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한 JD샐린저가 살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이 말한 저택. 뉴햄프셔주 코나슈의 숲속에 있다.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16세 소년 홀든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쫓겨난다. 5과목 중 4과목 낙제 때문이다. 맨해튼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틀 동안 그의 경험과 생각을 1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첫 출간은 1951년이다. 인간 군상의 비열함, 어른들의 허위 의식, 희망을 잃어버린 암울함이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홀든은 그런 세상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넘어지면 잡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책 제목이다. 결국 홀든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1952), 앨런 긴스버그 ‘울부짖음’(1956), 잭 케루악 ‘노상에서’(1957), 노먼 브라운 ‘죽음에 반하는 삶’(1959), 그리고 제임스 딘 주연 ‘이유 없는 반항’(1955)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안정과 순응의 사회에 도전한 기념비적 명저로 남아 있다.

“그 집에 접근하지 마세요. 바로 체포됩니다. 저도 얼굴을 못봤어요.”(지방신문 기자 존 양씨)

“그 집요? 알지요. 하지만 가르쳐 드릴 수 없네요. 규칙입니다.”(우체국 직원 M씨)

허위의식과 획일주의에 저항하며 시대 정신을 앞서갔던 소설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Salinger·86)는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철저한 은둔자로 살고 있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6시간 이상 달려가면 뉴햄프셔주의 산간 마을 코니시(Cornish)에 그의 집이 있다. 인근 레바논시(市)에 있는 L 공학박사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밤새 내린 눈에 깜짝 놀라며 코니시의 야산들을 훑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100m 안팎의 완만한 구릉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고, 고개 하나 넘으면 겨우 집 한 채가 나올 만큼 숲속에 묻힌 마을이다. 3~5층 높이쯤 돼 보이는 나무들로 울창한 산 속에 누워 있는 도로는 차 바퀴가 빠질 정도로 좁다. 그 길마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느 집에 샐린저가 살고 있을까.

코니시로 올라가기 전 그의 생가가 있는 뉴욕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 그리고 그가 맨해튼에서 퇴학 당하고 전학 간 펜실베이니아주 웨인시(市)의 밸리 포지 밀리터리 아카데미(Valley Forge Military Academy)를 먼저 찾았다. 그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Holden) 역시 퇴학 맞은 고교생이기 때문이다.

회색 구름이 낮게 웅크리고 있던 날, 맨해튼에서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3시간쯤 떨어진 이 학교에서 샐린저가 남긴 흔적을 더듬었다. 그가 고교생이던 때는 벌써 70년 전이다. 찰스 맥조지(McGeorge) 교장은 “샐린저 말고도 이 학교 출신 중 작가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11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학생도 10여명이 다니고 있는 이 학교에 대해 맥조지 교장은 “샐린저의 책에 있는 것들은 다 픽션이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이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나 낙제해서 퇴학을 당하기 때문인지 맥조지 교장은 소설의 내용과 현재 학교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을 한사코 꺼려하는 눈치였다.


▲ 딸이 쓴 자서전 표지 JD샐린저의 짤 마거리트(폐기)는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 '드림캐쳐'를 썼다. 책 표지 사진에서 어린 폐기가 아빠에게 무등을 타고 있다.
그러나 샐린저와 동기 동창생이었으며 현재는 이 학교 채플에서 교목으로 일하고 있는 사닐리(Sanelli) 장군은 “이 학교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많은 부분 그의 소설에 녹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롬은 그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공공연한 꿈을 갖고 있었지요. 문학 서클에는 가입한 적이 없지만 영화를 좋아했고, 릴에 감아 놓은 영화를 사다가 집에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샐린저의 딸인 마거리트 역시 “아빠의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픽션이 아니라 실제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학교의 켈리 M 드셰인 행정실장이 1930년대 소년 샐린저의 모습이 들어있는 졸업앨범을 찾아내왔다. 1919년 1월 1일 뉴욕 출생인 샐린저가 이곳 밀리터리 아카데미 B 중대 소속이었다는 점, 그리고 드라마클럽(Mask and Spur), 비행기조종클럽(Aviation Club) 같은 9개 동아리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세 줄짜리 화려한 장식 단추의 제복을 입은 샐린저의 사진이 실려 있다. 부리부리한 눈썹과 갸름한 턱선이 누가 봐도 준수한 용모다.

이곳에서 샐린저는 펜싱팀 주장을 맡았는데,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도 펜시 고교의 펜싱팀 주장으로 나온다. 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은 서부로 도망치려다 막내 여동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하면서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당시는 “속물주의에 찌든” 암울한 시대였다. “미치지 않았다면 마주하기 힘든 일만” 가득한 환경을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뇌까렸던 열여섯 소년 홀든이 절망에 잠겨 걸었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펜실베이니아 애거스타운 톰슨언덕→앤터니웨인가(街) 스펜서 선생집→기차역→(기차탑승)→뉴욕 34번가 펜역(驛)→그랜드센트럴역→브로드웨이→센트럴파크→47번가 빌트모어 극장→50번가 라디오시티→센트럴파크 동쪽 서튼플레이스에 있는 앤톨리니 선생집→회전목마….

변한 것은 없었다. 50여년 전 소설 속이나 지금이나 위치도 건물도 모두 그대로였다. 심지어 홀든이 소설 속에서 그토록 걱정했던 센트럴파크 연못의 오리떼조차 여전했다. ‘연못이 얼어버리면 그곳에 살고 있던 오리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고 계세요?’(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25쪽, 113쪽)

그 뒤, 뉴햄프셔로 찾아간 샐린저의 집은 코니시의 ××로드 1××번지로 확인됐다. 우체통에는 지방신문 2부가 들어 있었고, 쌓인 눈 속에 파묻힌 집 외벽에는 전기작가 사라 모릴(Morril)이 얘기했던 대로 위성 접시 안테나가 걸려 있다.

얼마 전까지 샐린저는 수요일이면 다운타운에 내려와 외식을 했다. 식당은 ‘피터 크리스천스’다. 나중에 ‘진스’로 바뀌었다. 샐린저는 이 식당에서 ‘피터 어머니의 특선(特選)’이라는 샌드위치를 주로 먹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먹는 야채는 모두 길러 먹었다.

“허위로 가득한 세계가 강요하는 획일적인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섰던” 샐린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던 경계선의 작가”라는 평가도 듣는다. 정작 본인은 세상의 평가를 듣는 듯 마는 듯 아마 죽는 날까지 은둔의 베일을 벗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맨해튼 센트럴파크 샐린저의 기념비적인 출세작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를 지나면서 "저 오리떼들은 겨울이 오면 어디로 갈가?"라고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호밀밭의 파수군'을 거론할때마다 맨먼저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다. 사진은 센츠럴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과 오리, 그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 뉴욕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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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아서 밀러가 마릴린 먼로와 함께 '더 미스피츠'(부적격자·1957)의 무대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서 있다. 뜨겁던 두 사람은 1960년에 이혼했다.
미국 코네티커트주 산속 록스버리의 아서 밀러의 3층 저택은 비어 있었다. 숲속에 묻힌 하얀 집은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을만큼 도로쪽으로 나무가 무성했다. 그는 50년 가까이 이곳 토피트 로드 232번지에 살다 지난 2월10일 타계했다. 평생 뉴욕을 무대로 활동했고, 도시인의 존재와 절망을 썼던 그는 뉴욕 맨해튼서 자동차로 두시간 거리인 이 산속 마을에서 반생을 보냈다.

집은 지금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 거실에는 도시바 TV가 있었고, 주인없는 자동응답 전화기는 빨간 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문학상 수상 상패가 벽면에 7개 걸려 있었고 거실에는 낡은 책들이 수백 권 꽂혀 있었다. 의자도 소파도 50년 이상은 돼보였다. 차고에는 폭스바겐 승용차가 들어 있었고, 온갖 농기구들이 차고 밖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도끼로 금방 패놓은 장작들이 생나무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쌓여 있었다.

“그 사람은 콜드 피쉬(cold fish)에요. 자기 개인 얘기는 절대 안해요.”

아서 밀러의 전기(‘Arthur Miller:his life and work’)를 쓴 평론가이자 전기작가 마틴 고트프리드(Gottfried)씨는 밀러에 대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자기 책에 서명해주면서 그는 “내가 사생활 얘기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밀러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성복 제조공장을 운영해서 비교적 넉넉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브루클린 3번가로 이사를 갔다. 이곳이 뒤에 ‘세일즈맨의 죽음’에 무대가 됐던 곳이다.

밀러의 텅빈 집에서 나와 개가 심하게 짖고 있는 이웃집을 찾았다. 말이 이웃집이지 200미터는 떨어져 있는, 산간 마을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집들이다. 여주인 메리 욘커(Jonker) 씨가 나왔다. “저는 2년 전에 죽은 그의 와이프와 수영 클럽에 같이 다니며 친구처럼 살았죠. 밀러 씨는 재미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지만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습니다.”

밀러는 말년에 애그니스 벌리(Burly·34)라는 여성 아티스트와 함께 살았다고 욘커씨는 말했다. 밀러의 집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그는 근처 땅 350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다. 밀러는 여름이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이웃동네인 우드베리에 가서 신문을 사오곤 했다. 그 동네엔 ‘카르멘 안소니’라는 제일 번듯한 생선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있다. 매니저 데이브 웰쉬(Welsh) 씨는 말했다. “밀러 씨는 저희 식당에 자주 오곤 했습니다. 꼭 농어 요리를 시켰죠.”

겨울은 오래 전에 철수했는데 새봄은 멀리 있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머드 시즌’(mud season)이라고 부르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은빛 설경(雪景)도 없고, 새순 돋는 연초록도 아직은 일렀다.

무대를 바꿔 브루클린. 밀러의 최고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세일즈맨의 죽음’(1949) 에서 이곳은 주급 몇푼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가난한 소시민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난 9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 붐을 타고 이곳은 요즘 뉴욕의 신흥 여피촌으로 번쩍번쩍 윤나는 동네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밀러가 살았던 브루클린 3번가는 여전히 황막했다. 말다툼을 벌이던 윌리와 비프(‘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부자)가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1350번지 역시 스산했다.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으로 출퇴근을 할만큼 떵떵거리던” 밀러의 아버지가 대공황으로 쫄딱 망해서 맨해튼 110가에서 쫓기듯 이사온 집이다. 유태인 마을인 이곳에서도 그 집은 더 작고 초라했다.

아들을 앞세우고 나온 한 30대 남자가 “밀러 씨네는 20여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후 집주인도 여러차례 바뀌었다”고 말했다. 길게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한마디 한 후 문을 닫아 버린다.

이곳에는 20세기 현대 연극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던 밀러를 추억할 아무런 기념 표식도 없었다. 마를린 몬로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이를 되새김한 희곡 ‘몰락 이후’(After the Fall)를 발표한 밀러는 전세계가 그의 작품들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흔적은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뉴욕공립도서관(NYPL)에서 사서(司書)들의 도움을 받아 ‘세일즈맨의 죽음’이 초연된 100여 년의 유서깊은 극장 ‘모로스코(Morosco)’의 기록을 뒤졌다. 극장이 있던 브로드웨이 1535번지에는 메리오트 마르퀴스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밀러의 흔적을 찾아 매서추세츠 세일럼(Salem)으로 갔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초기 정착도시였던 이곳에서는 광기어린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죄없는 여성 12명을 목매달아 죽인 17세기 말의 마녀 사냥을 소재로 밀러는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더 크루서블’(‘시련’ 혹은 ‘도가니’ 등으로 번역됨)을 썼다. 그러나 이 박물관에도 밀러를 기념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키작은 여성 스태프 재니 씨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밀러 씨가 이곳에 자주 오셨죠. 마녀 사냥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묻곤 하셨습니다.”


▲ 아서 밀러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코네티컷주 록스베리시 토피트 로드 232번지의 3층 목조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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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년의 기다림에 바다도 글썽였다

 
카르타헤나·바랑키야=최홍렬기자

카르타헤나 바닷가에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동상이 서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까치발을 한 모습이 애틋하고 아련하다.
 

어느 바닷가엔들 사랑과 헤어짐,기다림의 전설이 없으랴.

그러나 이곳, 마르케스가 젊은 시절 뜨거운 피를 바닷바람에 식히러 나왔을 카르타헤나 바닷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식민지 처녀와 스페인 청년장교의 비련이라는 점에서 어두운 역사의 무게까지 담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침탈이 본격화되던 17세기, 콜롬비아 바닷가에서 시작된 사랑은 청년이 고국으로 가버리면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 '백년의 고독'을 주제로 한 콜럼비아 화가 페드로 비잘바 오스피나의 작품

 

카르타헤나 바닷가엔 인디오 처녀의 동상…

 

해풍에 휩쓸린 뜨거운 모래가 거리를 뒤덮고 있다. 망고·쿠루바·마라쿠자 같은 열대과일 주스가 불티나게 팔렸다. 생굴과 삶은 새우를 토마토케첩과 식초, 설탕 등으로 버무린 해물요리 세비체를 파는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가 “남자들 정력에 좋다”며 호객을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그린 ‘백년의 고독’에는 식민지 수탈의 역사와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슬픈 열정이 고스란히 배있다. 마치스모(machismo·남성우월주의)라는 독특한 말이 있듯, 중남미는 관습적으로 남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러나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남성!)의 몰락을 다룬 이 소설에서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에 여성을 놓고 있다.

 


▲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 동상.그리움은 저 바다를 건너가려나. 카르타 헤나 해안가에 세워진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Catalina) 동상.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다 죽음에 이른 애절한 사랑을 전
하고 있다.
 
 

남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함께 상상의 마을 ‘마콘도’를 건설한 우르술라는 성서에 나오는 현인처럼 120여년 동안 가문의 부침을 목격한다. 남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소용돌이와 부패에 휘말리면서 죽음을 당하거나 길을 떠나는 반면, 그녀는 가문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단속하고 사탕이나 구운 과자 가계를 차려 살림을 이끌어 간다. 우르술라의 증손자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결혼하는 페르난다 델 카르피오도 바로 그같은 여인상이다.

 

이곳에서 만나 작가 구스타보 타티스씨는 “우르술라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 여신 같은 존재이자 대모(大母·Great Mother)이며, 수십명의 등장인물이 부침을 거듭하는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작품 ‘백년의 고독’ 등서 불멸의 여성性 높이 찬양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우르술라 같은 ‘여족장’의 건너편에 필라르 테르네 같은 여성을 세워둔다. 창녀인 그는 섹슈얼리티와 다산(多産)의 상징. 우르술라의 두 아들과 관계한 그녀는 둘 사이에서 아들을 각각 낳아 부엔디아 가문의 자손을 이어가게 한다. 그녀는 예언자이며 주술사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끝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진 그는 가문의 운명에 대한 비밀이 담겨져있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해독에 도움을 주는 천리안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작년에 출간된 ‘내 슬픈 창녀들에 관한 기억’에서, 아흔살의 주인공은 자신의 생일을 14살 창녀와 함께 침대에서 축하하기로 결심한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 소녀는 낮에는 온종일 공장에서 단추를 달아야 했으며, 남미대륙의 고독을 상징하듯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어린 창녀에게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운명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버랩되고 있다.

 

카리브해를 품어안은 바닷가 도시 바랑키야. 핏줄에 뜨거움이 흐르던 스무살 이곳에 온 작가는 평생 그의 작품에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나는 여인들을 이곳서 만났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관대히 용서할수 있는 실수는?”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

“실생활에서 가장 선호하는 여주인공은?” “대답 보류. 모든 여주인공이 내 사생활을 구성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작가는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친구들이 ‘성스러운 악녀’라는 별명을 붙여준, 약사 바르차의 딸인 메르세데스와 연애를 했다. 작가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지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신문이 독재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등의 고욕을 겪었으며,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인 30살에 결혼을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메르세데스와 해로하고 있다. 지금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작가는 오전에는 자서전을 쓰고,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산책을 하며 지내고 있다. 작가의 큰 아들 로드리고(46)는 미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있다. 2000년 국내에 소개된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수 있는 것’의 감독이다. 둘째 아들 곤살로(43)씨는 파리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꿈과 환상, 현실과 역사를 온통 한데 버무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삶은 그렇게 다음 대로 이어지고 있다.

“형은 페미니스트… 행운을 부르는 건 여자들이라고 믿어”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형은 여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대통령이 되면 콜롬비아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죠.”
 

카르타헤나에서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64)씨는 “유머가 많고 쾌활한 성격의 형은 10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일일이 챙겨주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형제는 모두 11명.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장남이며 하이메씨는 여덟째. 맏형과는 13살 차이다. 작가는 하이메씨의 대부(代父)이기도 하다.

 

하이메씨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0여년 전 이곳에 세운 언론인 육성기관 ‘이베로 아메리카의 새로운 언론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5일 단기코스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2500여명이 수료했다.

 

“형은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1999년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엘 캄비오’를 인수해 스포츠·문화·정치 등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형은 언론을 문학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거리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죠. 야구 투수가 정식 시합이 아니라도 항상 공을 던지며 어깨를 단련시키듯 형은 신문기사건 소설이건 항상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형이 그에게는 여전히 피가 더운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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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에 실린 라틴의 낭만 카리브의 해풍을을 타고…

 
 
 최홍철 기자 hrchoi@chosun.com

 
콜롬비아 북서부 카르타헤나. 적도의 햇빛이 격렬하게 가슴을 두들기더니, 어느새 바다가 선선한 바람을 선사한다. 황혼 무렵이다. 악사들이 아코디언과 기타로 흥겨운 라틴음악을 튕겨내자, 광장은 어느새 숨 넘어갈 듯한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로 가득찼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바로 이곳, 카리브해의 대표적 관광지인 이곳에서 본격적인 작가 수업과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바예나토는 그에게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형이었다. 민담이나 사랑 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演)하듯 부르는 바예나토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전개한다. 때로는 “여보게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려나. 그 여자와 내가 헤어진 사연을 들려주겠네…”라는 식의 가사를 랩같이 이어간다. 코코넛으로 맛을 낸 밥에 구운 바나나를 곁들인 도미구이와 해물 스파게티에는 바예나토가 버무려져 있었다.

21세기의 광장에서 17세기 노래가 현실과 몸을 섞는 이곳에서, 스무 살 청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엘 우니베르살’의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르타헤나에서 만난 메르세데스 바르차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으며, ‘백년의 고독’에서 ‘나일강의 뱀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가씨’로 등장한다.

카르타헤나 인근 바랑키야는 청년 시절 만나 평생을 함께한 친구들 모임 ‘바랑키야 그룹’이 태동한 곳이다. 소설가·화가·기자·출판업자 등으로 구성된 그룹은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고 있던 카리브해 문화의 진가를 세상으로 길어올린다. 기자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친구들이 호기롭게 몰려다니던 단골 카페 ‘라 쿠에바(La Cueva)’는 지금 도심의 명소다. 이 카페의 카롤리나 마르티네스씨는 “가보는 바랑키야 그룹 멤버들과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새로운 원기를 불어넣었다”며 “멤버들은 가보가 참석하지 못할 때는 그의 자리를 비워놓고 토론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카페에는 바랑키야 그룹 멤버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으며, 소설 속 마콘도에 처음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얼음 덩어리를 나무상자에 담아 전시하고 있다.


▲ 카르타헤나는 17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도시로 해적을 막기 위해 축조된 고성과 거대한 대포를 구경할 수 있다.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며 그는 한편으로 소설을 빚어냈다.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엘 에스펙타도르’지 동료 기자였던 기예르모 다빌라씨는 “가보는 ‘단순히 사실만 전달하는 것은 기자가 아니다’란 말을 자주 했다. 기사는 문학적으로 쓰고, 소설은 마치 취재하듯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고 말했다. 보고타·파리·로마·아바나로 취재 현장을 누비던 그는 “나는 아코디언 한 대 메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행복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다.

작가는 이곳에 없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다. ‘엘 우니베르살’지 문학 담당 기자이자 작가인 구스타보 타티스씨는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바예나토는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의 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카리브해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사촌인 오스칼 알라르콘씨는 “서구적 시각에서는 주술적·환상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카리브해에서 나고 자란 형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형은 ‘나는 바닷가 사람’이란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 카페 '라 쿠에바' 입구에 1950년대 초 바랑키아 그룹 멤버들을 담은 대형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최근 모습. 바랑키아=최홍렬 기자

 


■ 카리브적 상상력

사실과 환상을 뒤섞어 카리브적 세계 창조

입력 : 2005.03.10 19:51 38' / 수정 : 2005.03.11 04:47 48'


“소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서구작가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진지함(사실)과 재미(주술·환상)를 함께 버무려 놓은, 스토리텔링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지적했다.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씨는 “현실과 상상이 섞인 단어(글)를 구성해 독특한 의미를 지닌, 카리브적인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이경득 세르시오 아르볼레다대 교수는 “백년의 고독 이후, 사실과 환상이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는 뜻의 ‘마콘도적’이란 말이 생겼다”며, “현실을 훨씬 풍요롭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은 내면으로만 들어가다 막다른 길에 부닥친 한국문학이 한 수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가 본 마르케스

 

  마리오 아랑고 교수(전 콜롬비아 안티오키아대)

 

옛날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그 이야기의 끈을 잡아 상상의 나래를 펴는 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소설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천부적 이야기꾼은 최근작 ‘이야기하기 위해 살기’(2002)와 ‘내 슬픈 창녀들에 대한 기억’(2004)에서 자신의 성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야기하기…’의 스페인어판 표지에는 작가의 아기 때 사진이 등장한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로부터 이런저런 세상사를 들으며 자랐을 아기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모든 것, 세상을 구석구석 살피려는 듯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내 슬픈 창녀…’ 표지에는 세상에 등을 보이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이 삶의 종착점, 죽음이라는 휴식의 공간, 아니면 20세기 신화의 결정적인 신격화를 향해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와 노인의 모습을 겉장에 둔 것은, 이들이야말로 허구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았거나 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창조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존재들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으리라. 이 두 모습에서 작가가 걸어온 삶의 길을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1967년에 ‘백년의 고독’에서 그려낸 ‘고독한 아메리카’는 현재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거센 조류 앞에서 더욱더 고독한 아메리카, 점점 더 왜소해지는 아메리카로 남아 있다. 작가는 아메리카의 고독을 타개하기 위해 쿠바의 영상학교와 베네수엘라의 신저널리즘 재단을 후원하고 있다. 내일의 아메리카 주인을 배출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지극히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또 하나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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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환상 넘나들던 그곳엔 ‘남미의 고독’이 여전히 남아…
hrchoi@chosun.com

 

▲ 노세가 끄는 마차에 몸을 의지한 소년이 가는 길에는 고단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남미인들의 꿈과 좌절이 묻어 있다.

카리브해 파도는 수십억년 동안 남미 대륙의 이마를 핥았다.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내습하는

그 대륙을 달군 햇볕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고독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에서 중남미의 고단한 현실과 환상을 교직해낸 무대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소설은 열대림 속 ‘마콘도(Macondo)’라는 상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시간의 도저한 수레바퀴 속에서 소멸해가는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을 그렸다. 마콘도는 전설과 신화가 살아있는 환상의 공간이면서 남미 현대사의 상징적인 무대다.

콜롬비아 북서부에 있는 카리브해 관광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비행기를 내려 마콘도의 무대인 아라카타카를 향해 250여㎞를 달렸다. 작가는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다. 카리브 해안을 따라 썩은 고목이 널려 있고 탁하고 검은 진흙탕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늪지가 펼쳐졌다.

아라카타카는 “마약 재배지를 근거지로 삼은 반정부 게릴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외지인들이 출입을 꺼리는 오지(奧地)”(운전사 엔리케씨)이다.

과연 무장 군인과 장갑차가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하지만 일상은 어디에도 있었다. 이곳에서 간식으로 애용되는, 메추리알의 절반 크기인 삶은 이구아나알을 줄에 꿰어 코카콜라와 같이 파는 장사꾼들이 교차로마다 눈에 띄었고, 맨발의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소년이 노새에 매단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라카타카에는 ‘노벨의 땅’이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현실과 향수(鄕愁) 사이에서 내 작품의 원재료를 발견했다”는 작가의 말이 쓰인 대형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주민들은 “가보(Gabo·작가의 이름인 ‘가브리엘’의 애칭)는 우리의 자랑”이라며 “우체국도, 가게 이름도 모두 마콘도라고 짓는다”고 했다. 에밀리아노 알바레스씨는 “미국인 소유의 바나나 농장이 한창 번성할 때는 돈 뭉치에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였는데, 미국 자본이 나가면서 폐허같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작가의 생가(生家)는 원래 양철 지붕을 씌운 목조 건물 3채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식당·부엌·창고가 있던 건물만 한 채 남아 있다. 그동안 두 번 주인이 바뀌었고, 1982년 ‘백년의 고독’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정부에서 구입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보를 키운 것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다. 외할머니는 귀신 이야기로 어린 가보를 전율에 떨게 했고, 외할아버지는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시민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시절 듣고 겪은 이야기들―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신화적인 사건들은 고스란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뇌세포에 새겨졌고, ‘백년의 고독’에 녹아들었다.

보고타에서 만난 작가의 사촌 동생 오스칼 알라르콘씨는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4년 11개월 이틀 동안 계속되는 비같이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풀어내는 서술 방식은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린 가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할아버지가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어 미세한 에메랄드 눈을 붙이면서 시간을 보내던 귀금속 세공실이 있던 방은 50여년 전에 불타버렸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 이야기는 소설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고독을 견디기 위해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수십개의 요강을 넣어놓은 창고와 대령을 묶어 놓았던 큰 나무 역시, 그의 집 뒷마당에 있던 나무가 형상화된 것이다.


▲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렌즈를 만들었다. 그 렌즈의 이름은 리얼리즘이다." 생가 안내판에 적힌 글에는 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다.
생가를 안내한 라파엘 다리오 히메네스씨는 “깊은 고독 속에서 권총 자살한 아들이 흘린 피가 부엌과 방 밑, 마당을 돌아 어머니에게 도달하는 장면은 이 집 구조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말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갈등으로 1000일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려 3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학살된다는 엄청난 이야기가 사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공간에서 전개된다. 작품의 무대인 아라카타카에는 철수한 미국인 바나나농장 사무실의 양철 지붕이 녹으로 내려앉았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나나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혼돈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좌익 반군과의 내전으로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마콘도=아라카타카’는 그 상징적 현장이었으며,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였다. 소설 속 그 100년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있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햇볕에 달궈진 먼지와 더위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든 아라카타카 거리는 점차 고독과 망각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엮은 집 앞에 안락 의자를 내다 놓은 사람들은 망연히 앞을 응시하거나, 해먹에 드러누워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남미 대륙을 숨가쁘게 거슬러 올라온 안데스 산맥의 북쪽 끝 봉우리인 시에라 네바다에서 발원한다는 개천으로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개천으로 뛰어들었다. 운전수 엔리케씨는 “(게릴라들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서둘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독재자들의 철권통치를 겪어야만 했던 남미인들의 ‘고독’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약탈과 절망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이란 것”이라고도 했다.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씨는 “작가는 현실과 상상이 섞인 언어를 구성해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었다”며 “마콘도에서 일어나는 과장되고 기상천외한 일들은 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미대륙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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