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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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별과 해와 달이 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나비가 있기 때문이다.  강과 산과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양과 젖소와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세계는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의 것들이 부족하지 않게 넘쳐흐른다 할지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을 근본적으로 완전화하지는 못한다. 세계가 완전히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실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세계가 세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는 정의된다. 인간은 아름답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본래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전도된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이 위대한 생명체는 끊임없이 세계를 창조해왔다. 열심히 사고했고 노련하게 행위했다.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체들은 찬탄할 것이다. 이 세계의 영장 인간의 아름다움을.

  물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성립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세분하면 역설적 편린들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거짓과 위선, 불관용과 비양심, 배신과 잔혹 등 아름다운 인간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들이 인간의 포괄적 아름다움 속에 실재한다. 지난한 인류사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다움의 포괄로 압도해왔던 시간의 1차원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바로 '인간'에 대한 텍스트다. 밀도있는 김훈의 문체가 조명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은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비열함, 더러움, 희망에 대해 담담하고 노련하게 써내려갔다.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이라는 인간이 당면한 시급한 현안문제들은 '이 세계(현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다른 세계(이상)'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공무도하가>의 전설처럼, 백수 광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작가 김훈은 '강'을 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공무도하』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본 이 세계의 이야기다.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건사고가 소설 속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소년과 아들의 죽음을 버리는 그 어머니 오금자의 잠적, 소방청장 표창을 받은 소방관 박옥출의 업무상 배임과 절도, 노학연대 집행부 일급 수배자들의 은신처를 자백하고 풀려난 뒤 해망으로 떠나 바닷속 포탄 껍질과 탄두를 건져올려 파는 장철수, 방조제 도로의 교통사고로 깔려죽은 소녀 방미호와 그녀의 아버지 세습농부 방천석의 잠적 등 문정수가 기자로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온갖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현실 세계를 취재하며 공급받은 지나친 피로감은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와의 하룻밤을 통해 해소된다.

  소설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배열된 이 세계의 인물과 사건들은 개별의 우연으로 엮여있다. 인물간의 과거 어느 지점이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현재의 녹록지 않은 인연이 과거를 종속시킨다. 개별적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 새로운 지점에서 만나 특별한 의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형성들은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현재적 우연으로만 수용된다. 이를 조망하고 조화하며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문정수 한 사람뿐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지하는 전지적 관점에 서 있는 가장 주요한 화자가 바로 신문기자 문정수다.

  사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기자의 입장에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기자 문정수가 바라본 세계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더러운 시공간이다. 난잡하고 비열하다. 슬프고 각박하다. 현실은 칠흙같은 어둠으로 차 있다. 하지만 작가 김훈은 새로운 곳을 그려내지 않는다. 인간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 세계의 막막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희망은 현실 세계 안에 있다.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할 때 함구무언된 소설의 메시지는 가시광선과 조우하게 된다. 김훈은 일부로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환원된다. 김훈은 유독 그의 소설에서 시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김훈 소설의 대전제는 시간 속에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아름다움의 괴리적 충동을 유발시키는 해석이다. 시간이란 완성되지 못한 정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운명이자 필연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오로지 이같은 불완전성을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김훈은 시간을 거부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끄집어낸다. 그가 그의 소설사에서 그려온 '전쟁', '육체', '동물'이라는 키워드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김훈식 접근이자 해석의 연결고리들이다.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공무도하가>의 여옥의 노래처럼 말이다.

  나에게 김훈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자 강렬한 희열을 맛보는 시간이다. 김훈의 소설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배경 안으로 밀어넣는 마력을 보여준다. 분명히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풍경에서 담아내는 김훈의 마력적인 문장은 인간 탐구를 조명이 아닌 조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연에서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더욱이 김훈의 문체는 철저한 반관념성을 견지한다. 대상을 조작하는 어설픈 관념들을 그는 그의 문장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문장이 사유를 적확히 견인하며 의미를 명징화한다. 맑고 고운 소리는 더 이상 피아노의 전유물이 아니다. 김훈의 문장이 그러하다.

  소설가에게 문체는 매우 중요한 자의식이다. 꾸준한 집필을 통해 나름의 개성있는 문체를 일궈낸 소설가들을 보라. 자신만의 문체로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들의 특징은 다른 작가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김훈이나 신경숙의 '문체'가 구효서/임철우의 '서사와 리얼리티', 김연수의 '학구적 기질', 성석제/은희경의 '이야기솜씨', 박민규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문체는 문장에 대한 상대적 문예 양식 기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소설을 형성한다. 내가 문학에서 유독 문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온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 해명된다.

  김훈식 허무주의는 결국 현실 세계의 희망을 발화시킨다.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도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다. 그리고 그 어떤 허무도 이 명징한 진리를 압도하지 못한다. 김훈이 '강'을 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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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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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깨닫는 것 중 하나는 남자와 여자의 명확한 상이함이다. 동일한 종족이면서도 남자와 여자는 많은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종국 두 성별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 수많은 연인들이 이별을 하는가. 왜 그리도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가. 이는 너무 다른 두 성별의 특질에 기인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의 크기에 따라 두 존재의 친밀감의 완성도는 결정된다. 상대의 호르몬 분비와 사고의 기작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최대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통해 행복한 이성애는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따르는 법. 더욱이 남녀의 사랑만큼 그 괴리감이 농밀한 곳은 없다. 어렵고 어렵도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게는 남자가 말이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도서들은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출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꾸준히 읽혀지고 있는 남녀관계의 바이블이다. 그 외 수많은 저서들이 남녀의 태생적 차이와 이를 증거로 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조언들을 증거해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도 이러한 책더미에 한 권을 더 보태고 있는 책이다. 단 남녀간의 차이를 넘어 남자와 관련된 문화 전반에 걸친 심리학적 고찰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존재성은 특별하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충격적인 제목은 저자의 논지를 유도하기 위한 익살스런 센스로 풀이된다. 저자는 결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책은 심리학을 다룬 책답지 않게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남성이 태생적으로 갖는 특성들을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무엇보다 매우 쉽고 유연하게 풀어쓴 점이 돋보인다. 또한 저자 특유의 유려하고 코믹한 문체도 독자로부터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 한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실례, 적절한 인용과 알기 쉬운 설명 등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타파하는 이 책의 강점들이다.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친 풍성한 내용들로 인문학 서적의 범주를 넘는 확장성을 지닌 점도 이 책이 주는 풍성함이다. 남녀의 심리학적 차이에서부터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까지 솔깃한 얘기거리들이 풍성하다. 연애법과 결혼생활의 조언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남자로서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외로운 의무에 대해 재미와 행복의 의미를 불어넣고 있다.

  저자가 전하는 논지의 핵심은 간명하다. 바로 '행복'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행복의 요원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는다. 경제나 사회구조의 문제로 말하지 않는다. 보다 본질의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재미없게 사는 남자들'에 있다고 진단한다. 세계의 모든 문화와 관습은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사회가 재미없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의 문화심리학적 해석의 키워드로서 바로 불행한 남자들이 존재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저자의 진단과 해석 위에 쓰여진 '남성 행복론'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이 많이 팔려 자신의 소원인 캠핑카를 하루속히 장만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 토로에는 저자의 인생철학이 잘 묻어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있는 삶이다. 매사가 재미로 점철될 수는 없다. 하지만 죽지 못해 사는 것보다는 사는 게 재미있어 살아가는 게 훨씬 나은 인생이 아닌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재미없게 사는 것만큼 불행한 삶은 없다. 재미는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축복 중 하나이다. 일과 사랑, 관심과 취미, 삶과 신앙 등 인간이 행하는 모든 영역에서 재미는 행복을 증명하는 보증수표다. 우리의 삶이, 아니 이 땅의 남자들의 삶이 왜, 어떻게, 재미없고 희망없이 흘러왔는지 우리는 깊이 반추해야만 한다. 경제나 사회의 문제로 환원할 일이 아니다. 보다 본질의 접근이 있어야 한다. 존재론적 탐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긴요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재미'있는 삶을 위하여 남자의 '재미'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문체로 탐구한 이 한 권의 '재미'있는 책을 '재미'를 갈구하는 이 땅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일독 추천하는 바이다. 참 '재미'있는 인문학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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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9-11-0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추천하는 이들이 주변에 몇 있던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눈물은 힘이 세다
이철환 지음 / 해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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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눈물은 힘이 세다』는 선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에세이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의 첫 장편소설이다. 『연탄길』시리즈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총 360만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불어넣었다.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를 맹신하지 않고 작가의 전작과 근작을 연결짓지 않기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공정과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껍지 않은 분량을 한달음에 마무리 지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력적인 제목 만큼 힘있고 강렬하게 나를 견인해주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최유진의 가족애와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최유진은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 자아를 찾고 인생을 배운다. 소설 전체적으로 그는 네 명의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술주정뱅이로 어렸을 때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 힘들 때마다 하모니카 연주와 인생의 조언으로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하는 옆집 눈먼 아저씨. 첫 눈에 반해 그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 라라. 가장 친한 친구로서 항상 옆에 있어주는 달수. 네 명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주인공 최유진은 고난한 삶 가운데서도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

  작가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힘은 부족하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매우 단선적인 구도을 가진다. 주인공 최유진과 각 인물들간의 대화가 이야기 전개의 중추이다. 작가는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는 간결한 단문장으로 이끌어가지만 인물들간의 대화에는 잠언록과 같은 아포리즘들을 배치시킨다. 이런식의 집필은 결국 인물이 언어에 짓눌리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특히 눈먼 아저씨가 최유진에게 쏟아내는 잠언들은 서사 전개와 상당한 부조화를 발생시킨다. 인물성은 부재된 채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의지로만 전달될 뿐이다.

  소설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유진과 아버지의 관계는 기존의 통속서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진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품었던 반감과 분노는 결국 이해와 포용으로 변화된다. 아버지가 바뀐 것은 아니다. 항상 술을 벗삼고 어머니를 핍박한다. 끝내 알코올중독자로서 당신의 삶을 욕보인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유진의 시각이 변화한 것이다. 그 변화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생기는 깨달음과 깊이의 영역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장소설의 통속성을 그대로 대입한 작가의 진부한 접근이 씁쓸하다.

  유진과 라라의 로맨스 또한 그렇다. 첫사랑이라는 순전함 위에 두 인물은 놓여있다. 어린 시절 집안의 궁핍한 사정으로 몽당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한 유진에게 곱게 쓰던 자기 것을 건네는 라라의 모습은 천사의 형상으로 각인된다. 그 순전한 첫사랑은 소설 속에서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로 연장된다. 하지만 둘이 사랑을 이뤄가는 그림은 녹록하다. 순수함은 있지만 그 순수성을 보완하고 집대성하는 갈구와 열정은 부재하다. 둘은 성인이 된 후 카페라는 공간을 통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소설 속에서의 서로의 관계적 운명을 묵묵히 유지해간다. 다분히 기계적인 만남의 연속으로 비춰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한 만남을 갖는 유진과 라라의 대화 장면들은 사랑보다는 서로의 관념을 공유하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야기의 본류로 지탱될 것 같던 둘의 로맨스는 진부하게 흘러가다 맥없이 종결된다. 허무하다.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등장인물의 존재적 성격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다. 등장인물이 창조자인 작가의 절대적 손길을 벗어나는가 하면 철저히 작가의 기호에 의해 움직이기도 한다. 어떤 인물은 사유와 언어에 짓눌리기까지 한다. 인물이 소설의 화자로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존재임을 감안할 때 인격과 개성을 가진 힘있는 인물이 추동하는 소설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눈물은 힘이 세다』의 인물들은 기존의 통속서사에 짜맞혀진 하나같이 몰개성하고 무인격적인 밋밋한 존재들이다. 이 소설이 매력없이 읽히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 정도의 이야기로 제목 전면에 '눈물'이라는 감성적 대표 언어를 배치한 것이 못내 안쓰럽다. 게다가 흔한 소재와 통속서사를 이 정도밖에 끌어내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은 매우 크다. 소설은 수필과 다르다. 수필이 경험과 고백의 언어라면 소설은 작가가 사유하는 모든 우주의 총체이다. 상상력인 것이다. 경험이 이성보다 강하고 언어보다 진실하다고 말했던 소설 속 작가의 외침을 조금 수정해주고 싶다. 상상력이 경험보다 강하고 언어를 압도한다는 것을. 

  이 소설에 대해 "탁마한 언어들은 독자들의 영혼을 세척하는 데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겠지만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로도 손색이 없으리라"며 유난을 떠는 소설가 이외수의 추천사가 오버스럽다. 꽤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제목 만큼의 포스를 독자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이미 우리는 안다. 눈물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를. 이미 아는 사실에 대한 언어적 증명은 잘 쓰는 수밖에 없다. 눈물이 힘이 센 만큼 잘 쓴 텍스트 또한 힘이 세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언어와 문학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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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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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다. 여성의 인권이나 삶의 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로서의 '여성'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여성을 알지 못하고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좁게는 연애의 대상으로서 넓게는 비지니스의 핵심 키워드로서 여성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을 모성의 테두리 안에서 '대명사'화 했다. 여성은 모성이 되어야 했으며 모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선善으로 귀결되었다. 모성의 다른 이름으로 여성을 해석하고 당위해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라는 강력한 카테고리 안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단일적 의미로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엄마'의 모습이 제 일의 선이었던 시대는 지났다. 여성 안에서 엄마의 모습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근본 여성의 형상을 갈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내밀했던 삶과 욕망의 편린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끌어내고 있다. 여성도 엄연한 '인간'이라는 사실, 삶과 사랑과 정염을 내재한 분명한 실존 인간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현실 문화 가운데서 쉽없이 탐구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단이 보여준 경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작가들이 달라진 여성성을 꾸준히 조명하고 천착해오고 있다. 최근 다시 '엄마'로 회귀하는 모습이 보이고는 있지만 예전의 모성에 갇혔던 엄마와는 존재성이 다르다. 집 안에 있던 엄마가 집 밖을 나갔다. 연애와 사랑과 결혼과 섹스를 동일화했던 기존의 사고방식은 이미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유독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돋보인다. 베스트셀러 순위권 안에 여성 저자들의 이름은 항상 즐비하다. 일흔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전세계를 누비며 구호활동을 해온 한 여성 저자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있다. 엄마의 내밀했던 욕구와 방황을 극히 문학적인 텍스트 위에 올려놓은 소설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요컨대 시대가 변했고 여성의 의미와 가치도 달리 해석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지류에 한국 문학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서 권지예는 귀한 존재다. 그녀는 항상 여성을 조명하고 분석한다. 그녀의 텍스트는 근본 여성의 정체성을 단면화한다. 항상 여성화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권지예의 소설에서 남성화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권지예의 '여성'들은 방황하고 일탈하며 욕망한다. 집 안이 아닌 집 밖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인내가 아닌 욕망의 코드에서 권지예가 만들어낸 여성들은 역동하며 포효한다. 그녀의 최근 소설집 『퍼즐』은 이러한 권지예 문학의 특질이 두드러지게 집대성된 작품이다.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내게 소설집을 읽는 순서는 배치된 단편 순서 그대로다. 표제작을 먼저 읽거나 호감 가는 단편을 골라 읽거나 하지 않는다. 소설집 또한 한 권의 완성된 책이라 한다면 작가에 의해 의도된 태생성 그대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단편집의 순서에는 무언가 외면화 되지 않은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순서 그대로를 읽을 뿐이다.

  표제작 「퍼즐」이 눈에 띈다. 주인공 여성화자는 남편의 사랑도 시댁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여성이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두 번의 인공유산을 겪는다. 세 번째 아이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6개월 만에 자연유산이 된다. 그녀에게 '퍼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삶과 사랑이 산산조각되어 자신의 피부와 심장을 찌르는 아픈 통증 가운데서도 그녀는 퍼즐을 완성하고자 욕망한다. 마지막 그녀가 선택한 죽음은 퍼즐의 완성일까 미완성일까. 

  단연 눈에 띄는 단편은 「여주인공 오영실」이다. 마치 작가의 자전소설의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면서 액자소설, 환상, 기시감 등의 장치로 소설의 맛을 한껏 살렸다. 주인공 여성작가가 쓴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독자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믿기 힘든 한 통화의 전화로 주인공은 자신이 오래전에 쓴 소설을 기억에서 떠올린다.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인이라고 우기는 한 여성독자의 전화, 과거 미출간되었던 소설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 여성독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신비함을 자아낸다.

  각 단편마다 등장하는 여성들은 결혼이나 가정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전복하고 조롱한다. 그녀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욕망은 결혼이라는 카테고리 밖에서 역동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여성성의 원형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구속을 일탈하고자 하지만 그녀들에게 진정한 행복한 요원하기만 하다. 결국 죽음만이 그녀들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단편 곳곳에 드러나 있는 '죽음'은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의 표현이자 근본 여성성의 본체에 대한 비극적 메타포다.

  권지예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을 쓸 당시 엄살을 부렸던 부끄러움에 대해 고백한다. 자신의 몸이 좋지 못했던 상황을 언급하며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쾌유한 후 그것이 자신의 과도한 오버였음을 인식하고 민망스러워한다. 하지만 당시 죽음을 인지하며 써내려갔던 텍스트를 재필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다고 고백한다. 해프닝과 같은 작가의 이러한 고백은 이 소설의 메시지를 더욱 당당하게 한다. 여성성의 숭고한 원형은 솔직함에서 더욱 빛이 난다는 사실을.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말한다. 『퍼즐』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지독하다는 것을. 또한 항상 여성만을 말하고 조명하며 탐구하는 소설가 권지예 또한 지독한 소설가라는 것을. 그렇다. 권지예는 지독하다. 지독함에서 권지예 문학은 작가 자신과 등장인물이 일치한다. 어쩌면 권지예 자신의 삶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명징하게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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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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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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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귀환 #

  하루키가 돌아왔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대한 분량의 장편소설로 일본열도를 흥분시키고 있다. 그의 신간 『1Q84』의 인기가 장난이 아니다. 출간 당일에만 68만 부 판매, 발매 10일 만에 100만 부 판매, 3개월 만에 2009년 일본 전체 도서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일본에서의 경이적인 판매부수는 국내에서도 그대로 전도되고 있다. 각 서점의 소설 및 전체 서적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인들의 하루키 사랑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하루키를 찾게끔 만드는가.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가. 그의 신작 장편소설 『1Q84』는 이러한 하루키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제시한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그는 쉽게 쓴다. 그리고 재미있게 쓴다. 쉽고 재미있는 카테고리 안에서 하루키적 요소들은 역동하고 조화한다. 그럼으로써 독자와 친근하게 호흡한다. 혹자는 이러한 하루키 문학의 친화력을 '대중'이라는 비판논거로 풀이한다. 하지만 이는 선후가 잘못된 해석이다. 대중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이 조명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학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대중이 환호하는 것이다. 문학과 문학인을 평가할 때 대중이라는 단어만큼 불편하고 부적절한 것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분명 뛰어난 소설가다. 『1Q84』는 하루키 특유의 사유 우주와 문학 세계가 집대성된, 그의 천재적 작가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낸 명품 텍스트다.


# 『1Q84』의 배경 #

  굉장한 분량이다. 1,300페이지가 넘는 거대 서사에 눈과 머리와 가슴을 맡긴지 10일 만에 완독을 마무리했다. 본래 책을 느리게 읽지만 소설은 더 그러하다. 게다가 하루키의 소설은 최대한 느리게 읽는다. 하루키가 그려낸 현실과 초현실의 아이러니한 스케치, 뒷부분을 알 수 없는 숨막히는 이야기 전개, 등장인물들의 기막힌 매력, 간결한 문체와 적절한 관념성 등은 하루키 문학이 갖는 강점들이다. 『1Q84』 또한 하루키 소설의 유전자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보다 광대해졌고 더욱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루키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폭과 깊이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구성이 특이하다. 하루키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두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홀수장은 아오마메라는 서른살 여자의 이야기가, 짝수장은 덴고라는 동년배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개의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것처럼 평행선을 달리다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종속되며 엮여진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들의 나이 10살 때의 어느 겨울날에 서로의 손을 잠깐 잡는 것으로 둘 사이의 운명성을 개시 한다. 여기서 두 인물의 '손잡음'의 차이가 있다. 아오마메는 손을 '잡는' 능동적 주체인 반면 덴고는 손을 '잡히는' 수동적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잠깐 손을 잡은 것이 전부인 그들의 첫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찾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 방향'이라는 소설의 본류를 태동시킨다. 


# 하루키의 세계관 #

  『1Q84』는 출간 전부터 옴진리교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현실사회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고자 하는 하루키의 작가적인 기백이 회자되며 부각된 소설이다. 하지만 이는 이 소설의 배경, 즉 외연에 한한 부분이다. 하루키는 결코 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철저히 개인의 영역, 그것도 '사랑'의 힘을 역설한다. 세계가 변한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으며 그 진리를 자각하는 데서 진정한 사랑의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그가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강조해온 세계관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항상 그랬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사랑은 '본질'로서의 사랑이다. 하루키는 '지고지순順'이나 '일편단심心'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방법이나 색상의 영역이다. 본질로서의 사랑은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실존 세계에 묶어두지 않음으로써 그 의미를 집대성한다. 태생성 안에 절대적으로 내재된 근본 사랑의 본체는 인간이 기껏 인지하는 3차원의 시공간을 초월한다. 즉 '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너'의 실존이 '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1Q84』에서 전하는, 아니 하루키의 소설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하루키적 사랑의 근본적 의미이다.

  소설에서 덴고를 향한 아오마메의 사랑이 그렇다. 동시에 아오마메에 대한 덴고의 사랑도 그렇다. 자신이 죽어야만 덴고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오마메는 죽어야만 했다. 덴고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병상 위에 '공기 번데기'라는 판타지로 부활한 10살 무렵의 아오마메의 형상은 덴고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고 명징케 한다. 이미 이 세계에서 사라진 아오마메의 존재를 갈구한다. 이러한 아오마메를 향한 덴고의 방향성은 이 소설의 연장선상에까지 확장된다. 하루키가 마저 또는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하지만 독자에게 다의적 해석으로 양보한 사랑의 완전성을 멀티 엔딩의 형태로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의도는 결국 속편을 암시한 것일 수 있다. 벌써부터 3편에 대한 목소리가 적잖이 들리는 것 같다. 『태옆감는새』의 답습이 진행될 지 진지하게 지켜볼 일이다.


  1권은 정말 쉼없이 읽힌다. 하루키는 '자아, 종교, 사랑, 철학, 인간, 현실, 상실, 고독' 등 다양한 세계와 우주를 그의 간결한 문장 위에 올려놓는다. 흡입력 있는 서사는 독자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며 숨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2권의 가독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1권이 서사의 응집력을 단단히 하여 이야기 자체만으로 독자를 흡수한다면 2권은 아오마메와 덴고 사이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관념화하고 상징화한다. 두 인물의 사랑을 통찰하고 조정하는 관념적 문장들이 2권 곳곳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렇기에 2권은 1권보다 느린 속도를 요구한다. 다분히 다의적 해석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하루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 '1984'의 세계인지 '1Q84'의 세계인지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의 개수로 판명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각자의 이유와 사건을 통해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 있는 '1Q84'의 세계를 살아간다.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두 개의 달'은 소설 속에서 수없이 반복 등장되면서 실제의 현실(1984)과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그 세계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 안에서 생동하는 아오마메와 덴고는 분명한 현실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아닌 개인, 즉 '나'의 좌표다. 달이 한 개밖에 없건, 두 개가 있건 세 개가 있건, 결국 덴고(아오마메)라는 인간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 덴고가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고백하는 자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은 결국 문제의 본질이 외부세계가 아닌 나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세계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인 것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나는 나일 뿐이다. 나의 본질과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고유의 문제를 안고 있고 고유의 자질을 가진 한 명의 똑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포효하는 덴고의 모습에서 하루키의 판타지는 현실적 메시지로 환원된다.


# 『1Q84』의 매력 #

  하루키는 매력적인 소설기법과 다양한 소재를 통해 뛰어난 재미를 선사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두개의, 아니 그 이상의 세계들은 전부 애매모호하다. 하루키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나'의 존재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실존 근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에서 달이 한 개 떠 있는 1984년의 현실성과 '분명하게' 두 개 떠 있는 '1Q84'라는 비현실적 현실성을 가름하는 객관은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다의적 해석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결국 하루키의 이러한 의도는 그의 전작들을 곱씹게 하는 동시에 별도의 문학적 획을 긋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신비스럽고 입체적인 소설작법 또한 인상적이다. 후카에리가 말하고 아자미가 받아쓰며 덴고가 리라이팅하는 「공기 번데기」 는 『1Q84』 속 액자소설로서 특수한 역할을 지닌다. 또한 인물이 소설 속 소설로 침투하기도 하고 다른 인물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한다. '1Q84'로 향하는 입구는 있되 출구는 없는 일방통행식 초대, 엄연한 자연 환경인 하나의 달 외의 또 하나의 달의 존재, 현실의 '1984'와 대비되는 또 다른 현실세계 '1Q84'의 명칭 변경 등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의 재치와 아이디어를 다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몇몇 소재들의 교집함을 목도하게 되는데 『1Q84』에서도 그 경향은 두드러진다. 독자는 하루키 소설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코드들─고양이, 입구와 출구, 성기, 도서관, 상실, 세계, 쥐, 분신─을 만난다. 하루키가 자주 사용하는 이러한 조각들은 그의 문학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것들이다. 많은 독자들이 『1Q84』 속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해변의 카프카』를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묘한 기시감이 반드시 동반되는 게 하루키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하루키의 소설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1Q84』를 읽는 가장 큰 흥미는 주인공의 기막힌 매력에 있다. 이 소설의 매력중 8할은 두 주인공의 매력이다. 책을 읽는 내내 아오마메와 덴고의 매력에 흠취했다. 그 매력은 다른 어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그것보다 농밀하고 압도적이었다. 나에게 『1Q84』를 여는 것은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나는 순간이었고 닫는 것은 그들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아오마메는 내 속에서 숨쉬었고 덴고는 내 가슴을 두근거렸다. 나도 모르게 방 창문을 열고 달의 개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덧 『1Q84』 안에 들어가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목도했다. 그랬다. 나는 하루키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설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인물을 창조해내는 하루키의 힘이다.


# 근대문학의 종언과 하루키의 위치 #

  일본 문단은 현재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태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가와니시 마사아키 등 일본 내 저명한 평론가들은 일본소설이 종내 마침표를 찍었다고 단언한다. 그 마침표의 좌표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 이후 120년 동안 일본문학은 진보했고 발전해왔다. 일본소설은 그들의 역사와 함께 소재를 공유해왔던 '나(我), 집(家), 성(性), 신(神)'을 모두 관통했고 조명했다. 하나의 소설사에서 나올 수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 모두 나왔다고 할 만큼 풍성했다. 이제는 예전의 소설보다 더욱 훌륭한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의무감이 일본 문단을 압박하고 있다. 바로 그 시종점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하루키적 마침표의 디테일은 무엇일까.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가와바탸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창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은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야스나리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외쳤을 때 '아름다운 일본'과 '나'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나'를 규명했을 때 일본인 안에서 명확한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의 마침표에 해당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으로써 일본과 일본인 사이의 결락을 연결지을까. 하루키 소설이 끊임없이 읽힐 수밖에 없는 보다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너무 잘 쓴 소설 『1Q84』 #

  서평의 말미에 도착했다. 내가 일천한 분석으로 『1Q84』와 하루키에 대해 찬연한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썼기 때문이다. 『1Q84』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전 작품을 전부 끌어안으면서도 확연한 한 획을 긋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결정판, 이라는 수식어구가 전혀 아깝지 않다. 명품 텍스트는 명품 작가를 통해 창조된다. 하루키는 명품 소설가다. 소설 『1Q84』는 하루키의 천재성을 충분하고도 적확하게 증명하고 있는 최신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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