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지구에 귀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하며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한 러시아 우주비행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 이후, 인류의 과학은 수많은 인간들을 지구 밖으로 올려 보냈다. 종종 TV나 인터넷에 올라온 우주인들의 우주유영 영상을 보면 동일종족으로서의 뿌듯함이 발생하곤 한다. 지구라는 자그만 행성에 생존하면서 뛰어난 지혜와 적응력으로 도약의 도약을 이뤄가는 인류는 과연 영장답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훗날 여건이 되면 반드시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작디 작은 행성을 한 눈에 바라보면서 깊은 사유의 세계 속으로 빠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래전 처음 비행기에 올라 창문 밖으로 바라본 지면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콩알보다 더 작은 크기로 바글바글하게 움직이는 광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가를. 60억이 넘는 인류가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다. 그 중에 누가 좀 더 키가 크고, 누가 좀 더 잘 생겼으며, 누가 좀 더 깨끗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성을 구분짓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다 고만고만한 존재인 것을. 과연 신이 지구를 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는 깊은 상념에 빠졌던 것을 회상한다.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누구 하나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다. 동시에 누구 하나 <특별히> 못난 사람도 없다. 인간은 실존 그 자체로 위대하며 존귀하다. 누군가 뛰어나고 누군가 형편없다는 말은 '완전한 한 인간의 존재성'이라는 명제 앞에서 <거짓>이다. 신은 인간을 하나의 <원본>으로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는 온전한 존재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차이는 '다름'이지 '우열'이 아니다. 만약 신께서 세계를 복사의 매커니즘으로 창조했다면 세계는 신의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인간이 갖는 콤플렉스는 대부분 상대적 결핍, 비교된 열위에 기인한다. 자아를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고 타자와의 상대성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착각이다. 이 착각으로 인해 인간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의 원본으로 고결하게 창조한 신의 사랑과 정성을 뒤로한 채로.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인간의 원초적 이기성은 타자의 콤플렉스를 불관용한다는 점이다. 상대보다 1센치 키가 큰 것에 우월을 느끼고, 시험에서 두 문제 더 맞은 것에 환호하며, 100만원 연봉 차이에 우쭐댄다. 상대의 다른 점을 나의 비범함으로 호도하여 인간을 창조한 신의 설계도를 변질시킨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 그리고 너, 더불어 우리로 이어지는 올바른 인류관의 정립이 요원하기만 한 우리네들의 모습 속에서 신은 얼마나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계실까. 

  프랑스의 유명한 그림 소설가 장 자끄 상뻬는 그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통해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들려준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 까이유, 언제 어디서나 재채기를 하는 르네 라토. 둘 사이의 농밀한 우정은 서로의 콤플렉스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또한 서로의 비범한 부분만을 <확인>한다. 마르슬랭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예찬하는 르네, 그리고 르네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흠모하는 마르슬랭. 그러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둘 사이의 변하지 않는 우정과 함께. 

  르네의 갑작스런 이사로 서로의 공간이 분리된 마르슬랭과 르네는 훗날 어른이 된 후 우연찮게 버스에서 다시 만난다. 서로의 특이한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재회는 우연이지만 필연스럽다. 다시 만난 후, 사회생활의 바쁘고 빠른 속도의 세계에서도 그들의 우정은 희석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작가 상뻬가 그린 마르슬랭과 르네의 농밀한 우정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우정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동일한 시공간을 그저 함께 있는 것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렇다. 우정의 본질은 상대의 창조적 원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오해와 불신이라 할지라도 앞의 두 전제가 굳건하다면 우정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나와 너가 다른 것을 인정하고, 너의 다름을 나의 다름의 완충제로 융화시키며,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함께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우정의 명징한 정의임을 머리와 가슴속에 아로새긴다. 그리고 친하다고 입 밖으로 고백하는 몇몇 우정어린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핸드폰으로 손을 옮긴다. 

 

Thanks To 햇살박이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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