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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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일지-
고독은 '버지니아호의 침몰 이후 내가 빠져 있었던 요지부동의 상황은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순전히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식성의 세계이다. 첫날 나는 마찬가지로 상상일 뿐인 두 개의 인간 사회, 즉 사라져버린 선원들과 섬의 주민들 사이를 옮겨 다였다. 나는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항해의 동반자들과의 접촉감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재난에 의하여 끊어진 대화를 마음속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그 후 섬이 무인도라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살아 있는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의 등 뒤에서는 내 불행한 동료들의 무리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지 오래되었을 때 나의 목소리는 독백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끔찍스러운 매혹을 느끼면서 나의 내부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비인간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인간은 저마다 내부에-그리고 그의 외부에-습관 반응, 반사 작용, 메커니즘, 골몰한 생각, 꿈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깨어지기 쉬운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등류들과 항구적인 접촉을 통하여-65쪽

형성되고 계속 변모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겠다. 수액이 없어지면 이 섬세한 화초는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버린다.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아려보게 된다. 나는 말의 용법을 잃어버릴 경우 내가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뜨거운 고통의 힘을 다하여 그 극단적인 타락을 물리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나의 관계 자체가 나의 고독으로 인하여 변질되어 버린다. 어떤 화가나 판화가가 풍경 속에 혹은 어떤 기념비 근처에 인물들을 놓고 구도를 잡는 것은 액세서리에 대한 취향 때문이 아니다.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
스페란차에는 오직 하나의 관점, 일체의 잠재성이 배제된 나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이 철저한 헐벗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인 자동성에 의하여 나는 언덕의 꼭대기에, 어떤 바위 뒤에 혹은 어떤 나무의 가지들 속에 가능한 관찰자들을-매개 변수들을-투영해 보곤 했다. 이리하여 섬은 내삽법과 외삽법의 망에 의하여 종횡무진으로 누벼지고 그로 인하여 모습이 바뀌며 어떤 인식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정상적인-66쪽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했듯이 이 기능이 나의 내부에서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감퇴되고 말았다. 섬에 대한 나의 비전은 섬 그 자체로 축소되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인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내가 지금 있지 않은 모든 곳에는 측정할 길 없는 어둠이 덮여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 글이 재생시켜 주고자 하는 경험이 전례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말들을 본질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근본적으로 언어란 과연 그 내부의 모든 것이 이미 알려져 있거나 적어도 알 수 있을 터인 어떤 빛의 섬을 그 주위에 만들고 있는 등대들처럼 수많은 타인들이 가득히 들어 살고 있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영역으로부터는 그 등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환상에 힘입어 그들의 빛은 오랫동안 나에게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제는 마침내 암흑이 나를 둘러싼다.
나의 고독은 사물들에 대한 감각 능력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 존재의 바탕 자체를 파괴한다. 점점 더 나는 내 감각이 증거해 주는 것에 대한 의혹에 시달린다.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땅은 그 땅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밟는 것을 필요로 함을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 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67쪽

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나님 그 누구인 것이다!-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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