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KBS 스폐셜에서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에 대해 나왔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지능은 보통사람들보다도 떨어지는데 음악연주나 달력계산, 암기, 암산 등에 특별히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idiot savant라 부른다. 프랑스어로 이 용어의 의미는 배우지 않고(바보 idiot) 터득한 기술(석학 savant)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발달장애나 자폐증 등 뇌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장애와 대조되는 천재성이나 뛰어난 재능이 나타나는 현상.

특히 영화 「레인맨」의 실제 주인공 킴 팩의 기억력은 경이적이었다. 정말 부럽지만 그의 기억력은 자신 속에서만 갇혀져 있기에 창조적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이리라.

기억력이라면 어렸을 때 내 등록상표였다. 그야말로 필름같이 생생한(?) 기억력이었다. 지금도 좋지만 단기 기억이 약화되어서 집중해서 외우려고 하지 않으면 깜빡할 때가 많아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되넘겨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책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바치는 정성은 변함없건만 쉽게 놓쳐 버리다니 허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뇌의 용량이 다 차서일까?

그래서인지 책을 읽을 때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것보다 지은 이가 그것을 어떻게 엮어내고 있는지를 감상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읽는 속도보다 폭과 깊이의 읽기를 통해 책 속에 감춰져 있는 구술들을 찾아내어 나의 안목으로 꿰어 보배로 만들어 가는 작업, 즉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고 중요하다.

얼마 전에 끝낸 정옥분의 『아동 발달의 이해』(학지사)에서 “창의성이란 언뜻 보기에 관계가 없는 것들 간에 유사성을 찾아내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진정한 의미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하나님의 창조이고 인간의 창의란 기존의 것에 더하고 빼는 변형으로서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창조도 완전한 모방도 없다"고 했듯이......

그렇기 때문에 사물과 사실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관성을 발견해 기존의 지식을 확장시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가고 삶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창의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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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 시간 강사인 동생이 두 번째 책을 출간했다고 가져왔다. 혼자서 다 썼음에도 이번에도 두 명을 앞세우고 공저로 책을 내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알라딘, 교보문고에서 검색해 보니 이름만 내건 한 사람의 저서로 나와 있다. 출판사의 홈페이지에는 3인의 공저로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책을 고를 땐 저자를 중요하게 고려하는데 이렇게 이름만 내건 사람 따로 책 쓴 사람 따로 있다면 어떻게 믿고 책을 고를 있을까?

내가 고른 책 가운데 그런 책이 있을까 겁이 난다.

이름만 빌려 주고 받는 관행이 인제 끝내기를 학문의 양심에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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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9-01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일도 있군요. 모두들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두 일종의 도둑질인데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운줄 모르고 그렇게 한다는건 참 어이가 없네요...
처음 뵙는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이로운삶 2005-09-0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처음 뵙는군요. 반가워요~
그게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개선되어 가겠죠......
 

[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변신' 프란츠 카프카

체코 프라하 환각의 都市… 부조리한 상상력 자욱
뒤늦게 세워진 동상 “카프카스럽다” 탄성
전차로 이어진 도시 전체가 ‘건축 박물관’
프라하=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7.08 17:55 46' / 수정 : 2005.07.09 01:30 41'


▲ 프란츠 카프카/소설가
“프라하는 우리를 풀어주지 않아. 이 작은 엄마는 발톱을 갖고 있어...”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변신을 꿈꿨다. 그 도시에서 그는 소설 ‘변신’을 쓰면서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의 변신이 이뤄지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세번의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면서 독신으로 살았고, 베를린에서의 짧은 동거와 죽기 직전의 요양원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마흔 한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폐결핵으로 죽은 그는 프라하에 묻혔다.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운집한 프라하의 구시가지는 현실의 도시이면서도 어딘가 비현실적 분위기를 띤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이 “유럽의 마술적 수도(首都)”라고 탄복했던 프라하.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낳기에 적합한 환상의 환각제가 이 도시 어디에선가 안개와 함께 떠도는 것이 아닐까.

프라하는 움직이지 않지만, 카프카의 소설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프라하는 거울의 뒷면에 붙은 또 하나의 도시를 펼쳐놓는다. 프라하의 옛 시청 광장. 카프카는 이곳 성 니콜라스 교회 옆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카프카의 생가 앞 작은 광장에는 ‘나메스티 프란체 카프키’(프란츠 카프카의 광장)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생가가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건물 벽에 턱이 뾰족한 카프카의 얼굴 부조가 붙어있다. 창백한 시선의 카프카가 낯선 방문객을 노려본다. 카프카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카프카 기념관도 있다.


▲ 카프카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가 만든 카프카 동상. 프라하의 새 명물이다/박해현기자
카프카는 이곳에서 낮에는 보험국 관리로 일하고, 밤에는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어와 체코어 중에서 글쓰기를 택일해야 했다. 카프카 집안은 당시 프라하 인구 10% 미만인 상류층이 쓰는 독일어를 선택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체코 문학사의 일원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그 누구보다도 프라하의 상징적인 작가로 남아있다.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가까운 두스니 거리(성령의 거리)에 카프카 동상이 서있다. 가톨릭 교회와 유대인 사원이 마주보고 있는 거리다. 카프카가 매일 저녁 산책을 즐겼던 곳이라고 한다.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의 작품인 카프카 동상은 절로 “카프카스럽다”는 탄성을 짓게 했다. 머리 없이 걷고 있는 인물상의 어깨에 모자를 쓴 카프카가 걸터앉은 형상이다. 한 사내가 잠에서 깨어났더니 한 마리 벌레로 변해있더라는 황당한 소설 ‘변신’의 작가 카프카에 걸맞은 동상이었다. 들고 갔던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교수) 번역의 카프카 소설 ‘변신·시골의사’의 뒤표지를 들여다봤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라는 토마스 만의 글이 평소보다 더 크게 보였다.

동상은 카프카 사후 8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세워졌다. 작가는 너무나 오랜 시간 끝에 고향에서 제 대접을 받았다. 고향은 뒤늦게 작가에게 진 빚을 갚으면서 무수한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프라하는 전차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경 세포처럼 이어진 전차 노선과 함께 도시가 꿈틀거린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에도 전차는 다녔다. 카프카의 눈으로 보면, 전차마저도 부조리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는 전차의 입구 쪽에 서있다. 이 세계, 이 도시, 나의 가족 안에서 나의 위치를 헤아려보니 여지없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 어느 방향에서든 간에 내가 이러이러한 권리를 마땅히 내세울 수도 있을거라고는 나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소하고 순종적인 소시민의 삶을 살았던 카프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실존의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다. 흔들리며 어디론가로 가는 입석 승객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종점을 향해, 소멸을 향해 가는 유한한 인간의 소리없는 비명을 불러일으킨다.

카프카가 살았음직한 집의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없는 방이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과 같다. 창문은 어둠을 가르는 빛처럼 숨통을 형상화한다. “쓸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그 어디든 끼어보고 싶어하는 사람, 하루의 시간이나 날씨, 직장 사정의 변화 따위를 생각하다 보면 그만 그 어느 것이든, 매달릴 수 있을 팔이 보고 싶기만 한 이는 골목으로 난 창이 없이는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골목길로 난 창’ 부분)


▲ 안개깔린 프라하의 카렐 다리를포착한 사진 작가 지리 수렉의 작품. 사진집‘Prague’에서.
독일 시인 릴케가 “프라하, 풍요롭고 거대한 건축의 서사시”라는 찬사를 던졌을 정도로 프라하는 서양 건축의 화려한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다. 카프카의 단편 ‘굴’(Der Bau)은 ‘건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는 글을 통해 굴을 파면서 역설적 건축을 시도했다. “굴을 팠는데 잘 된 것 같다. 밖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구멍 하나뿐이나….”라며 시작하는 이 소설처럼 카프카의 생은 자발적 고독과 소외의 기록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채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문체로 낯익은 현실을 낯설게 만들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모든 대상을 일그러뜨려서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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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체코 프라하에서

혁명의 광장은 존재 압도하는 物神의 거리로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그렇게 회상했다. 프라하 바츨라프광장.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그 좌절을 모두 지켜봤고, 1989년의 ‘벨벳혁명’을 낳은 곳.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오자 프라하 시민들은 저항했다. 소설의 여주인공 테레사는 침략과 저항의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진으로 찍어 외국 기자들에게 필름을 건네줬다.

‘테레사는 소련 침공의 날을 떠올렸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깃대 끝에 국기를 달고 흔들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금욕을 강요당한 소련군에 대한 성적 테러였다’고 쿤데라는 썼다. 그러나 체코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뒤였다.

사메토바 레볼루체(Sametova Revoluce)!

1989년의 ‘벨벳혁명’을 체코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벨벳혁명의 무대였던 프라하의 중심가 바츨라프광장은 오늘날 외국 기업과 은행, 대형 상점들로 가득찬 물신(物神)의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36번지에 위치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건물 발코니를 눈으로 찾았다.

프라하의 봄을 젊은이로 이끌었고, 이후 반체제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해방을 선언한 곳은 지금 고급 아파트로 변해 입주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츨라프광장은 공산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한 역사의 대표작이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뜨거운 가슴으로 맞부닥뜨렸던 그곳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넓은 길이다. 프라하 중앙역 앞 국립박물관에서 무스텍광장에 이르는 길이 800m, 폭 60m의 이 광장은 바츨라프의 기마상과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군의 침공에 저항하여 분신 자살한 체코 대학생 얀 파라프의 위령비, 대로 양 편의 여행사, 항공사, 레스토랑, 호텔, 은행, 환전소, 백화점 등이 굴곡진 역사를 말 없이 응축하고 있다.

열아홉 살 때 프라하 예술대학에 입학한 쿤데라는 영화를 전공하며 시나리오 작가 수업과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학생이 되던 1948년 공산당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역사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느꼈던 경멸 그리고 ‘농담’의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축출의 경험을 이 도시에 가졌다. 프라하는 쿤데라 문학의 산실이고 고향이다. 그는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르반테스, 볼테르, 디드로 등 서유럽 작가들을 강의했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소설세계를 구축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 출신의 소설가 쿤데라를 일약 세계적 지성의 작가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정작 프라하의 서점에서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희한한 일이다.

“1975년 이후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쿤데라가 그 책의 체코어판 출판을 아직도 원치 않고 있어요. 쿤데라는 그 책을 1985년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판했고, 1985년 캐나다에 망명한 체코 문인들이 만든 출판사에서 체코어판을 냈지만 당시 체코 공산정권 아래에서는 금서였지요. ” 쿤데라가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던 카렐 대학에서 20세기 체코 문학과 세계 문학을 강의하는 마리에 므라프초바 교수의 설명이다. 1988년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 만든 영화는 벨벳혁명 덕분에 체코에서 상영됐다. 이번에는 쿤데라가 문제였다. 쿤데라는 그 영화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특히 에로틱한 장면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미 영화를 본 체코인들이 체코어로 그 책을 읽는 데 거부감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체코인들은 그 소설을 영어로 읽거나 캐나다에서 나온 체코어판을 누가 여행갔다가 선물로 사다주어야 읽을 수 있답니다. ”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쿤데라는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 하는 인생의 무의미와 무용한 열정을 괴롭게 곱씹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없고,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아닌가라고 쿤데라는 물었다.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뼈저린 인식은 쿤데라가 청년 시절에 아무런 예행 연습도 없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채 ‘생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의 산물이다.

청년 시절 프라하를 떠난 그는 이제 노년에 이르도록 프랑스 파리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므라프초바 교수는 “쿤데라는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작가가 됐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망각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내놓은 ‘느림’ ‘정체성’ ‘향수’ 같은 소설은 끊임없이 프라하와 그 주변, 체코의 이곳저곳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의 전달은 프랑스어로 이뤄지고 있다. 쿤데라를 잃은 프라하와 고향을 잃은 쿤데라가 만나는 곳은 어디쯤일까.

 

 ‘프라하의 봄’ 배경 일회적 인생 성찰

 
“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에 깔면서 일회성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의사인 토마스와 화가인 사비나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지만, 사진작가인 테레사와 박애주의적 지식인 프란츠는 존재의 무거움에 서 있다. 이 소설은 가벼움/무거움이란 대립 구조가 지닌 기묘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실존을 때로는 엄숙하게, 때로는 유희적으로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심취했던 쿤데라는 하나의 모티브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악적 구성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화자로 등장해 등장 인물들의 생을 이야기하다가, 종종 개입해 해설을 달면서 독자들의 사고를 요구한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국내에서는 1980년대 후반 출간돼 지금까지 100만 부나 팔렸다.
 
프라하=박해현기자 (블로그)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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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

‘공상과학 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

프랑스 낭트

루아르江 따라 그의 공상은 여전히 흐르고…
 
“쥘 베른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작가지요. 제가 다니는 쥘 베른 중학교에서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등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쥘 베른 소설을 많이 읽는가요?”

공상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년)의 고향 낭트의 시립 도서관에서 만난 중학생 에마뉘엘. 그는 손가락을 들어 “저기 있는 동상이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 나오는 주인공 미셸 아르당을 묘사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포탄에 몸을 싣고 지구에서 달나라로 떠난다는 황당무계한 소설의 주인공이 포탄 속에 들어가 동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 이후 무기 개발 명분을 잃어버린 대포클럽 회원들이 포탄을 타고 인류 최초로 달나라로 가는 우주 여행을 시도하는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는 1865년 발표됐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실제로 달에 착륙함으로써 쥘 베른의 몽상은 위대한 상상력으로 격상됐다.

쥘 베른의 고향 낭트는 물의 도시다. 동양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때 지혜란 물처럼 흐르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쥘 베른의 상상력은 물의 도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낭트는 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낭트는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루아르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쥘 베른의 성장기에는 선박의 출입이 잦은 상공업의 도시였다. 어린 시절 베른은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을 보면서 더 넓은 바깥 세상을 향한 동경을 품었다. 그는 11세 때 동갑내기 사촌 누이 카롤린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산호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원양선에 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혼이 났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쥘 베른은 “꿈 속에서만 여행을 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는 소설을 쓰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공상에 탐닉했다.

낭트의 중심가인 쿠르 올리비에 드 클리송 4번지가 쥘 베른의 생가다. “1828년 2월 8일 소설가이자 현대적 발견의 선각자 쥘 베른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동판이 그의 얼굴과 함께 붙어 있다. 고향은 그를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선지자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른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베른은 “나는 동생과 함께 해저 여행을 준비했다”며 “우리는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정리했다”고 성장기를 회상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오는 프랑스인 파스파르투(Passepartout)는 프랑스어로 만능 열쇠라는 뜻인데, 베른이야말로 무엇이든 상상력의 열쇠로 여는 작가였다. 그는 육해공을 넘나들다 못해 우주 공간에까지 상상력의 촉수를 뻗었다. 80일 만에 세계 일주에 성공할 수 있다는 내기를 다룬 이 소설은 인류가 세계라는 공간을 시간 개념으로 파악해 장악하는 100년 뒤의 세상을 미리 내다본 것이었다. 바다밑 모험을 그린 ‘해저 2만리’는 원자력 잠수함의 발명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문명사는 쥘 베른의 상상력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쥘 베른 서거 100주기가 된다. 베른의 고향인 낭트와 그가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다가 숨을 거둔 아미앵이 공동으로 올해의 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낭트의 언덕에 위치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쥘 베른 기념관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라 잠정적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베른 가문이 전원 주택으로 썼다는 집을 찾아갔다. 생 마르탱 교회를 마주하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그 집은 과거에 정원까지 딸린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동네의 개인 병원으로 사용되는 본채만 남아 있다. 베른은 그 집에서 루아르강을 오가는 대형 선박들을 보면서 상상 여행을 떠나곤 했고, ‘지구에서 달까지’와 ‘해저 2만리’를 그 집에서 구상했다고 한다.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서 베른의 문학적 후계자라면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단연 꼽는다. 베르베르는 올해 베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일간지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해저 2만리’의 주인공 네모 선장을 지목하면서 “그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꿈을 지켰다”며 자신과 동일시한 적이 있다.

베른의 고향에서 루아르강과는 별도로 에르드르강에는 유람선과 요트가 오간다. 그 배들 중의 하나는 ‘해저 2만리’의 잠수함과 똑같은 이름(노틸러스)을 달고 있다. 보통 배가 아니라 배를 개조해서 어느 사진 작가의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다. 비록 항해에 나서는 배는 아니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이 배는 무한한 꿈을 인화하면서 늘 멀리 나가 있는 것이다.

 

 

 쥘 베른은 누구

 
쥘 베른은 비약적인 과학 기술의 진보를 겪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유럽의 상상력을 대변한 작가였다. 62편의 장편 소설과 18편의 중·단편 소설을 남긴 그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남긴 백과사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세상의 모든 지식을 향한 탐구욕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과학 기술이 신앙과 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시대의 욕망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그의 소설이 지닌 묘미는 1세기 전 인류의 상상력을 읽으면서 미래의 세계를 나름대로 상상하는 길을 연다는 데 있다.

베른은 성년이 된 뒤 고향 낭트를 떠나 파리의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교양오락 잡지에 틈틈이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모험담을 쓰면서 출판업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1863년 ‘기구를 타고 5주간’을 발표하면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됐다. 그는 ‘경이의 여행’ 시리즈란 이름으로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등 대표작을 내놨다.

그는 당대에 이미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학성도 인정받았다. 그가 77세로 숨을 거뒀을 때 전 세계에서 조전(弔電)이 답지했다.
 
낭트=박해현기자 (블로그)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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