둔다.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던가?
작가는 그 이유를 조말생의 능력에 두고 있다.
군사적 지식과 외교적 능력, 그리고 행정적인 실무능력짜지...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극소수의 양반들, 그중에서도 문제가 없는 양반들을 대상으로 하는
너무나도 한정된 조선의 인력 Pool에서 '조말생'이라는 인물은 개인적 부패를 이유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세종은 '조말생'을 살린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살린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이 세종의 실리였고 그러면서도 그의 무죄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수사기관에서 수사한 내용을 인정하는 법치주의와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한정된 인력 Pool, 돋보이는 능력, 그 시대의 국제정세를 보았을 때
조말생이라는 인물의 능력이 아까울 수 밖에 없고 세종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언젠가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렇기에 정당한 수사와 정당한 재판을 거친 대간들의 요구는 마땅히 받아 들여져야만 했다.
세종 스스로 그 원칙을 버리고 대간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그 잘못을 결과를 보고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조말생이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을 보이지 못했다면 과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세종의 잘못은 분명한 잘못이다.
세종이 성군이라는 이유로 그 잘못을 합리화 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그래서 이 책의 주장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장점은 조선의 법치를 파헤쳤다는 것에 있다.
사극의 잘못된 묘사로 인해 조선은 법 보다 양반 또는 왕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중국의 황제들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것이 아니다.
사대부가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일등 사대부'의 한 사람 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사대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그렇치 않고 혼자만의 독단으로 정치를 하면 '반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이 '황제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조선은 선진적인 법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 법을 바탕으로 하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사회이다.
왜곡되고 숨겨졌던 조선의 법치를 일반인들에게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시도 이다. 

그러나 역사책을 기대하고 읽은 나에게 이 책은 역사 이외의 이야기가 너무 많다.
작가가 법조계 인물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서나 역사의 인용보다
법전이나 법학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교양역사서로 보기에 아쉬운이 있다.
법조인 특유의 도덕적이고 딱딱한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역사서를 읽는다는 느낌 보다는 논문을 읽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좋은 시도를 가진 책이지만 역사서로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또한 그 결론마저 나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왠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 논란에 대한
일종의 변명처럼 느껴졌다면 너무 과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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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이미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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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나도 꽤나 영화를 좋아한다.
CGV와 롯데시네마의 VIP회원이 동시에 될 정도이니 영화를 적게 보는 편은 아니다.
우리나라 영화를 좋아하지만 외국영화(특히 헐리웃 영화)도 좋아하는데 영어는 참 약하다.
대학교 때 까지는 자막없이 볼려고 노력했으나 지금은 그저 자막에만 의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는 많은 외국영화에 빠지지 않고 번역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미도 씨.
그 분이 산문집을 냈다고 하니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책을 구입했다. 

제목을 보면 느끼는 것이 영어 학습책 같은 느낌이다.
'영화를 보면서 영어를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던질 것 같은 느낌.
책에서 물론 그런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번역가 '이미도'로써, 영어를 사랑하는 '이미도'로써, 그리고 인간 '이미도'로써
세상에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수필형식으로 엮어낸 산문집이다.
그의 직업이 번역가 이다 보니 영화의 수많은 명대사를 인용하고
작가가 모토로 삼고 있는 여러 명언들과 일화들을 사용하여
'영화에 대해', '영어에 대해', '영화와 영어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부담없는 문체로 편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내가 기대했던 영화의 뒷 이야기 부분도 빠질 수 없다.
번역가라는 직업의 세계에 대한 작은 엿보기도 가능하게 해주고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외국의 유명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번역가로써 바라보는 영화계의 모습도 있다.
나는 전혀 모르는 그 세계가 참 재미있게 느껴진다. 

꽤나 많은 영화를 보면서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는 명대사들이 많았다.
이 책에서 작가가 인용하는 명대사들 중에 나도 기억하는 명대사도 많았고
분명 내가 본 영화지만 나는 모르고 지나갔던 명대사들도 참 많았다. 그런 영화들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작가가 추천하는 3편의 영화는 아쉽게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추천만으로도 한번쯤 찾아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꼭 그 영화들을 보고 나서 작가의 이야기와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다. 

나름 주제를 가지고 몇개의 그룹으로 묶어서 편집한 책인데
읽고있는 내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각각의 하나의 산문들은 참 느낌이 좋은데 여러개의 산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느껴지니 않는다.
뭔가 산만하게 이리저리 펼쳐저 있는 느낌. 아쉽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개인적인 생각과 다른 부분도 눈에 띈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고 독자가 받아들이는 정도는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고 해도
개인적인 만족도에서 분명 마이너스가 되는 건 사실이다.
얼마 전에 읽은 히사이시조의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와 비교했을 때
몰입감이 떨어지는 것도 조금은 아쉽다. 그 차이의 원인은 지금 알 수 없지만... 

대학교 졸업 후에 영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실로 오래간만에 영작된 문장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머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 손에 들고 가볍게 읽기엔 적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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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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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구해줘'를 읽으면서 기욤뮈소에 반했고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읽으면서 비슷한 내용에 조금 실망했던 나이기에 세번째로 접하는 그의 작품 '사랑하기 때문에'는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이었다. 두 작품과 또 똑같은 형태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그래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묘사와 빠른 전개,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는 심정. 일단 두 작품과 전혀 다른 구성이다. 환타지적인 인물도 없고 사건의 구성도 다르며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다르다. 두 작품이 환타지적인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추리나 스릴러와 비슷한 형식을 취한다. 물론 결론을 보고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작가는 여전히 운명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다. 아무리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고 그 과거의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는 것. 사람의 힘으로는 운명을 거스르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거기에 더 나아가 하나의 메세지를 더 남긴다. 그것이 운명이었든 사고였든 무엇이었든지 간에 과거의 기억이나 상처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되고 스스로 이겨내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망각,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수용, 과거의 기억에 대한 용서... 이런 긍정적인 사고(思考)의 힘으로 모든 과거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치유와 극복의 과정을 거치면 인간의 정신은 더욱 강해지고 다가올지도 모르는 충격에 대한 내성을 기를 수 있다는 것. 

 제목이 '사랑하기 때문에'이라서 뭔가 사랑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의 내용에 사랑이 녹아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목으로 삼을 정도로 많은 부분이 사랑에 할애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 상처에 대한 치유와 극복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제목의 의미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하긴 '구해줘'와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경우도 제목과 내용의 일치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딸을 잃고 자책감에 빠져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남편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아내, 망가지는 딸의 모습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는 백만장자 아버지, 그리고 한 소녀의 불행을 쉽게 보아 넘기지 못한 정신과 의사에 의해 과거의 고통스럽고 가슴아픈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3명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한 구성에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 진실의 이야기. 기욤의 작품들이 모두 그런 형태를 취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이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다. 사실 마지막에 가서는 살짝 예상할 수 있었지만.. 

 서로 처음 보는 세 사람에게 얽히고 설키는 서로의 인생을 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하는데 내 행동이 그들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하기란 불가능이 아닌가? 그래서 운명론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어쨋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내 삶의 방식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나의 행동이 타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 아닐까? 구성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보다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판타지가 아니고 판타지적인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지만 한편의 판타지를 읽은 느낌이다. 아니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놓고 난 내 가슴속에 따스한 느낌이 남아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해 있다. 물론 책 한권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의 느낌은 편안하고 따스하다. 이런 기분과 감정이 얼마나 지속될 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간동안은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 보일 것 같다. 그럼 이 책의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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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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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이걸 알고 있었더라면...'
사람은 언제나 '만약'이라는 말을 하고 산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다가도 문득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일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만약 고2로 돌아가 다시 선택한다면 주저없이 이과(理科)가 아닌 문과(文科)를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몰랐으니까... 이 소설에 나오는 엘리엇도 언제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순간적 판단미스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준 한 여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면 말이다. 다만 현실에서 그것이 불가능 하기에 30년의 시간을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갈 뿐. 

 그런 그에게 의도하지 않은 선행의 대가로 주어진 알약 10알. 현실에서 불가능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의 알약. 마지막으로 꼭 한번만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간절하고 소박한(?) 소망을 이루어 줄 하늘의 선물. 그 알약을 건네 준 노인이 말한 조건이 있었지만 그것을 정말로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로 돌아가 소원을 이루게 되는 엘리엇. 거기서 끝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과거에서 그가 만난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야만 했던 30년전의 자기 자신.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모든 것을 알고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죄책감과 상처로 인해 인생의 지표를 놓치고 자신의 사랑마저 부정하려 하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과 그녀를 잃은 후 자신이 겪었던 30년간의 후회와 탄식의 삶. 그 기억들로 인해 결국 노인의 경고를 무시한 채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게 되는 엘리엇. 

 과거의 자신의 인생에서 그녀만을 구하고 싶었으나 운명은 그의 계획대로 진행하지 않는다. 과거의 그녀를 구하려면 현재 자신이 끔찍히 사랑하는 딸을 잃어야 한다는 전제. 그걸 피하기 위해 그와 과거의 그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지만 그 결과는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운명은 '일어날 것은 반드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래도 한번 싸워보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엇은 운명에 맞서게 된다. 그의 투쟁에 박수를.... 

 '시간여행'은 너무도 매력적인 주제이고 그래서 너무도 유혹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진부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굉장히 위험한 주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쩌면 작가에게 일종의 '도박'일 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할 때도 고민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고민이었지만.... 

 우선 '시간여행'으로 만나는 대상이다. 그 대상은 다른 시대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삶이다. 그것이 다른 책들과 차이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시간여행은 공상과학의 시간여행처럼 신비롭고 흥분되는 체험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슬펐던 시간의 기억, 가장 행복했기에 가장 괴로워야 했던 기억'으로의 여행이었기에 차라리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시간여행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과거의 기억으로의 여행, 그리고 그 기억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치유. 

 두번째로 시간여행의 전제이다. 이 책의 시간여행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의 제한이 있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 그리고 단 10개의 알약. 그 제한들로 인해 자신의 삶에 끼어들 기회의 제한을 받고 그것이 정해진 운명을 따르게 하기도 한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기인한 이러한 제한들이 소설의 긴박함을 높히고 스토리의 전개를 흥미롭게 만든다. 역시 기욤뮈소. 

 늙은 엘리엇의 소원은 사랑했던 여인을 다시 한번만 만나는 것이었다. 알약을 어쩌면 신이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준 선물이었을 것이고.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의 느낌은 그의 소원이 과연 그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원은 어쩌면 과거의 그, 죄책감과 기억에 사로잡혀 무력하게 운명에 손을 들어버린 나약한 과거의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만나서 30년의 세월이 그에게 가르쳐 준 인생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알약은 어쩌면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그에게 운명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평행세계'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유명한 판타지 소설 '황금나침반'을 통해서 처음 접한 이론이지만 어쩌면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만 하더라도 늙은 엘리엇이 알약을 얻지 못하고 죽는 세계와 알약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게되는 세계와 마직막 알약의 반전으로 인해 새롭게 살게된 세계. 3개의 세계가 평행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슬라이딩 도어즈'나 이휘재의 '인생극장'에서 순간의 선택으로 갈라지는 두개의 삶의 모습은 어쩌면 동시에 존재하는 두개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살아가면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어쩌면 2개의 세계가 동시에 형성되어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다. 결국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며 '만약...'이라는 생각에 빠져들 때 마다 지금의 세계와 동시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의 세계로의 여행을 꿈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결국 이야기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치유만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과거를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로 탑을 쌓고 살고 있지만 진정 그렇게 할 수 있다해도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 누리는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재의 삶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더이상 잃을게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막상 잃고나면 후회할 것들이 지금 우리의 삶에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물론 내가 아무리 충실히 산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 보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되겠지만 지금의 삶은 다시 되돌린다면 얻을 수 없게 되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남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자체로 본다면 정말 재미있다.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전개와 쉴새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들. 한마디로 재미있다. 문제는 내가 불과 1주일 전에 기욤뮈소의 '구해줘'를 읽었다는 것이다. '구해줘'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많이 기대를 했는데 너무나 비슷한 전개, 너무나 비슷한 등장인물, 너무나 비슷한 주제와 너무나 비슷한 설정들. 다른 작가가 썼다면 분명히 '표절'이라고 불렀을 정도의 유사함이 많이 아쉽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도 비슷한 이야기가 작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만약 기욤뮈소의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읽기를 권한다. 연달아 읽어보면 분명히 실망을 할 것이기 때문에.... 

 가끔 내가 마눌님에게 '내가 그 학교에 안갔으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라고 말한다. 그럼 마눌님의 대답은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것이다. 어쩜 기욤뮈소가 300여 페이지의 소설로 이야기하는 것을 마눌님은 단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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