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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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다. 여성의 인권이나 삶의 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로서의 '여성'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여성을 알지 못하고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좁게는 연애의 대상으로서 넓게는 비지니스의 핵심 키워드로서 여성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을 모성의 테두리 안에서 '대명사'화 했다. 여성은 모성이 되어야 했으며 모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선善으로 귀결되었다. 모성의 다른 이름으로 여성을 해석하고 당위해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라는 강력한 카테고리 안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단일적 의미로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엄마'의 모습이 제 일의 선이었던 시대는 지났다. 여성 안에서 엄마의 모습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근본 여성의 형상을 갈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내밀했던 삶과 욕망의 편린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끌어내고 있다. 여성도 엄연한 '인간'이라는 사실, 삶과 사랑과 정염을 내재한 분명한 실존 인간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현실 문화 가운데서 쉽없이 탐구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단이 보여준 경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작가들이 달라진 여성성을 꾸준히 조명하고 천착해오고 있다. 최근 다시 '엄마'로 회귀하는 모습이 보이고는 있지만 예전의 모성에 갇혔던 엄마와는 존재성이 다르다. 집 안에 있던 엄마가 집 밖을 나갔다. 연애와 사랑과 결혼과 섹스를 동일화했던 기존의 사고방식은 이미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유독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돋보인다. 베스트셀러 순위권 안에 여성 저자들의 이름은 항상 즐비하다. 일흔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전세계를 누비며 구호활동을 해온 한 여성 저자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있다. 엄마의 내밀했던 욕구와 방황을 극히 문학적인 텍스트 위에 올려놓은 소설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요컨대 시대가 변했고 여성의 의미와 가치도 달리 해석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지류에 한국 문학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서 권지예는 귀한 존재다. 그녀는 항상 여성을 조명하고 분석한다. 그녀의 텍스트는 근본 여성의 정체성을 단면화한다. 항상 여성화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권지예의 소설에서 남성화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권지예의 '여성'들은 방황하고 일탈하며 욕망한다. 집 안이 아닌 집 밖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인내가 아닌 욕망의 코드에서 권지예가 만들어낸 여성들은 역동하며 포효한다. 그녀의 최근 소설집 『퍼즐』은 이러한 권지예 문학의 특질이 두드러지게 집대성된 작품이다.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내게 소설집을 읽는 순서는 배치된 단편 순서 그대로다. 표제작을 먼저 읽거나 호감 가는 단편을 골라 읽거나 하지 않는다. 소설집 또한 한 권의 완성된 책이라 한다면 작가에 의해 의도된 태생성 그대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단편집의 순서에는 무언가 외면화 되지 않은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순서 그대로를 읽을 뿐이다.

  표제작 「퍼즐」이 눈에 띈다. 주인공 여성화자는 남편의 사랑도 시댁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여성이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두 번의 인공유산을 겪는다. 세 번째 아이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6개월 만에 자연유산이 된다. 그녀에게 '퍼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삶과 사랑이 산산조각되어 자신의 피부와 심장을 찌르는 아픈 통증 가운데서도 그녀는 퍼즐을 완성하고자 욕망한다. 마지막 그녀가 선택한 죽음은 퍼즐의 완성일까 미완성일까. 

  단연 눈에 띄는 단편은 「여주인공 오영실」이다. 마치 작가의 자전소설의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면서 액자소설, 환상, 기시감 등의 장치로 소설의 맛을 한껏 살렸다. 주인공 여성작가가 쓴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독자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믿기 힘든 한 통화의 전화로 주인공은 자신이 오래전에 쓴 소설을 기억에서 떠올린다.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인이라고 우기는 한 여성독자의 전화, 과거 미출간되었던 소설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 여성독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신비함을 자아낸다.

  각 단편마다 등장하는 여성들은 결혼이나 가정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전복하고 조롱한다. 그녀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욕망은 결혼이라는 카테고리 밖에서 역동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여성성의 원형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구속을 일탈하고자 하지만 그녀들에게 진정한 행복한 요원하기만 하다. 결국 죽음만이 그녀들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단편 곳곳에 드러나 있는 '죽음'은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의 표현이자 근본 여성성의 본체에 대한 비극적 메타포다.

  권지예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을 쓸 당시 엄살을 부렸던 부끄러움에 대해 고백한다. 자신의 몸이 좋지 못했던 상황을 언급하며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쾌유한 후 그것이 자신의 과도한 오버였음을 인식하고 민망스러워한다. 하지만 당시 죽음을 인지하며 써내려갔던 텍스트를 재필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다고 고백한다. 해프닝과 같은 작가의 이러한 고백은 이 소설의 메시지를 더욱 당당하게 한다. 여성성의 숭고한 원형은 솔직함에서 더욱 빛이 난다는 사실을.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말한다. 『퍼즐』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지독하다는 것을. 또한 항상 여성만을 말하고 조명하며 탐구하는 소설가 권지예 또한 지독한 소설가라는 것을. 그렇다. 권지예는 지독하다. 지독함에서 권지예 문학은 작가 자신과 등장인물이 일치한다. 어쩌면 권지예 자신의 삶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명징하게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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