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이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불안)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모란은 몇 번 피었고 사월은 몇 번 흘렀는지 그것을 셈하는 일도 우스워 아침부터 초코칩쿠키만 축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환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즐거움은 없다. 즐겁기 위해 뭘 더 버려야 하는지 버릴 것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즐거움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 뭔가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기어 오르다니. (스스로 올랐나? 뭐 그렇다 치고)
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가을이 오면, 벌써 가을이 왔다고 떠벌리는 사람도 있더라마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
달려서 가을을 통과하고 겨울을 통과하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통과하고 뭐 그렇게 계속 통과하고 또 통과하고. 그래서 '다행이야! 이제 몽땅 싸그리 사라졌어!'를 중얼거릴 수 있기를. 더는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갈 날들을 넘겨보지도 않고 그렇게 그저 패쓰 또 패스. 그렇게 나는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달린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이 한 트럭이다. 물론 걱정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밝히는 바 내 목표는 10km다,라고 말하니 걱정하던 몇 안되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비웃는 것,들만 남았다. 그럴 수 있다. 욕은 개인적으로 하겠다.
10km를 뛰기 위해 5개월을 준비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니 나를 비웃던 것,들이 나를 동정하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 저주는 개인적으로 퍼붓겠다.
그럼에도, 염려와 비웃음과 격려와 동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해도, 나는 달릴 예정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너무 평범한 퍼포먼스라 해도. 혹시 모르지.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맛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