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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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별과 해와 달이 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나비가 있기 때문이다.  강과 산과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양과 젖소와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세계는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의 것들이 부족하지 않게 넘쳐흐른다 할지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을 근본적으로 완전화하지는 못한다. 세계가 완전히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실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세계가 세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는 정의된다. 인간은 아름답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본래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전도된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이 위대한 생명체는 끊임없이 세계를 창조해왔다. 열심히 사고했고 노련하게 행위했다.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체들은 찬탄할 것이다. 이 세계의 영장 인간의 아름다움을.

  물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성립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세분하면 역설적 편린들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거짓과 위선, 불관용과 비양심, 배신과 잔혹 등 아름다운 인간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들이 인간의 포괄적 아름다움 속에 실재한다. 지난한 인류사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다움의 포괄로 압도해왔던 시간의 1차원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바로 '인간'에 대한 텍스트다. 밀도있는 김훈의 문체가 조명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은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비열함, 더러움, 희망에 대해 담담하고 노련하게 써내려갔다.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이라는 인간이 당면한 시급한 현안문제들은 '이 세계(현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다른 세계(이상)'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공무도하가>의 전설처럼, 백수 광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작가 김훈은 '강'을 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공무도하』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본 이 세계의 이야기다.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건사고가 소설 속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소년과 아들의 죽음을 버리는 그 어머니 오금자의 잠적, 소방청장 표창을 받은 소방관 박옥출의 업무상 배임과 절도, 노학연대 집행부 일급 수배자들의 은신처를 자백하고 풀려난 뒤 해망으로 떠나 바닷속 포탄 껍질과 탄두를 건져올려 파는 장철수, 방조제 도로의 교통사고로 깔려죽은 소녀 방미호와 그녀의 아버지 세습농부 방천석의 잠적 등 문정수가 기자로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온갖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현실 세계를 취재하며 공급받은 지나친 피로감은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와의 하룻밤을 통해 해소된다.

  소설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배열된 이 세계의 인물과 사건들은 개별의 우연으로 엮여있다. 인물간의 과거 어느 지점이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현재의 녹록지 않은 인연이 과거를 종속시킨다. 개별적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 새로운 지점에서 만나 특별한 의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형성들은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현재적 우연으로만 수용된다. 이를 조망하고 조화하며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문정수 한 사람뿐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지하는 전지적 관점에 서 있는 가장 주요한 화자가 바로 신문기자 문정수다.

  사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기자의 입장에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기자 문정수가 바라본 세계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더러운 시공간이다. 난잡하고 비열하다. 슬프고 각박하다. 현실은 칠흙같은 어둠으로 차 있다. 하지만 작가 김훈은 새로운 곳을 그려내지 않는다. 인간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 세계의 막막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희망은 현실 세계 안에 있다.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할 때 함구무언된 소설의 메시지는 가시광선과 조우하게 된다. 김훈은 일부로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환원된다. 김훈은 유독 그의 소설에서 시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김훈 소설의 대전제는 시간 속에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아름다움의 괴리적 충동을 유발시키는 해석이다. 시간이란 완성되지 못한 정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운명이자 필연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오로지 이같은 불완전성을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김훈은 시간을 거부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끄집어낸다. 그가 그의 소설사에서 그려온 '전쟁', '육체', '동물'이라는 키워드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김훈식 접근이자 해석의 연결고리들이다.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공무도하가>의 여옥의 노래처럼 말이다.

  나에게 김훈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자 강렬한 희열을 맛보는 시간이다. 김훈의 소설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배경 안으로 밀어넣는 마력을 보여준다. 분명히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풍경에서 담아내는 김훈의 마력적인 문장은 인간 탐구를 조명이 아닌 조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연에서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더욱이 김훈의 문체는 철저한 반관념성을 견지한다. 대상을 조작하는 어설픈 관념들을 그는 그의 문장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문장이 사유를 적확히 견인하며 의미를 명징화한다. 맑고 고운 소리는 더 이상 피아노의 전유물이 아니다. 김훈의 문장이 그러하다.

  소설가에게 문체는 매우 중요한 자의식이다. 꾸준한 집필을 통해 나름의 개성있는 문체를 일궈낸 소설가들을 보라. 자신만의 문체로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들의 특징은 다른 작가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김훈이나 신경숙의 '문체'가 구효서/임철우의 '서사와 리얼리티', 김연수의 '학구적 기질', 성석제/은희경의 '이야기솜씨', 박민규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문체는 문장에 대한 상대적 문예 양식 기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소설을 형성한다. 내가 문학에서 유독 문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온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 해명된다.

  김훈식 허무주의는 결국 현실 세계의 희망을 발화시킨다.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도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다. 그리고 그 어떤 허무도 이 명징한 진리를 압도하지 못한다. 김훈이 '강'을 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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