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구판절판


캠벨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념 아닙니까? 애인에게 아양이나 떠는 12세기의 서정시도 알고 보면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 삶의 환희에 가해지던 -188쪽

저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반작용 아니었습니까? 트리스탄 전설과, 적어도 중요한 성배(聖杯) 전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볼프람폰 에센바하의 전설도 마찬가지이지요.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神性)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 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 문화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만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예술가이지 ,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189쪽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및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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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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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일지-
고독은 '버지니아호의 침몰 이후 내가 빠져 있었던 요지부동의 상황은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순전히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식성의 세계이다. 첫날 나는 마찬가지로 상상일 뿐인 두 개의 인간 사회, 즉 사라져버린 선원들과 섬의 주민들 사이를 옮겨 다였다. 나는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항해의 동반자들과의 접촉감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재난에 의하여 끊어진 대화를 마음속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그 후 섬이 무인도라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살아 있는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의 등 뒤에서는 내 불행한 동료들의 무리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지 오래되었을 때 나의 목소리는 독백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끔찍스러운 매혹을 느끼면서 나의 내부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비인간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인간은 저마다 내부에-그리고 그의 외부에-습관 반응, 반사 작용, 메커니즘, 골몰한 생각, 꿈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깨어지기 쉬운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등류들과 항구적인 접촉을 통하여-65쪽

형성되고 계속 변모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겠다. 수액이 없어지면 이 섬세한 화초는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버린다.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아려보게 된다. 나는 말의 용법을 잃어버릴 경우 내가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뜨거운 고통의 힘을 다하여 그 극단적인 타락을 물리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나의 관계 자체가 나의 고독으로 인하여 변질되어 버린다. 어떤 화가나 판화가가 풍경 속에 혹은 어떤 기념비 근처에 인물들을 놓고 구도를 잡는 것은 액세서리에 대한 취향 때문이 아니다.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
스페란차에는 오직 하나의 관점, 일체의 잠재성이 배제된 나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이 철저한 헐벗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인 자동성에 의하여 나는 언덕의 꼭대기에, 어떤 바위 뒤에 혹은 어떤 나무의 가지들 속에 가능한 관찰자들을-매개 변수들을-투영해 보곤 했다. 이리하여 섬은 내삽법과 외삽법의 망에 의하여 종횡무진으로 누벼지고 그로 인하여 모습이 바뀌며 어떤 인식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정상적인-66쪽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했듯이 이 기능이 나의 내부에서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감퇴되고 말았다. 섬에 대한 나의 비전은 섬 그 자체로 축소되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인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내가 지금 있지 않은 모든 곳에는 측정할 길 없는 어둠이 덮여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 글이 재생시켜 주고자 하는 경험이 전례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말들을 본질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근본적으로 언어란 과연 그 내부의 모든 것이 이미 알려져 있거나 적어도 알 수 있을 터인 어떤 빛의 섬을 그 주위에 만들고 있는 등대들처럼 수많은 타인들이 가득히 들어 살고 있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영역으로부터는 그 등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환상에 힘입어 그들의 빛은 오랫동안 나에게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제는 마침내 암흑이 나를 둘러싼다.
나의 고독은 사물들에 대한 감각 능력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 존재의 바탕 자체를 파괴한다. 점점 더 나는 내 감각이 증거해 주는 것에 대한 의혹에 시달린다.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땅은 그 땅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밟는 것을 필요로 함을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 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67쪽

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나님 그 누구인 것이다!-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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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33인의 에세이 모움 『 상상』을 재미있게 읽었다. 상상(想像)이란 말은 옛날 중국 사람
  들이 코끼리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봄(想象)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상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물리학자 정재승의  꿈을 찍는 드림캠코드 ,
  개그맨 전유성의  내가 낸 세금의 10%는 내가 집행을 결정하자와 같이 현실에 없는 것을
  원하고, 또는 현실에 불만이기에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들이 모여서 현실이 만들어져 왔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의 상상을 덧붙이고 싶어진다.
  지금의 내 생활이야말로 몇 십년 전의 나의 상상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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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1 - 상상의 힘으로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영웅들의 역사
대니얼 J. 부어스틴 지음, 이민아.장석봉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부어스틴의 상상의 힘으로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영웅들의 역사인 이 책은 사상사의 배경사로서의 지성사의 고전이라 할 만큼 훌륭한 책이다.

그런데 번역이 문제다.

잘못된 번역만 다룬 책인 잔혹한 책읽기에서 여러 책들 가운데 특히  창조자들 1 을 4분의 1이나 차지할 만큼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다루었다는데 출판사에서 모두 시정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란다.

 민음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출판사인데 이렇게 훌륭한 책을 부실한 번역으로 망쳐 놓았다는 것은 우리 문화를 위해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속히 오역을 바로 잡아 새로 내 주길 바란다.

이젠 잘못된 번역본을 구입해 손해를 입은 독자를 위해 책도 리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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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구판절판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197쪽

갈고 닦는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정신적인 질서를 세우라고 호소한다.
철학적인 글쓰기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자신을 분석하고 통합함으로써 철학자가 되어가며 그 과정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와 더불어 글속의 '나'는 실재의 '나'를 뛰어넘으려 하고, '나'의 외부에 있는 절대성을 영혼을 근거로 해서 파악하려 한다.
철학적 글은 다음과 같은 진리에 입각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
'나'에 대한 철학적 글은 여러 철학자들이 시도한 바 있다. 몽테뉴는 자신을 9년 동안이나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관심을 내부에 두고 있다‥‥‥‥누구나 바깥쪽에 한눈을 판다. 그런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관계가 있다 나는 내 자신의 내부에 원을 그린다. "
몽테뉴의 '나'에 대한 연구결과는 이렇다. 즉, '나'는 비약이 심하고 기분의 변화가 많다 도대체 파악이 불가능하다.
"나는 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그 대상은 자연 도취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
데카르트의 󰡔성찰󰡕은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글쓰기의 귀감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출발점에서 어떻게 감각적인 삶의 세계를 이성으로 뛰어넘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길을 제시했다.
아일랜드 철학자 버클리는 '나'를 의지와 동일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198쪽

실험을 제안했다.
"자궁 속의 아이를 지켜보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에 주의하라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너는 너의 천성을 믿게 될 것이다 "
자신의 내면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 루소의 『참회록』도 철학적 글쓰기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참회록』을 시작한다.
"나는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한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진리 속에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런데 그 인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철학적인 글쓰기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이 세상을 지옥, 불안 지루함, 나 자신 그리고 너로 인식했으며 그것들을 철학의 대상들로 삼았다."
철학자인 바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분석했다.
"위대한 사상은-나의 내면적인 인생 전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 일기장 속에서 언젠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내 전체 영혼을 가득 채운다. "
철학적 글쓰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고 그 후 실존주의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나'의 약점도 알려지게 되었다. 카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불합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 "자아는 세상에서 물러-199쪽

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이다‥‥자아'는 지독한 고독을 경험한다. ""'자아'는 무가치를 경험한다.‥ ".자아'는 지옥에 산다. 지옥이 여기 있다.
"사르트르는 '나'를 해충으로 보았다 즉, "나는 마을에 페스트를 옮기는 병원균이다" 그리고 '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는 이세상의 위인도 아니고 그런 위인과 교제하지도 않는다." '나'는 전체인생을 조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자기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고 느꼈다. " 그렇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 '나'는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나는 끝없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즐긴다. - "·나'는 자본주의, 의회주의, 중심화, 관료주의의 생산품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글쓰기는 방금 언급한 예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정지되어 있는 상태를 살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와 초월성과'나'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파스칼은 일기에서 자신의 미약함과 동시에 위대함도 알아냈다. "팽창을 통해 우주는 나를 포함시킨 다음 점과 같이 만들어 버렸다. 나는 사유를 통해서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 " "나는 단지 자연의 가장 연약한 갈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갈대이다‥‥나'는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 이로써 파스칼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작가인 노발리스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는 나 이상이다. "나는 너다. "-200쪽

키에르케고르는 자아 숭배를 극복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내재적인 신(神)은 없다 ‥‥단지 실존자들만을 위해서 신은 존재한다.
작가인 테오도어 헤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공포에 떨면서 다음 과같이 썼다. "고통과 어려움이 커질 때마다 나는 믿기 어려운 신에게 나를 맡긴다. " 해커는 '나'의 고립을 다음과 같은 말로 극복하곤 했다. "나의 파트너는 바로 위대한 '너'야.
"종교 철학자인 엘리아드는 '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출생 전의 상황을 기록했다. "가끔 순수한 상태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무엇이었는지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정향이 있고, 그것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심리학자 융이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가시화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방법을 이용해서 무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관찰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철학적 글쓰기는 '나' '세계','초월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이제부터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단계적인 훈련과정을 소매할 것이다
훈련단계를 쫓아 무엇이 자신을 힘들게 했는지에 대해 쓰다 보면 소진된 에너지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매일 조금씩 내부의 성을 쌓아 가게 될 것이다.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탑과 함께. 철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허무주의를 방어하는 데 공헌을 하는 셈이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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