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에 실린 라틴의 낭만 카리브의 해풍을을 타고…

 
 
 최홍철 기자 hrchoi@chosun.com

 
콜롬비아 북서부 카르타헤나. 적도의 햇빛이 격렬하게 가슴을 두들기더니, 어느새 바다가 선선한 바람을 선사한다. 황혼 무렵이다. 악사들이 아코디언과 기타로 흥겨운 라틴음악을 튕겨내자, 광장은 어느새 숨 넘어갈 듯한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로 가득찼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바로 이곳, 카리브해의 대표적 관광지인 이곳에서 본격적인 작가 수업과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바예나토는 그에게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형이었다. 민담이나 사랑 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演)하듯 부르는 바예나토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전개한다. 때로는 “여보게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려나. 그 여자와 내가 헤어진 사연을 들려주겠네…”라는 식의 가사를 랩같이 이어간다. 코코넛으로 맛을 낸 밥에 구운 바나나를 곁들인 도미구이와 해물 스파게티에는 바예나토가 버무려져 있었다.

21세기의 광장에서 17세기 노래가 현실과 몸을 섞는 이곳에서, 스무 살 청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엘 우니베르살’의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르타헤나에서 만난 메르세데스 바르차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으며, ‘백년의 고독’에서 ‘나일강의 뱀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가씨’로 등장한다.

카르타헤나 인근 바랑키야는 청년 시절 만나 평생을 함께한 친구들 모임 ‘바랑키야 그룹’이 태동한 곳이다. 소설가·화가·기자·출판업자 등으로 구성된 그룹은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고 있던 카리브해 문화의 진가를 세상으로 길어올린다. 기자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친구들이 호기롭게 몰려다니던 단골 카페 ‘라 쿠에바(La Cueva)’는 지금 도심의 명소다. 이 카페의 카롤리나 마르티네스씨는 “가보는 바랑키야 그룹 멤버들과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새로운 원기를 불어넣었다”며 “멤버들은 가보가 참석하지 못할 때는 그의 자리를 비워놓고 토론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카페에는 바랑키야 그룹 멤버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으며, 소설 속 마콘도에 처음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얼음 덩어리를 나무상자에 담아 전시하고 있다.


▲ 카르타헤나는 17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도시로 해적을 막기 위해 축조된 고성과 거대한 대포를 구경할 수 있다.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며 그는 한편으로 소설을 빚어냈다.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엘 에스펙타도르’지 동료 기자였던 기예르모 다빌라씨는 “가보는 ‘단순히 사실만 전달하는 것은 기자가 아니다’란 말을 자주 했다. 기사는 문학적으로 쓰고, 소설은 마치 취재하듯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고 말했다. 보고타·파리·로마·아바나로 취재 현장을 누비던 그는 “나는 아코디언 한 대 메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행복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다.

작가는 이곳에 없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다. ‘엘 우니베르살’지 문학 담당 기자이자 작가인 구스타보 타티스씨는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바예나토는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의 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카리브해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사촌인 오스칼 알라르콘씨는 “서구적 시각에서는 주술적·환상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카리브해에서 나고 자란 형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형은 ‘나는 바닷가 사람’이란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 카페 '라 쿠에바' 입구에 1950년대 초 바랑키아 그룹 멤버들을 담은 대형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최근 모습. 바랑키아=최홍렬 기자

 


■ 카리브적 상상력

사실과 환상을 뒤섞어 카리브적 세계 창조

입력 : 2005.03.10 19:51 38' / 수정 : 2005.03.11 04:47 48'


“소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서구작가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진지함(사실)과 재미(주술·환상)를 함께 버무려 놓은, 스토리텔링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지적했다.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씨는 “현실과 상상이 섞인 단어(글)를 구성해 독특한 의미를 지닌, 카리브적인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이경득 세르시오 아르볼레다대 교수는 “백년의 고독 이후, 사실과 환상이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는 뜻의 ‘마콘도적’이란 말이 생겼다”며, “현실을 훨씬 풍요롭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은 내면으로만 들어가다 막다른 길에 부닥친 한국문학이 한 수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가 본 마르케스

 

  마리오 아랑고 교수(전 콜롬비아 안티오키아대)

 

옛날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그 이야기의 끈을 잡아 상상의 나래를 펴는 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소설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천부적 이야기꾼은 최근작 ‘이야기하기 위해 살기’(2002)와 ‘내 슬픈 창녀들에 대한 기억’(2004)에서 자신의 성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야기하기…’의 스페인어판 표지에는 작가의 아기 때 사진이 등장한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로부터 이런저런 세상사를 들으며 자랐을 아기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모든 것, 세상을 구석구석 살피려는 듯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내 슬픈 창녀…’ 표지에는 세상에 등을 보이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이 삶의 종착점, 죽음이라는 휴식의 공간, 아니면 20세기 신화의 결정적인 신격화를 향해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와 노인의 모습을 겉장에 둔 것은, 이들이야말로 허구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았거나 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창조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존재들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으리라. 이 두 모습에서 작가가 걸어온 삶의 길을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1967년에 ‘백년의 고독’에서 그려낸 ‘고독한 아메리카’는 현재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거센 조류 앞에서 더욱더 고독한 아메리카, 점점 더 왜소해지는 아메리카로 남아 있다. 작가는 아메리카의 고독을 타개하기 위해 쿠바의 영상학교와 베네수엘라의 신저널리즘 재단을 후원하고 있다. 내일의 아메리카 주인을 배출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지극히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또 하나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현실·환상 넘나들던 그곳엔 ‘남미의 고독’이 여전히 남아…
hrchoi@chosun.com

 

▲ 노세가 끄는 마차에 몸을 의지한 소년이 가는 길에는 고단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남미인들의 꿈과 좌절이 묻어 있다.

카리브해 파도는 수십억년 동안 남미 대륙의 이마를 핥았다.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내습하는

그 대륙을 달군 햇볕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고독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에서 중남미의 고단한 현실과 환상을 교직해낸 무대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소설은 열대림 속 ‘마콘도(Macondo)’라는 상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시간의 도저한 수레바퀴 속에서 소멸해가는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을 그렸다. 마콘도는 전설과 신화가 살아있는 환상의 공간이면서 남미 현대사의 상징적인 무대다.

콜롬비아 북서부에 있는 카리브해 관광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비행기를 내려 마콘도의 무대인 아라카타카를 향해 250여㎞를 달렸다. 작가는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다. 카리브 해안을 따라 썩은 고목이 널려 있고 탁하고 검은 진흙탕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늪지가 펼쳐졌다.

아라카타카는 “마약 재배지를 근거지로 삼은 반정부 게릴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외지인들이 출입을 꺼리는 오지(奧地)”(운전사 엔리케씨)이다.

과연 무장 군인과 장갑차가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하지만 일상은 어디에도 있었다. 이곳에서 간식으로 애용되는, 메추리알의 절반 크기인 삶은 이구아나알을 줄에 꿰어 코카콜라와 같이 파는 장사꾼들이 교차로마다 눈에 띄었고, 맨발의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소년이 노새에 매단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라카타카에는 ‘노벨의 땅’이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현실과 향수(鄕愁) 사이에서 내 작품의 원재료를 발견했다”는 작가의 말이 쓰인 대형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주민들은 “가보(Gabo·작가의 이름인 ‘가브리엘’의 애칭)는 우리의 자랑”이라며 “우체국도, 가게 이름도 모두 마콘도라고 짓는다”고 했다. 에밀리아노 알바레스씨는 “미국인 소유의 바나나 농장이 한창 번성할 때는 돈 뭉치에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였는데, 미국 자본이 나가면서 폐허같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작가의 생가(生家)는 원래 양철 지붕을 씌운 목조 건물 3채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식당·부엌·창고가 있던 건물만 한 채 남아 있다. 그동안 두 번 주인이 바뀌었고, 1982년 ‘백년의 고독’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정부에서 구입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보를 키운 것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다. 외할머니는 귀신 이야기로 어린 가보를 전율에 떨게 했고, 외할아버지는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시민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시절 듣고 겪은 이야기들―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신화적인 사건들은 고스란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뇌세포에 새겨졌고, ‘백년의 고독’에 녹아들었다.

보고타에서 만난 작가의 사촌 동생 오스칼 알라르콘씨는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4년 11개월 이틀 동안 계속되는 비같이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풀어내는 서술 방식은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린 가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할아버지가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어 미세한 에메랄드 눈을 붙이면서 시간을 보내던 귀금속 세공실이 있던 방은 50여년 전에 불타버렸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 이야기는 소설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고독을 견디기 위해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수십개의 요강을 넣어놓은 창고와 대령을 묶어 놓았던 큰 나무 역시, 그의 집 뒷마당에 있던 나무가 형상화된 것이다.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렌즈를 만들었다. 그 렌즈의 이름은 리얼리즘이다." 생가 안내판에 적힌 글에는 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다.
생가를 안내한 라파엘 다리오 히메네스씨는 “깊은 고독 속에서 권총 자살한 아들이 흘린 피가 부엌과 방 밑, 마당을 돌아 어머니에게 도달하는 장면은 이 집 구조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말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갈등으로 1000일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려 3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학살된다는 엄청난 이야기가 사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공간에서 전개된다. 작품의 무대인 아라카타카에는 철수한 미국인 바나나농장 사무실의 양철 지붕이 녹으로 내려앉았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나나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혼돈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좌익 반군과의 내전으로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마콘도=아라카타카’는 그 상징적 현장이었으며,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였다. 소설 속 그 100년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있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햇볕에 달궈진 먼지와 더위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든 아라카타카 거리는 점차 고독과 망각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엮은 집 앞에 안락 의자를 내다 놓은 사람들은 망연히 앞을 응시하거나, 해먹에 드러누워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남미 대륙을 숨가쁘게 거슬러 올라온 안데스 산맥의 북쪽 끝 봉우리인 시에라 네바다에서 발원한다는 개천으로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개천으로 뛰어들었다. 운전수 엔리케씨는 “(게릴라들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서둘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독재자들의 철권통치를 겪어야만 했던 남미인들의 ‘고독’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약탈과 절망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이란 것”이라고도 했다.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씨는 “작가는 현실과 상상이 섞인 언어를 구성해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었다”며 “마콘도에서 일어나는 과장되고 기상천외한 일들은 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미대륙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라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창호에 대한 재발견


이창호가 지닌 덕목은 워낙 많아서 한두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다. 인간적 품성, 승부사적 자질 어느 쪽을 막론하고 두루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상하이에서 치러진 제6회 농심배 최종라운드를 동행하면서 나는 그의 ‘전혀 새롭지 않은(?)’ 모습들을 ‘매우 새롭게’ 만나곤 했다. 이창호 캐릭터에 대한 내 나름의 복기(復棋)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때때로 그는 승부사라기보다 도인(道人) 쪽에 가까웠고, 대중적 인기인은커녕 수도승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그 조용하기 그지없는 몸짓이 한 번 펼쳐질 때마다 5명의 자객(刺客)들은 차례로 쓰러져갔다. 외경(畏敬)과 두려움의 5일 간이었다.


<성실성>

금강산 대국 사흘 만에 또 한 번 반복된 외지 원정. 폭주에 가까운 스케줄이었다. 일정이 이렇게 밖에 안나오는 걸까. 한국기원 스케줄러를 향해 이창호는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눈자위가 푸석푸석한 채로 가장 먼저 인천 공항에 나타났다. 그리고 묵묵히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방식 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약속에 늦는 법이 없다. 절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근성>

첫날 대국에 앞서 오전에 열린 기자회견. 이창호 장쉬 등 오후에 대국할 당일 출전 기사들은 빠졌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한국 팀 김인 단장은 “우리 선수단이 포기한 모양이다”라며 탄식했다. 그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이창호가 펄쩍 뛰었다. “그럴 순 없죠. 꼭 이기겠습니다.” 양처럼 순하기만 한 이창호의 손바닥엔 매(鳶)의 발톱이 숨겨져 있었다. 훗날 그는 ‘김국수님’의 자극 요법이 큰 힘이 됐다며 웃었다.


<자기 조절>

뒤로는 올 들어 1승 5패란 최악의 전적. 앞에 보이는 것은 5연승이란 태산 같은 짐. 그는 도착 직후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했다. 동행했던 한국 팀 관계자들과 식사조차도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질 수도 있고 부담감이 가중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체력 비축의 의미도 강했다. 베이징서 사업을 하는 한 살 아래 동생 영호 씨가 날아와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발했다. 식사는 동생이 거의 매 끼를 사다 날라 해결했다. 호텔 방에서 가족들의 근황을 반찬삼아 함께 식사를 마치면 날이 어둑해지곤 했다. 형이 바둑판을 당겨놓는 동안 동생은 방을 치웠다.


<치밀함>

첫 날 도착 후 바둑판부터 요청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온 다음 날 대적할 상대의 기보를 놓아보며 포석을 구상했다. 제한 시간 1시간짜리 준(準) 속기인 농심배는 사전 구상이 잘 맞아떨어지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매일 밤늦게 까지 다음 ‘제물’감을 바둑판 위에 눕혀놓고 숙달된 조리사처럼 기보를 해부했다. 이 번 대회 기간 중 그가 거의 매 판에 걸쳐 초속기로 빠른 운석(運石)을 보인 이면엔 이 같은 비결(?)이 있었다.


<여유>

중국 기자들은 집요했다. 4명의 중, 일 기사들이 모두 탈락하고 21세의 애송이 왕시만을 남겼을 때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겐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혹시 그 전통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무너지는 건 아닐까?” 이창호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승부란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맞상대는 안 해봤어도 간접적으로 기질(棋質)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바둑은 이번 이창호의 5승 가운데 가장 편한 바둑 중 한 판이 됐다.


<극복력>

초1류 승부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2가지. 하나는 승부처를 찾아내는 동물적 후각이고, 또 하나는 승부처에서 자기 쪽으로 물줄기를 돌려내는 감각이다. 출국 비행기 안에서 이창호는 "농심배 우승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상하이에서의 첫 판, 즉 장쉬와의 대결이 결정적 승부처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바둑서 이창호는 초반 여유 있는 우세를 잡고도 갑자기 두 세 차례의 헛손질을 범해 미세한 형세까지 쫓겼다. 엄청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판 혼신의 힘으로 결정타를 꽂아 넣는데 성공한다. 극적 5연승으로 대회가 끝난 뒤 그는 “장쉬와의 첫 판 고비를 넘은 뒤 둘째 판부터는 컨디션이 상승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술회했다. 출국 직전 최철한에게 당한 3연패, 연 초 1승 5패로 몰렸던 난조는 그 뒤부터 급격히 물줄기를 돌렸다. 이창호만이 할 수 있는 위기 관리 능력이자 극복력이었다.


<소탈함-예의바름>

스타들에게 이른바 ‘팬’이란 사실 무섭고도 성가신 존재다. 특히 중국 내에서 이창호에 대한 인기는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는 가는 데마다 쫓겼다. 심지어는 시상식 도중에, 화장실 갈 때까지도 사인 부대는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곤 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역시 이창호의 찡그리거나 거절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요즘에야 어디 사인으로 끝나던가? 디지틀 카메라를 내밀면 포즈도 취해줬다. 인천 공항 개선(凱旋) 후에도 팬이나 이창호나 전혀 달라짐 없이 똑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꾸준함>

이상의 덕목들은 이창호란 이름의 시계 속 ‘부속 장치’같은 것 들이다. 앞서 열거한 ‘부속’들 가운데 빠진 것도 제법 있을지 모른다. 어찌됐건 이 시계는 지난 20년 간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 십 년 간 계속 째깍거릴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중간에 잠시라도 쉰다면 그건 시계도 아니지. 이창호는 잠시 반짝했다가 한 동안 잠수해 버리고, 다시 나타나 한 바탕 소동을 벌이고 또 다시 사라지는 류의 기사와 구별된다. 그의 진짜 최대의 덕목은 바로 이 ‘꾸준함’이 아닐까.


‘난청지역’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데 칭찬만하고 있을 순 없다. 그도 인간인지라 분명 부족한 점도 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마음먹고 흉도 좀 봐야겠다.

(1)절대로 튀지 않는다=어떤 경우에도 과도한 쇼 맨쉽을 피한다. 시상식 때 꽃다발을 높이 쳐든다든가, 하다못해 뛰쳐나온 응원단과 하이 파이브를 나눈다든가…하는 것은 그의 사전엔 없다. 답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상대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는 등 판에 박은 모범 답안뿐이다. 이세돌과 둘을 섞어 반죽한 뒤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이런 거야 뭐 아무래도 좋다. 진짜 큰 문제는 다음 2번이다.

 

(2)이창호는 모기 띠?=인터뷰 할 때 그를 중심으로 한 반경 30센티 밖은 난청지역이다. 도대체 몇 데시벨 쯤 될까. 모기 소리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국제 대회 때면 한국 기자들만 애먹게 마련이어서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창호의 답변은 외국 기자들에겐 통역을 통해 우렁차게 전달되는데 반해(통역자만 애먹을 뿐이다), 한국 기자들은 ‘이창호의 한국말’을 직접 ‘해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기간 동안에도 대국 직후 인터뷰를 앞두곤 '최전방’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흉이라고 할 것도 못된다. 이창호에게 그런 약점이 애교에 불과하듯 이 글에서도 그냥 애교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이창호와 같은 나라 사람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 것은 거의 축복 수준이다.

중국 바둑 팬 중엔 막무가내식 맹목적 국수주의자도 많지만 이창호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이번 대회가 한국의 대 역전 우승으로 끝난 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엔 “이창호의 5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를 존경한다”는 댓글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체단주보 시에레이(謝銳)기자 같은 사람은 평소에도 이런 얘기를 한다. “이창호는 바둑에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자존심이다. 이창호처럼 성실하고 겸손하며 노력하는 천재가 쉽게 무너진다면, 바둑 자체의 위상은 물론이고 바둑 종사자 모두가 엄청나게 초라해질 것이다. 그 때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구판절판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197쪽

갈고 닦는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정신적인 질서를 세우라고 호소한다.
철학적인 글쓰기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자신을 분석하고 통합함으로써 철학자가 되어가며 그 과정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와 더불어 글속의 '나'는 실재의 '나'를 뛰어넘으려 하고, '나'의 외부에 있는 절대성을 영혼을 근거로 해서 파악하려 한다.
철학적 글은 다음과 같은 진리에 입각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
'나'에 대한 철학적 글은 여러 철학자들이 시도한 바 있다. 몽테뉴는 자신을 9년 동안이나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관심을 내부에 두고 있다‥‥‥‥누구나 바깥쪽에 한눈을 판다. 그런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관계가 있다 나는 내 자신의 내부에 원을 그린다. "
몽테뉴의 '나'에 대한 연구결과는 이렇다. 즉, '나'는 비약이 심하고 기분의 변화가 많다 도대체 파악이 불가능하다.
"나는 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그 대상은 자연 도취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
데카르트의 󰡔성찰󰡕은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글쓰기의 귀감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출발점에서 어떻게 감각적인 삶의 세계를 이성으로 뛰어넘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길을 제시했다.
아일랜드 철학자 버클리는 '나'를 의지와 동일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198쪽

실험을 제안했다.
"자궁 속의 아이를 지켜보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에 주의하라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너는 너의 천성을 믿게 될 것이다 "
자신의 내면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 루소의 『참회록』도 철학적 글쓰기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참회록』을 시작한다.
"나는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한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진리 속에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런데 그 인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철학적인 글쓰기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이 세상을 지옥, 불안 지루함, 나 자신 그리고 너로 인식했으며 그것들을 철학의 대상들로 삼았다."
철학자인 바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분석했다.
"위대한 사상은-나의 내면적인 인생 전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 일기장 속에서 언젠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내 전체 영혼을 가득 채운다. "
철학적 글쓰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고 그 후 실존주의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나'의 약점도 알려지게 되었다. 카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불합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 "자아는 세상에서 물러-199쪽

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이다‥‥자아'는 지독한 고독을 경험한다. ""'자아'는 무가치를 경험한다.‥ ".자아'는 지옥에 산다. 지옥이 여기 있다.
"사르트르는 '나'를 해충으로 보았다 즉, "나는 마을에 페스트를 옮기는 병원균이다" 그리고 '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는 이세상의 위인도 아니고 그런 위인과 교제하지도 않는다." '나'는 전체인생을 조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자기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고 느꼈다. " 그렇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 '나'는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나는 끝없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즐긴다. - "·나'는 자본주의, 의회주의, 중심화, 관료주의의 생산품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글쓰기는 방금 언급한 예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정지되어 있는 상태를 살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와 초월성과'나'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파스칼은 일기에서 자신의 미약함과 동시에 위대함도 알아냈다. "팽창을 통해 우주는 나를 포함시킨 다음 점과 같이 만들어 버렸다. 나는 사유를 통해서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 " "나는 단지 자연의 가장 연약한 갈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갈대이다‥‥나'는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 이로써 파스칼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작가인 노발리스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는 나 이상이다. "나는 너다. "-200쪽

키에르케고르는 자아 숭배를 극복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내재적인 신(神)은 없다 ‥‥단지 실존자들만을 위해서 신은 존재한다.
작가인 테오도어 헤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공포에 떨면서 다음 과같이 썼다. "고통과 어려움이 커질 때마다 나는 믿기 어려운 신에게 나를 맡긴다. " 해커는 '나'의 고립을 다음과 같은 말로 극복하곤 했다. "나의 파트너는 바로 위대한 '너'야.
"종교 철학자인 엘리아드는 '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출생 전의 상황을 기록했다. "가끔 순수한 상태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무엇이었는지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정향이 있고, 그것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심리학자 융이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가시화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방법을 이용해서 무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관찰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철학적 글쓰기는 '나' '세계','초월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이제부터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단계적인 훈련과정을 소매할 것이다
훈련단계를 쫓아 무엇이 자신을 힘들게 했는지에 대해 쓰다 보면 소진된 에너지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매일 조금씩 내부의 성을 쌓아 가게 될 것이다.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탑과 함께. 철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허무주의를 방어하는 데 공헌을 하는 셈이다. -2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장바구니담기


....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될 것 같아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백내장의 후유증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라도 기존의 기억을 이용해 계속해서 물건들을 볼 수 있도록 물건들 사이의 거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아내는 공부를 조용히 집요하게 했었다. 나중에는 예기치 않게 냄새들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어둠 속에서는 부피나 색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힘으로 구분되었고, 그녀를 체념으로 인한 수치심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원해 주었다. 그녀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도 바늘에 실을 꿰고, 옷에 단춧구멍을 낼 수 있었고, 우유가 언제 끓을 것인지도 알아냈다. 각각의 물건들이 있는 장소를 어찌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지 때때로는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잊곤 했다. -69쪽

한번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페르난다가 집 안을 온통 뒤집어놓았었는데, 우르술라가 아이들의 침실 까치발에서 찾아냈었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많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우르술라는 단순히 그들이 갑자기 자기와 절대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네 가지 감각을 동원해 그들을 감시하곤 했는데, 마침내 집안 식구들이 각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다니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같은 시각에 거의 같은 발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매일의 자잘한 습관에서 벗어날 때만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래서 페르난다가 반지를 잃어버리고는 낙담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르술라는 그날 페르난다가 했던 행동 가운데 다른 날과 달랐던 점은 전날 밤에 메메가 빈대 한 마리를 발견해 페르난다가 아이들 침대 매트리스들을 햇볕에 내다 말린 것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매트리스 청소를 할 때 아이들도 도왔기 때문에 우르술라는 페르난다가 반지를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인 침실 까치발에 빼두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에 페르난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는 일이란 일상의 습관 때문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기가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는 길들에서만 반지를 찾아했는데, 그래서 흔히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는 그토록 힘이 드는 법이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2 』P.69~70.
-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