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
장 자끄 상뻬 지음, 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소중한 블로그 이웃님의 추천으로 처음 만나게 된 장 자끄 상뻬는 글과 그림으로 매우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다. 나는 그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통해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가 어디서부터 전제하는지를 잔잔하게 사유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이 좋은 이유는 전면에 내세운 주제를 위해 가장 적확한 그림을 배치, 그리고 이를 완성하는 간명한 글에 있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상뻬의 얇은 그림소설에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자아를 성찰하며, 다시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곱씹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그의 글과 그림의 연금술적 조합에 기반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두 명의 인물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세롱에 사는 자전거포 주인 따뷔랭. 그리고 언제나 최고의 사진을 찍어내는 사진작가 피그뉴. 둘은 각기 자전거 수리와 사진 촬영에서 최고의 탤런트를 갖고 있지만, 그 밝음 뒤에 가려진 어두운 비밀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인물들이다. 자전거의 왕인 따뷔랭이 정작 자신은 자전거를 전혀 탈 줄 모른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인 면에서는 전혀 손색이 없는 사진작가 피그뉴가 촬영의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 둘은 서로 이러한 내밀한 비밀을 숨기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모든 거짓은 양심과 시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법이다. 피그뉴가 따뷔랭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멋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사진 촬영을 제안하고 따뷔랭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에 응하게 된다. 험난한 언덕 정상을 배경으로 한 사진 촬영은 자전거를 전혀 탈 줄 모르는 따뷔랭의 사고로 인해 우연찮게도 매우 멋진 장면을 포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둘 사이의 감추어진 비밀 숨기기의 긴장감은 서로의 콤플렉스가 조화되면서 가장 멋진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다소 서먹해진 둘 사이. 언제나 그렇듯이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던 따뷔랭에게 피그뉴는 두 달만에 나타난다. 그리고 서로 잠시 아무 말 없이 쳐다본다. 따뷔랭이 먼저 말을 열어 비밀을 털어 놓으려 하지만 말은 도중에 끊기게 된다. 왜냐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더이상 서로의 비밀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맨 마지막 따뷔랭과 피그뉴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림은 둘 사이의 내밀한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최고의 명장면이다. 정말 좋은 관계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나누며 인정하는 것임을 마지막 명장면은 아무런 소리없이 알려주고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한> 존재성을 성립하지 못한다. 내 장점이 타자의 단점이 되고, 타자의 비범함이 내 범상함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구분하는 객관성이다. 인간의 본성인 이기적 자아, 불완전한 사유의 잣대, 상대적 결핍성의 추구를 감안한다면 '콤플렉스'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관점이 있다. 바로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각기의 전문분야에서 말하기 힘든 가슴 아픈 콤플렉스를 가진 두 남자가 미묘한 긴장의 벽을 넘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과정에는 자기의 아픔 속에 녹아 있는 상대의 또 다른 아픔의 투영을 목도했기 때문이리라. 가장 좋은 관계는 반드시 <진솔함>을 내재한다. 은밀한 것이 오픈되고 부끄러운 것이 유머가 될 때에 가장 자연적인 <믿음>과 원초적인 <동질성>이 발산되는 것이 아닐까. 

  상뻬의 책은 묘한 매력이 있다. 그 묘한 매력을 나는 두 가지 비전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하나는 책장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시켜 읽고 싶을 때 몇 번이고 읽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며, 다른 하나는 훗날 태어날 내 아이에게 아빠로서 읽어줄 소망이다. 좋은 책은 아무리 곱씹어도 질리지 않고, 활자는 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불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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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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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지구에 귀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하며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한 러시아 우주비행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 이후, 인류의 과학은 수많은 인간들을 지구 밖으로 올려 보냈다. 종종 TV나 인터넷에 올라온 우주인들의 우주유영 영상을 보면 동일종족으로서의 뿌듯함이 발생하곤 한다. 지구라는 자그만 행성에 생존하면서 뛰어난 지혜와 적응력으로 도약의 도약을 이뤄가는 인류는 과연 영장답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훗날 여건이 되면 반드시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작디 작은 행성을 한 눈에 바라보면서 깊은 사유의 세계 속으로 빠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래전 처음 비행기에 올라 창문 밖으로 바라본 지면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콩알보다 더 작은 크기로 바글바글하게 움직이는 광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가를. 60억이 넘는 인류가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다. 그 중에 누가 좀 더 키가 크고, 누가 좀 더 잘 생겼으며, 누가 좀 더 깨끗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성을 구분짓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다 고만고만한 존재인 것을. 과연 신이 지구를 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는 깊은 상념에 빠졌던 것을 회상한다.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누구 하나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다. 동시에 누구 하나 <특별히> 못난 사람도 없다. 인간은 실존 그 자체로 위대하며 존귀하다. 누군가 뛰어나고 누군가 형편없다는 말은 '완전한 한 인간의 존재성'이라는 명제 앞에서 <거짓>이다. 신은 인간을 하나의 <원본>으로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는 온전한 존재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차이는 '다름'이지 '우열'이 아니다. 만약 신께서 세계를 복사의 매커니즘으로 창조했다면 세계는 신의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인간이 갖는 콤플렉스는 대부분 상대적 결핍, 비교된 열위에 기인한다. 자아를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고 타자와의 상대성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착각이다. 이 착각으로 인해 인간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의 원본으로 고결하게 창조한 신의 사랑과 정성을 뒤로한 채로.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인간의 원초적 이기성은 타자의 콤플렉스를 불관용한다는 점이다. 상대보다 1센치 키가 큰 것에 우월을 느끼고, 시험에서 두 문제 더 맞은 것에 환호하며, 100만원 연봉 차이에 우쭐댄다. 상대의 다른 점을 나의 비범함으로 호도하여 인간을 창조한 신의 설계도를 변질시킨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 그리고 너, 더불어 우리로 이어지는 올바른 인류관의 정립이 요원하기만 한 우리네들의 모습 속에서 신은 얼마나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계실까. 

  프랑스의 유명한 그림 소설가 장 자끄 상뻬는 그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통해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들려준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 까이유, 언제 어디서나 재채기를 하는 르네 라토. 둘 사이의 농밀한 우정은 서로의 콤플렉스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또한 서로의 비범한 부분만을 <확인>한다. 마르슬랭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예찬하는 르네, 그리고 르네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흠모하는 마르슬랭. 그러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둘 사이의 변하지 않는 우정과 함께. 

  르네의 갑작스런 이사로 서로의 공간이 분리된 마르슬랭과 르네는 훗날 어른이 된 후 우연찮게 버스에서 다시 만난다. 서로의 특이한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재회는 우연이지만 필연스럽다. 다시 만난 후, 사회생활의 바쁘고 빠른 속도의 세계에서도 그들의 우정은 희석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작가 상뻬가 그린 마르슬랭과 르네의 농밀한 우정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우정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동일한 시공간을 그저 함께 있는 것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렇다. 우정의 본질은 상대의 창조적 원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오해와 불신이라 할지라도 앞의 두 전제가 굳건하다면 우정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나와 너가 다른 것을 인정하고, 너의 다름을 나의 다름의 완충제로 융화시키며,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함께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우정의 명징한 정의임을 머리와 가슴속에 아로새긴다. 그리고 친하다고 입 밖으로 고백하는 몇몇 우정어린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핸드폰으로 손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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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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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 정이현을 좋아한다. 정이현 소설의 특징은 동시대의 초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삼십 대의 생활상을 솔직하고 맛깔나게 그려내는 데 있다. 그다지 무겁지 않고, 잘 읽히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젊은 여성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정이현 문학을 재단하는 대중들도 적지 않다. 편향된 페미니즘적 관점, 지나치게 가벼운 문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소재 등을 근거로 작가 정이현은 공격받곤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 특질을 잃지 않고 브랜드화하여 새콤하고 발랄한 활자를 만들어내는 소설가 정이현을 나는 결코 멀리할 수 없다. 

  소위 '동시대코드'로 대변되는 정이혀니즘의 등장 이후, 이에 대한 아류가 급속도로 퍼져가는 느낌이다. 왕왕 접하게 되는 무슨 무슨 신문사의 신인 단편문학상들을 훑어 보면 이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여성', '2~30대 세대', '동시대', '일상', '다이어트' 등이 21세기 한국 문학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각되고 있을 정도다. 소재는 그렇다 치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과 플롯의 구도, 작가의 차별성과 활자의 무게감 등을 생각하면 마음은 더욱 씁쓸해진다. 

  '제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강력한 홍보문구를 달고 있는 백영옥의 장편소설 『스타일』은 앞서 언급한 정이혀니즘의 아류를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정이현만큼 공감적이지 않고, 덜 가볍지 않으며, 노련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속도감과 이를 풀어가는 시원한 스토리텔링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작가는 국내 메이저 패션잡지의 8년차 여기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주인공 이서정의 생활반경에서 일어나는 직장생활과 대인관계, 남녀간의 사랑과 섹스, 음식과 패션의 최신 트랜드 등의 세계를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그려냈다. 장을 이어나가면서 소소한 이야기의 전복과 과거와 연결되는 현재성을 배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소설이라는 온전한 플롯의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이러한 구성은 그저 밋밋할 뿐이다.  

  동시대를 살면서 동일한 생각과 고민을 갖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 또한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동시대의 전형성과는 거리가 먼 각 캐릭터들의 의미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밥맛보다 못한 직장상사, 다이어트에 대한 호도된 사고, 성性에 대한 대중적 개방성, 이삼십 대 여성들의 다양한 동질감 등 소설에 등장하는 21세기적 공감대 배치는 미지근한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미지근하고 또 미지근하다. 그저 빠르게 읽힌다는 것, 그리고 한없이 가볍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원동력으로 소설의 막장을 한달음에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장을 이어나가면서 점층적으로 구성되는 듯 보이는 이야기는 뒷부분에 와서 미흡한 플롯의 전형을 보여준다. 초중반과 종반의 이야기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뒷부분에 다양하게 배치한 반전들은 오히려 스토리 라인의 매끄러움을 방해한 요소로 지적된다.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듯한 부자연스러움과 비공감되는 이야기의 전복은 밋밋한 장편소설이 갖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문단의 위기'가 비단 어제 오늘의 담론은 아니다. 성석제를 위시한 아홉 명의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을 동시대의 피상성, 깊이 없음을 쿨하게 잘 형상화한 재기발랄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스타일』은 한국문단의 위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인지, 문학에 이해가 덜 되어 있는 한 미천한 독자의 얼버무림의 대상인지,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는 그저 그런 미지근한 소설이다. 내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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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2008-04-24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아류가 중앙의 손기자를 비롯한 여러 메이저 신문기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요. 아,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소위 전문가들이란 사람의 식견이 생각보다 높지 않더군요. `스타일`이 문학상 당선작이라는데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프레이야 2008-04-2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움이 미덕이 되고있는 세상이에요.
격을 세우지도 못하고 파격을 운운하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갑갑할 때가 많은데, 아마도 이책도 그런 종류인가요? 전 읽지 않아서..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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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와 예술과 과학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표준을 리드해가는 나라다. 두 차례의 거대한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존재감은 더욱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가장 큰 경제 시장과 넓은 구매력, 세계 최고의 강력한 군대, 다양하게 발전된 문화와 예술,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도시와 빌딩 등은 '팍스 아메리카나'라 불리는 미국의 국가브랜드를 완전한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수식어들이 미국 내 상위 5%의 상위계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과연 미국을 '행복한 나라'로 명명할 수 있을까.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은 『살아있는 미국역사』를 통해 조국 미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얘기한다. 저자는 약 500여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부터 작금의 부시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인지하고 있는 주류 역사와는 궤를 달리하며 내밀하게 가려진 어두운 미국사를 소개한다.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가려져 있고 호도되었던 역사를 용기있고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미국의 역사를 총 네 개의 카테고리로 나눠서 설명한다. 1부에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정복과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앓고 있는 흑백의 인종 갈등과 여성의 빈약한 인권, 노동자 및 사회적 약자의 소외 등은 바로 그 때부터 태동되었음을 언급한다. 2부에서는 인디언들을 핍박하고 내쫓으면서 끊임없이 서쪽(태평양)으로 팽창하는 야욕의 시대를 소개한다. 더욱이 이 파트에서는 노예 문제와 노사 갈등, 부의 독점과 국가의 제국화 등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3, 4부에서는 '전쟁'이라는 암울한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근현대사를 언급하면서 미국 사회에 불거진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한다. 

  저자는 강력히 주장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의 이면에는 피비린내 나는 종족의 말살이 있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독립선언서에는 여성, 흑인, 인디언이 제외되었으며, 링컨이 일으킨 남북전쟁의 본질적 목적은 노예 해방이 결코 아니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장사를 일구었으며, 베트남 전쟁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의 전파가 아니라 고무, 주석, 석유 등을 얻고자 함이었고, 고어와 부시의 선거 결과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음을 말이다. 그 외에도 많은 양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붕대에 가려진 곪은 상처를 잘라내 처참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저자는 일관된 '진실 코드'로 미국사를 해부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의 역사를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의 관점으로 관통한 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상대적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5%의 '지배층코드'가 아닌 95%의 '민중코드'로 미국사를 천착한 점은 응당 귀한 작업이다. 사실 '세계 제일의 부자 국가'라는 타이틀의 내면 속에는 '세계 제일의 양극화 국가'라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엄연히 내재되어 있다. 세계 제일의 부자들과 수천만 명의 극빈층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미국. 흑인과 여성과 노동자의 비인권과 이로 인한 갈등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국. 1조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국가 채무로 안고 있어 국방비보다 많은 달러를 빚을 갚는 데 지불하는 나라 미국. 이러한 미국의 내밀한 현재적 아픔을 이해하는 데 그네들의 진실된 민중사만큼 적확한 것이 어디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현재의 미국은 위기감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이겼지만 실패한 전쟁인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미국 국민은 정부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쌓고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활력을 잃고 있던 미국 경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그 위기 수준이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초강대국과는 맞지 않은 후진적 의료보험제도는 수많은 국민들을 의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고 있다. 게다가 국제적으로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러시아는 점차 강대국으로의 체질 변환을 꾀하며 미국을 뒤쫓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에게 추월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있어 미국의 형편이 꼴이 아니기도 하다. 현재의 암울한 미국의 주소가 하워드 진이 설파한 거짓되고 굴곡진 미국사의 업보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헤게모니는 현재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직시하고 미국의 현재성을 제대로 천착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주류인가 비주류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비본질이다. 사실인가 아닌가, 혹은 옳은 것인가 아닌가, 좋은 것인가 아닌가가 본질이다. 90세에 가까운 한 미국 사회학자의 연구와 저서가 많은 대중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의 내면에는 바로 역사에 대한 진실된 접근에 공감하는 깨어있는 자들의 욕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비단 미국뿐만아니라 어떤 국가와 사회든지간에 역사에 대한 진실된 접근과 용기있는 고백은 반드시 그 공동체를 도약케 하는 원동임을 나는 확신한다.  

  역사는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 사실의 전제 하에 역사라는 학문의 본질은 완성된다. 한국 사회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트라우마에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자를 빨갱이로 알았고, 쿠테타를 혁명으로 알았으며, 민주항쟁을 불순한 무리들의 폭동으로 알았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한국은 참 빠른 사회다. 번영도 빠르고, 잘못도 빠르며, 회복도 빠르다. 호도된 진실을 신속히 바로 세워가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힘은 '진실'에 갈증하는 한국민들의 용기와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밝은 미래는 보증된다고 믿는다. 

  지식인은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지식인의 의무라 생각한다. 자신의 지적 수준의 유지나 자기방어에만 관심이 있는 지식인은 지식으로 세상을 낭비하는 자의 전형이다. '지식'이 '진실'과 '양심'을 만나 서로 호흡하고 세계 속에서 작동하며 움직일 때에 우리사회는 올바르고 상식적이며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도 그러한 용기있고 양심있는 지식인들의 활개가 풍성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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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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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관통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평범한 활자로 그려낸 호세이니의 작업에 나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동을 선사받았었다.  

  호세이니는 평범한 문장의 연속으로 독자를 부담없이 인도한다. 하지만 두꺼운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범상한 것처럼 보였던 활자들이 재조합되면서 장난이 아닌 감동을 발현시킨다. 그리고 한동안 독자를 가만히 <정지>하게끔 만든다.  

  한 작가의 작품을 현재에서 과거로 역행하여 만나는 것은 굉장히 흥미있는 일이다. 나는 그 흥미로움이 주는 달콤함을 예찬한다. 개인적으로 문학에 늦게 손을 댄 이유도 이유거니와, 작가의 존재성을 탐구하는 데 그만큼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도 드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 두 권의 작품을 발표한 호세이니에 대해 시간의 선후를 언급한다는 것이 다소 우습지만 그의 처녀작 『연을 쫓는 아이』는 바로 이러한 내 독특한 독서방식에 의해 만나게 된 작품이다. 그리고 기대했던 만큼 나를 감동시켰고, 기대했던 이상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연을 쫓는 아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각기 주인과 하인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 하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두 아이의 우정, 한 사건으로 인해 변질되며 아파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 긴 세월이 지나 회복되는 양심과 속죄 등의 이야기를 호세이니는 장장 500페이지가 넘는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로 완성시킨다. 빠르게 읽히면서도 전혀 가볍지 않은 이 거대한 드라마는 인간의 비열함과 악함, 이에 대한 상처와 아픔, 이를 회복하기 위한 양심과 용기의 네러티브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파쉬툰인으로 태어난 아미르. 반면 억압받는 소수 시아파 이슬람교도 하자라인으로 태어난 하산. 둘의 태동은 주인과 하인으로 구분되며 아프가니스탄 인종문제의 전형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며 자라나는 아미르와 하산. 더욱이 둘다 엄마의 존재를 모르는 동질성을 공유한다. 항상 동일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성장하기에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내보내는 단어는 상대방의 이름 '아미르'와 '하산'이다. 이런 둘 사이의 농밀한 관계는 1975년 연날리기 대회가 있던 겨울 어느 날, 하산에게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아미르가 목도하면서 급반전된다.  

  이후 아미르는 하산 가족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집에서 내쫓는다.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아미르와 아버지 바바. 그곳에서 아미르는 첫 눈에 반한 여인 소라야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평생을 흠모하며 동경했던 바바의 죽음. 오랜 기간 동안 평온하게 흘러가는 미국 생활. 그리고 어느 날 바바의 평생지기 친구였던 라임 칸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이 한 통의 전화는 아미르 자신의 트라우마인 1975년 겨울의 일을 현실의 시공간으로 불러들이며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낸다. 아프간에 가서 만나게 되는 생면부지의 어린 아이 소랍. 그리고 알게 되는 진실들.  

  아미르가 1975년의 겨울에 경험한 고통은 그의 양심을 계속해서 두드리며 삶을 옥죈다. 사실 아미르가 겪은 고통은 세상 어느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성질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고, 용기가 없었고, 지나친 이기심이 있었기에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삶의 편린들. 어쩌면 호세이니가 그린 아미르의 고통과 상처는 우리네 과거와 현재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했고, 존재하는 삶의 단면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었을,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바로 그런 상처와 아픔들 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고통이 그저 고통 자체로만 끝난다면 인생의 나침반은 결코 행복을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아픈 만큼 성숙하고, 힘든 만큼 진보하며, 희생한 만큼 승리한다. 이는 명징한 삶의 원리다. 그것이 육체적 고단함이든, 정신적인 아픔이든, 양심의 고뇌든, 그 어떤 고통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훗날의 영광을 보증하는 힘이 된다. 아미르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비겁하게 묻어두지 않고, 용기와 양심으로 맞서 싸우며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승리하는 인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교훈받게 된다. 

  『연을 쫓는 아이』는 분명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 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차원의 가슴 뭉클함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 자신의 내밀한 눈물을 인지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호세이니는 고국 아프가니스탄에 내재된 사회적 인종적 오류와 모순을 극도의 절제된 표현으로 소설 배경 곳곳에 배치한다. 있는 그대로의 굴곡진 역사와 사회적 변화, 토종 음식과 아프간 민중들의 일상 등이 소설의 배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동경하며 바라보고 있는 작가 호세이니의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남자의 성장통이라는 기본적 스토리를 조국의 현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눈물과 가슴으로 내밀하게 녹여놓은 위대한 서사시리라. 

  호세이니 소설의 특징을 새삼 인식한다. 그의 소설은 그다지 대단한 문장들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평범한 활자로 조합된 그의 서사는 얼핏 보면 뛰어난 가독성만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야 비로소 호세이니의 진면목은 드러난다. 왜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르가 소랍의 작은 미소를 얻기 위해 떨어지는 연을 쫓아서 달려가는 장면은 소설의 모든 서사를 한 순간으로 통합하면서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존재감을.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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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4-25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