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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알 수 없다. 또한 나는 이 책을 꼼꼼히 정성스레 읽었음에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포기해야 했을까.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는 이유는 루소의 말을 빌려 "때로는 던진 조각이 바로 목표물에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 의도는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심스러운 위로(물론 원문의 조각은 '악의'를 의미하지만)를 믿고, 그래서 뭐든 될 대로 되더라,라는 낙관을 믿고, 더 나아가 서평은 저자와 내가 나눈 대화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자위에 기댔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글을 다 쓰기 전에 내가 던진 의도가 부메랑이 되어 자폭할 것임을 안다.
달려라 하니_서곡을 듣는다.
불가능, 폭력, 리셋, 조바꿈, 도돌이표, 오역, 초월, 정밀독해, 불확실한, 불편한, 비평적 농담, 분열, 파국, 중독, 유서. 서곡과 목차를 훑으며 잡아 둔 단어들이다. 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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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으로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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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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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가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명과 폭로로써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우리 세대가 지닌....불안과 우울증에 대한 저 깊은 무감각은 그것의 직접적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제시한다고 해서 절대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여기 모인 글들은 모두 그러한 증폭과 심화, 때로는 어떤 '악화'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폭발'을 위해서 작성된 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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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사유의 악보>의 서곡을 힘있게 연주한다. 서곡은 감동적이다. 품위의 그늘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발랄하고 집요하게 달려라, 달려라 하니처럼 달리되 결승점에서 멈추지 말고 냅다 쭉 가봐라, 경기의 룰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이세상 끝까지, 끝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달려라 하니야, 이렇게 독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달린다.
달리는 하니_13개의 악장을 듣는다, 따라한다, 혹은 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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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하지 않은가, 때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 또한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질문(들)은 아마도 '형식주의'에 대한 물음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물음에 대한 '형식' 그 자체가 될 것이다"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_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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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나는 사유의 악보, 제 5악장을 쏘아본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오는 순간, 익숙한 것의 날이 내 무능의 몸통을 깊숙히 찌르는 이 감각, 그래서 이 통증(들)은 아마도 '쪽팔림'을 가장하기 위한 어깃장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 '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라고 혼잣말을 가장한 대화를 시도한다.
폭력, 저자는 소설 <부서진 사월>로 1악장을 시작한다. <부서진 사월>을 읽지 못한 나는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를 떠올린다. <부서진 사월>속에 형이 흘린 피를 회수해야 하는 아우가 있다면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속에는 아버지가 흘린 피를 회수해야 하는 아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누군가 피를 흘리면 반드시 회수한다,는 상호주의의 원형을 보여준다. '상호주의' 명분 중의 명분이며 뒤끝없는 계산법의 으뜸이라고 발화하고 싶지만 그것이 폭력이라는 단어를 지시하는 순간 복잡해진다. 왜 복잡한가? 폭력의 상호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 폭력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시원은 어디인가? 그것이 문제라면 폭력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누가 어떻게 무엇을 희생하고 용서하는가? 나는 신경증환자처럼 1악장을 또 쏘아본다. 그리고,
나는 원효가 마셨다는 물 한 바가지를 마시지 않고도 내 복잡한 심중의 밑바닥을 본다. 머리를 다 비워낼 요량으로 생각을 게워내도 소용없음을. 나는 벤야민과 바타유를 최정우를 그리고 폭력의 아포리아를 끝내 온전히 해석할 수 없고 더는 어떤 생각도 적확히 밀어부치지 못했다. 그저 다만
어떤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폭력'의 미학 안에서 눈뜨기에 대한, '반폭력'의 불가능성을 직시함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 감각만이 미친듯이 증폭하고 있소,라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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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그런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4악장,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_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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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질문과 마주하는 순간. '정지'한다. 정지는 이내 자연스럽고 고통스럽게 사유로 이어지고 내 머리속의 어떤 공 하나가 어떤 담장을 넘는다. 혹은 넘는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러므로 '실패'는 반복을 태생적으로 내제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실패'이후에 오는 '완성'은 실재로 내가 시도했던 그 무엇의 결과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래서 '절멸'이 그리고 '복음'이 쌍을 이루어 세상을 떠돌고 있었군요,라고 나는 이미 놀랄 것도 없는 생각 한 자락을 끌어안는다.
이렇게 쓰니 <사유의 악보>가 독자를 미치게하거나 푸념하게 하는 책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대목은 어찌나 즐거운지 로시니의 오페라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살짝 들려 드리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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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비해, 없는데도 마치 '있는 듯이'제사를 올리는 저 공자의 유물론은, 그래서 얼마나 우월한가....그래서 저들은 신에게 아무것도 따질 수 없는 반면, 나는 어제 제사 내내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변변찮은 영력을 지닌 조상님을 이것저것 따지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이다(조상이 돌본다고?)"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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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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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필요란 언제나 적당함이라든지 중간쯤이라든지 하는 것을 전혀 모른다. 언제나 필요는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필요는 그래서 무엇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항상 비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만들어낸다....어쩌면 이를 두고 필요의 일반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는 나로 하여금 욕망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결핍을 알게 해준다, 뼈아프게.(정신은 뼈다)."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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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지 않은가. 익숙한 것들의 전복.
여전히 달리는 하니_종곡, 입이 없는 것에 귀를 귀울여라, 그리고 뭐든 활용하라.
모든 악장에 대해 하나하나 공들여 대답하고 싶었고, 저자의 질문을 뒤집어 보고자 노력했다.
8악장 초월의 유물론, 변성의 무신론,은 박상률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읽고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었고, 10악장 불확실한 광장에서 나눈 불편한 우정, 역시 승산은 없지만 거론된 작가들의 이야기와 여전히 떠돌고 있는 문학의 '순정성'에 대해 시간을 들여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이 공간에 다 옮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고, 어쩌면 죄다 '오답'만을 표기한 답안지를 들고 있는 그런 막막함과 쪽팔림을 경험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다. 실은 더 부끄러울 일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늘 내가 창피하고 창피하다는 사실이 또 창피하다.
여튼, 이제 종곡을 듣는다. 혹은 읽는다. 내가 내 생각들을 이렇게 딱 꼬집어 쓸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매번 호들갑을 떨며 놀라지면 역시나 또 놀란다. 그럼에도 종곡에서 얻은 어떤 한 문장이 있다면 그리고 마땅치는 않지만 굳이 애를 쓰며 표현한다면 그것은 '몰락'에의 권유, 흥건하지만 침묵하고 있는 여전히 뜨거운 피,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잠시 신형철의 어떤 글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김영민의 어떤 독한 문장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튼 나는 '몰락'혹은 '절멸'의 어떤 상태와 그것을 대해는 태도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라 접는다.
좌우지간에 이 한 권의 뜬금없고 독한 책은 너무 많은 것들을 '조근조근' '잘근잘근'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함께(나는 '중독'이라고 쓰여있는 글자들을 '함께'라고 읽었다) 보자고 꼬시는 것 같았다. 그 유혹에 화답하기로 작정은 하였으나 언제 체념이라는 놈이 역습할 지는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동시에'맹인직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나는 어떤 문을 그것도 정문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맥락없는 희망을 품는다. 알면 다치고 모르면 썩겠지만, 그 중간에 어떤 샛길이 있지 않을까.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공처럼. 팽팽한 긴장의 샛길. 뭐 그런.
사족1 : 저자의 어떤 문장들은 시인의 것이었다. 옮기고 싶지만 아까워 싫다.
사족2 : 이것은 서평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만 더는 쓸 수 없다. 나는 늘 실패하니까.
사족3 : 책 274쪽의 포스터,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를 본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삐라뿌리듯이 뿌릴 것이다. 삐라를 줍는 긴장과 즐거움을 아니까. 실제로 나는 5살에 송추에서 삐라를 한 바가지 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