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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란 신조어는 최근 번역되어 나온 <거미줄에 걸린 웹>(로라 J. 구락,강수아역, 들녘)의 원제이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인터넷에서는 온갖 더러운 못된 짓거리만 행하는 것 같이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해 쓰이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리터러시(literacy)란 읽고 쓰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예전에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文盲)이라고 한 것을 빗대어 요즘은 컴퓨터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는 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란 컴퓨터를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비판적인 인터넷 사용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익명성이다. 자신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현실 세계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야기되는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이책의 2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 그 허와 실을 시사 만화 두 컷으로 극명하게 보여 보여 주고 있다.


인터넷 익명성의 그
허와 실

 

디지털 정체성은 전자상거래와 연관된다. 오늘날의 익명으로 남기란 초기 시절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뉴요커) 만평의 속편이 2070년 봄 디트로이트 신문에 실렸다(그림). 이 만평은 아무도 당신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도, 백그라운드 소프트웨어가 (특히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당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정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해도,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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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장편 소설 “장미의 이름”은 언젠가는 한번 읽고 싶었던 책 중의 하나였었다. 박식한 기호학자가 쓴 소설이란 점에서 궁금했다. (그의 난해한 저서“기호학이론”을 먼저 읽어서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책을 살 때마다 항상 우선 순위에 밀리곤 했었다. 재작년 봄 알라딘의 도스또옙스끼 선집 세트 이벤트에 포함되어 있어서 드디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책들에 쫓겨서 오래 동안 서가의 장식품으로 있어야 했다. 작년 연말 한가해져서 읽기 시작했었는데 역시 추리 소설이란 매력에 흡인되어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신비에 쌓여 있던 중세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추적한 미스터리이기에 결말을 궁금해서.... 특히 몇 해 전 TV에서 영화로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보다가 조는 바람에 결말을 몰라 아쉬워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때 졸랐던 것이 이번에 읽으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사물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캐어내는 기호학자의 이 소설엔 음미할 대목이 많다.

진리에 대한 자기 기준에 광신한 나머지 전설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숨겨 놓기 위해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성적인 수도사 윌리엄이 날카로운 지적들,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능할 거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ff 588-9.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쫓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897.

 

 

 

 

 

 

 

 

 



장미의 이름 속표지

결말 못지않게 궁금했던 것은 장미의 이름이란 제목. 화자인 아드소의 회고록인 이 책의 말미에 쓴 마지막 구절이 내 마음에 아프도록 새겨진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911.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덧없음이란 우리를 그토록 기쁘게 해주던 아름다운 장미는 사라지고 그 이름만이 추억으로 주어질 뿐이다.
어쩌면 기호학자가 발견해낸 인생이란 의미를 이 한 구절에 농축시켜 놓기 위해 이 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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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1-17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아하는 멋진 소설 중의 하나랍니다. 어찌하다 잃어버려서 두 번을 사고, 작심하고 다시 읽어도 흥미진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던 책이죠. 이 소설에 관한 에세이도 나왔고 후속작인 '푸코의 진자'도 꽤 재밌게 읽었어요. 천재의 글쓰기에 대한 보통 사람의 감상은 한숨을 동반하더군요.

이로운삶 2004-01-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보통 사람들로서는 천재들이 가는 길을 선망의 눈으로 찬탄하며 따라갈 뿐이죠.
그럼으로서 우리 자신을 좀더 넓힐 수 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겠죠...
 

 반지의 제왕3을 보려 오래 만에 집 근처 킴스클럽에 갔다.

조조할인을 위해 서둘었지만 마을버스 타고 도착하니 첫 회 상영 시간 10시 20분이 넘고 말았다.

 

늦었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입구 카운터에 줄을 서기에 무슨 줄을 서느냐고 물으니 복조리 세트를 준다는 것. 이왕 늦은 것, 공짜라면 무엇도 먹는다는데 몇 분 더 줄 서기로 했다. 

 

복조리 세트에다 무료 관람권을 얹어 주는 게 아닌가!  이걸로 반지의 제왕을 봐야지 했는데 시작한지 10분이 경과되었다고 안 된다. 

그래서 보고 싶던 올드보이가 40분에 시작해서 먼저 보기로 했다. 최민식의 연기, 정말 최고였다. 평범한 사내가 영문도 모른 채 15년을 감금당하고 풀려났을 오직 복수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었지만, 복수보다 감금돼야 했던 이유가 더 궁금해지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이다.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성경에 나오는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는 말씀이 실감나게 된다.

새해는 혀를 잘 다스려 좋은 열매만 먹도록 해야지!

 

올드보이가 1시에 끝나고 반지의 제왕이 10분에 시작되어서 요기를 하고 들어갈 수 있어서 기가 막힌 타이밍!

 

1, 2편을 보았으니 마지막 3편을 안 볼 수 있나! 만화같은 환타지이지만 웅대한 스펙터클과 반지원정대의 모험 이야기가 계속 보고 싶게 만들었다. 반지원정대의 사명인 절대 반지의 파괴를 위해 무지막지한 괴물들과 목숨을 바쳐 싸우는 전쟁 신이 손에 땀을 쥐게 했지만, 반지를 파괴시키려는 순간, 반지의 유혹을 받는 위기가 더 드라마틱하다. 반지의 유혹이란 어쩌면 모든 권력욕을 상징하는 건지 모르겠다.

새해에는 모든 일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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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08-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영화을 잘 보시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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