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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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소설을 읽을 때에는 독서의 흥미가 배가된다. 바로 이 땅, 같은 공간을 차지했던 과거 선조들의 시계에 작가의 상상력을 불어넣은 한국역사소설은 우리것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와 역사의식을 잘 비춰주기 때문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랬고, 신경숙의 『리진』이 그랬으며,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그랬다. 한국을, 한국 소설가에 의한, 한국 독자들을 위한 한국의 역사소설은 언제나 굵직한 깊이로 내게 읽혀졌다.

 

  김경욱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 '천년의 왕국'이라는 제목에서 신라를 떠올렸으나 정작 소설의 배경은 380년 전의 조선이다.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가 표착되어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이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던 역사적 사실인 하멜표류기에서 소설의 소재를 삼았다. 하멜에 앞서 1627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에 역사는 인색했고 작가는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난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문장이 짧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김훈의 문체와 비슷했고, 시대적 배경 또한 인조반정 이후 타타르(청나라)와의 긴장관계가 펼쳐지고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45일간의 남한산성에서의 수성을 그리고 있다면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라는 한 네덜란드인의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을 거쳐 국왕이 교체(효종 즉위)되고 하멜 일행이 도착하기까지의 26년간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조선의 일상에 녹아드는 세 명의 중심인물에 내면적 상상력을 깊이 불어넣었다. 역사의 인색함에 의해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지 못했기에 복원이 아닌 철저한 창조로 세 인물의 영혼을 완성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벨테브레의 내면에는 언제나 주님(기독교에서의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다. 조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지향하는 가치에서도 기독교적인 그의 사고는 중요한 기둥으로 서있다. 에보켄은 보다 여유가 넘치는 인물이다. 말하기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며 여자도 좋아하는 긍정 지향적인 인물이다.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나 처음 생활하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문화와 언어, 사상과 법도를 넘어선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유머와 조소와 삶의 깊이가 뒤섞인 그의 말과 행동은 벨테브레와 더불어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청년 데니슨은 가장 심각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사랑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독으로 일관한다. 그 고독과 번민의 최절정에서 사신으로 온 타타르 신하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용기를 보이지만 실패로 불발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명의 인물이 각기의 기질과 가치관과 시선을 갖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자 이교도의 나라인 조선을 각기의 방법대로 탐구하는 것이다.

 

  국왕 인조의 자상하고 자애로움이 많이 부각되는 것이 흥미롭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의 인조는 고독과 번민에 빠진 무능력한 왕으로 묘사되었다면, 『천년의 왕국』에서는 자애롭고 관용 있는,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미의 소유자로 그려졌다. 신식 대포의 개발에 대한 열정, 두 번의 탈출을 시도한 벨테브레에 대한 관용, 권위와 격식보다 따스한 인간애의 발동 등 김경욱이 묘사한 인조는 자애로운 왕이었다. 동일한 역사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통찰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즐겁고 흥미로움에 취해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제목 '천년의 왕국'의 의미를 생각했다. 소설의 시대배경 기준, 건국된 지 150년도 되지 않았고, 종국엔 500년만에 생을 마감한 조선이라는 왕국을 생각하면 어찌 천년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에보켄의 마지막 유언은 "선장... 부디... 두려워..."의 완성되지 않은 세 단어였다. 에보켄이 남기려 했던 말은 완성되지 않은 채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벨테브레는 깨닫는다. 그리고 에보켄의 죽음을 자신의 영혼의 전쟁의 시작으로 교체한다. 남겨진 자, 즉 벨테브레 자신의 생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소설의 마지막은 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걸까? 머리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가지 생각이 일렁인다. 소설 속에서 그의 영혼의 중심으로 일관되게 비춰졌던 주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건가.. 인류 최후 아마게돈의 혼란을 연상시키면서.. 그리고 천년왕국의 건설로 귀결되는 모호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한 희망과 몸부림처럼.. 온 세상을 덮는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볼테브레의 마지막 강렬한 의지와 목적의식의 표출은 책을 덮은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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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 이야기 - 양장본
진 에드워드 지음, 허령 옮김 / 예수전도단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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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와서 "가장 감명 깊에 읽은 책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주저없이 답변할 수 있는 준비태세가 되어있다. 『세 왕 이야기』라는 내 인생 최고의 책이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생일 당시 교회 후배의 선물로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나에게 신앙, 권위, 인내, 리더쉽, 용기, 겸손에 이르는 굵직한 삶의 본질적 요소들을 비춰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제외하고는 내게 절대 불변의 지혜의 보물로 각인 되어왔던 것이다.

 

  『세 왕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3명의 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두 번째 왕 다윗, 그리고 반역의 왕 압살롬.. 세 왕의 기질과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이해와 행동을 보여주는 책이다. 책이 두껍지 않고 어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여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동화라고나 할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종류의 '창'을 만난다. 인류의 아픈 역사의 내면에는 공격성과 이기성으로 중무장한 '창'의 던져짐이 있다. 국가, 가정, 이웃, 학교, 회사, 친구, 동료 등에서도 '창'은 다양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상대를 향해 던져진다. 크게는 국가간의 전쟁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창'의 질주는 인류역사의 한 흐름이 되어 있다. 사랑과 절제, 희생의 인류의 절대가치를 부서뜨리고 도발하는 '창'은 상대를 향해 날라가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에 박혀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그리고 '창'을 맞은 상대방은 그 상처에 아파하며 치유와 회복의 번민에 빠져 애통한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삶에도 날라오는 '창'에 자유롭지 못했다. 그를 시기하고 언제나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국왕의 '창'은 언제나 서슬 퍼랬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자신의 권위를 '창'으로 대변하며 '창' 던지는 일에 몰두했다. 왕의 '창' 던지기 제일의 목표였던 다윗은 날라오는 '창'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필요하다. 사울의 '창' 던지기 실력보다 다윗의 '창' 받는 실력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창'에 대해 어떠한 비판과 반격을 하지 않았다. '창'을 던지는 자와 던지는 행위에 대한 비판권과 재판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존재에 있다는 진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인식과 행동이 종국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권위에 대한 다윗의 올바른 이해는 언제나 그의 삶에서 풍성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해주었다. 사울의 '창'을 피해 도망다닐 때에는 권위의 주인이자 원천인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원수같은 사울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모든 결정권을 그분에게 돌려드렸다. 또한 압살롬의 반역의 '창'이 던져질 때도 그는 감내하기만 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창'이 자신에게 던져질 때마다 그는 그것을 주워 다시 되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다윗의 '창' 받기 실력은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자,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사상 초유의 닉네임을 선사받은 주인공이자, 메시야가 그의 직속 혈통에서 오게되는 영광의 계보의 중심에 서 있게된 동기가 되었다.

 

  다시 시공간의 초점을 3,000년이 지난 작금의 우리 자신으로 맞춰보자. 우리는 과연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권위에 대해 어떤 행동들을 취했던가? 날아오는 '창'을 방패로 막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창'의 주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죄를 논하는 재판관으로 서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내 자신이 '창' 던지는 자로서 상대방의 마음과 영혼을 유린하는 주체가 아니었던가? 다윗의 삶이 보여준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참된 권위에 대한 철저한 순종은 인간의 유한성과 오류, 불완전한 속성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혜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내가 해야하는 것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몰이해는 자신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자신의 주권영역이 아닌 곳에도 손을 뻗쳐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 나아가 본질과 비본질의 우선순위의 헷갈림 속에서 영혼이 황폐해지며 패배자로 추락하는 삶을 살게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겸손한 자신감만이 가능을 입증할 수 있다. 다윗은 이미 3,000년 전에 이 이치를 깨달았고 현재의 감정보다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기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창'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권위에 대한 득도의 안목을 가져 를 올려다 보는 동시에 '창' 앞에서는 겸허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를.. 그리고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되돌아올 미래의 축복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승리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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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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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바라보는 대상의 차이는 물론이요,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확연하게 구별된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어른들은 나름대로의 때묻고 주관화된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객관적이며 덜 변질된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천착한다. 그리고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른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의지를 함양한다 하더라도 생래적으로 비본질보다 본질을 우선하는 득도의 눈을 가진 어린 아이를 따라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오소희씨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언제나 여행에세이를 만날 때는 기대와 흥분의 색깔이 특별나다.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하고 깨달았던 당시의 시공간속으로 나 자신이 침투되는 느낌을 기대하면서 흥분한다. 거기에다 29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 자그만 반도를 넘어서지 못했던 개인적 콤플렉스가 뒤섞여 엄청난 앎과 지혜와 도전의 덩어리로 내게 밀려오곤 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도 이런 내 기대감을 만족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체의 부족함이 없는 소중한 양식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나라 터키라는 공간에 저자가 아들과 함께 여행했던 3년 전의 한달동안의 시간속으로 나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강점은 관찰자의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함께 여행했던 세 살배기 아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관찰자적 시선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 두 가지 시선이 이 책의 흐름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어른과 아이의 일반적인 시선 프레임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터키라는 관찰대상을 한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찰하되 자신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비록 단순한 시선이지만 어린 아이의 순수한 관찰을 통하여 여행이라는 인생수업이 주는 다양한 앎과 지혜를 1.5배 이상의 학습효과로 얻어 가고 있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내가 그림을 볼 때 개미를 보고, 해협의 별장을 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본다.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선택'한다. 나는 그 사실을 여행 초반부에 알게 되어 기뻤다. 그것은 곧 '엄마, 나는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마치 선물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따.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


  터키라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위풍당당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후예이자 한국전쟁 당시 전투병을 파병하여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던 우정의 나라.. 2002년 한일월드컵때 그 우정을 재확인하려는 듯 3,4위전에서 보여준 멋진 경기 외에는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서 터키의 남다른 매력을 알 수 있었는데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권이며 그 처절했던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오랜 전쟁의 중심지이자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대륙의 정 중앙에 위치한 특이한 유럽국가라는 상식수준의 정보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터키사람들이 느리고 순진하며 친절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매우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는 평범함 속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나라라는 점이다. 터키인들은 노동하는 하루 열 시간이 비즈니스 아워가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는 경제적 행위만을 극대화하지만 삶을 살 때에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공평해진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여유와 안정감의 미학이 있는 터키인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는 그 어떤 곳보다 올림포스라는 곳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톱카스 궁전, 블루 모스크, 그랑바자르, 아야 소피아 등으로 대변되는 이스탄불의 공인된 유명세보다는 올림포스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사람들과의 만남에 더 큰 여행의 기쁨을 발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림포스 이전의 여행은 올림포스로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이후는 다시 올림포스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책의 1/3 이상의 분량이 올림포스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저자 자신도 올림포스를 떠난 이후 자기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락되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질 정도로 자신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올림포스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행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정도다. 그 어떤 문화재나 건축물, 관광지보다 올림포스가 선물한 잔잔한 인간미와 드넓게 펼쳐진 지중해,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이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는 저자 자신이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여행의 정의이자 참맛을 바로 올림포스에서 웅숭깊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로 구분된다는 것이 다소의 불만이다. 물론 도서의 물리적인 구분에 따른다면 응당 세계여행기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화학적인 가치를 목도할 때면 무리하게나마 다른 구분 또한 가능하다. 아들의 여행 관찰 시점을 시종일관 조명하는 동시에 아이의 멋있는 미래를 소망하는 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야기, 즉 러브스토리로 말이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저자가 고백한 아들의 현재의 모습과 미래를 향한 설렌 기대감은 너무 아름답게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아이가 세돌 무렵에 처절하게 배낭여행을 했다고 해서 제 친구들과 부쩍 다르게 행동하느냐 하면 그건 물론 아니다. 토마스에 열광하고, 사소한 일에 울고 웃으며 정확히 제 나이에 기대되는 행동반경을 유지한다. 다만,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은 존재한다.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그곳에 있는 선생님이 조금 놀라운 듯이 내게 말했다.
  "중빈이가 통이 참 커요. 다른 아이들은 소꿉놀이할 때 자동차 타고 이마트 갔다 온다고 하는데, 중빈이는 비행기 타고 베트남에 다녀오겠다고 해요."
  아이는 이 세상에 한 가지 인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한 가지 언어, 한 나라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다. '나'라는 것 외에 '너'가 있는 '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는 일인 동시에 그 경계 너머를 꿈꾸는 일이다.

 

  그렇다. 한 사람의 멋진 미래는 IQ가 결정하지 못한다. 의지력이나 집념도 아니다. 부모의 교육열은 더더욱 아니다. 우주라는 연극무대에서 배우로서의 개런티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항아리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크고 단단한 항아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아리는커녕 종제기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다시말해서 인류는 극히 소수의 항아리들에 의해 절대다수의 종제기들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큰 항아리 안에 '나'를 품고 '너'를 품고 '우리'를 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이 지구와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에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고 천국이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영어 단어나 피아노 수업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항아리의 가치를 깨달아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삶은 물론이요, 자신들이 만든 작은 천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위대한 항아리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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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철학적인 오후
하인츠 쾨르너 외 지음, 이수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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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떨 때는 자기계발서보다 아름다운 동화 한편이 보다 깊이 있는 지혜와 성찰을 비춰줄 때가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하세요', '이건 하지 말고 저건 이렇게 하세요' 등의 어투로 일관하는 자기계발서의 건조한 문체가 부담된다면 잔잔한 동화 속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더 강한 포스를 던져줄 때가 있다는 얘기다. 『아주 철학적인 오후』라는 책도 나에게 그런 무게감으로 읽혀졌다.

 

  이 아기자기한 소설집은 6명의 독일작가들의 단편동화 13편을 묶어 놓은 동화집이다. '삶에 두 번 일어나는 일은 없고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는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동화집은 표지로 흑백의 모노톤을 사용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양한 색상의 비쥬얼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라는 내용의 무게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디자인일까? 흥미있게 의문을 던져보며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긴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아름다운 동화 속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무 이야기』, 『나무 이야기 2』, 『네 갈래 길』, 『새인지 몰랐던 새』, 『하루』, 『사랑은 선물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리는 조각낼 수 없다』, 『악수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손』, 『고래의 노래』, 『중심에서 사는 사람』, 『꿈에 대한 일곱 가지 질문』, 『관계』.. 이렇게 13가지의 동화 속으로 독자들을 침투시키고 있다. 어떤 것은 잘 읽히고 바로 머리속에서 정리되어 가슴으로 운반되는가 반면 어떤 것은 읽다가 다시 앞장을 넘겨가면서 읽는 등의 진도의 더딤을 경험키도 했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두뇌를 지나 가슴으로 오기까지 수없이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내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었다.

 

  인간의 사랑의 에너지는 유한한 듯하다. 아니 유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막상 자기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사랑하고 싶은 것만 골라내서 사랑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상대방이라는 그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린 사랑의 지도를 펼친 채 거기에 맞추는 작업이 비일비재하다. '인류는 사랑할 수 있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인류에게 우선되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무런 꿈과 도전 없이 인생을 무료하고 드라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래는 꿈꾸고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꿈 사이의 폭과 거리를 합리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혜안 또한 중요하다. 꿈이 없이 사는 것도 문제지만 허황된 꿈과 몽상으로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살같이 날라가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 그 후에 머뭇거리면서 오는 미래에 대한 꿈과 도전을 갖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성공과 행복이라는 기다림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1년마다 찾아오는 생일, 운동을 할 때 경험하는 러너스 하이의 희열, 마음 맞는 이와 함께 하는 소주 한잔의 시간 등등.. 소소한 일상가운데 지나치기 쉬운 소중한 인생의 조각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은 무언가 크고 특별하고 유별난 것만을 지향하는 경향에 익숙하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기 바로 전의 시간 앞에 직면했을 때를 그려보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소소한 일상가운데 감사와 행복을 인식하지 못했던 후회가 엄습할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 것에서 감사할 줄 알고 소소한 것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유한하다. 과학이 빛의 속도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류의 공간은 지구 안에 묶여 있고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밖에 갈 수 없는 1차원의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1차원의 세상을 포함하는 2차원의 세상이 있고, 2차원의 세상을 포함하는 3차원의 세상이 있듯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을 훨씬 더 고차원적으로 포함하는 세상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과학자들은 우주가 최소한 11차원 이상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천착하고 있다. 머지 않아 이 또한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유한하고 지엽적인 것임을 자각하여 주마간산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겸손함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깨달음과 지혜의 일렁임이 머리속에서 진행된다. 삶과 죽음, 행복과 사랑, 기쁨과 슬픔, 욕망과 꿈, 지혜와 어리석음 등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그리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동화는 「아주 철학적인 오후」의 제목의 의미를 넘어서 「매우 지혜로운 오후」로 내게 존재했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인간의  관대함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제시하는 이 소중한 동화를 삶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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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1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대학교 3학년 1학기 당시 '그리스 로마 문명사'라는 3시간짜리 교양과목을 수강하면서 스파르타쿠스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0년작 『스팔타커스』라는 영화를 강의시간에 시청하면서 스파르타쿠스의 삶과 그 시대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이다. 주연이자 기획자였던 커크 더글라스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는데 큐브릭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었던 노예 반란 전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전쟁과 러브스토리가 절반씩 섞인 영웅담을 원했다. 수많은 마찰음과 가위질이라는 치욕을 겪으면서 1,200만불을 투입하고도 밋밋한 영화가 되었다. "난 이 영화를 가능한 사실적으로 만들려 했다. 그래서 스팔타커스가 누구인지에 관해 신뢰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멍청한 시나리오에 반발했다. 만약 용납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필요하다면, 감독이란 그저 돈많이 받는 다른 기능공이나 제작자나 다를 바 없다. 내 생애에서 『스팔타커스』가 그 증거다."라고 말할 정도니 당시의 큐브릭 감독의 불편했던 심정을 알 만하다.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을 읽었다. 읽기 전에 책 표지와 제목에서 오는 강렬한 비쥬얼에 홀딱 반했고 로마 역사 사상 가장 위협적이고 큰 규모의 노예 반란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그릴지가 관심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삼두정치가 진행되면서 피비린내 나는 내정과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의 정치형태로 변모해가는 발판을 마련해 준 전초가 된 역사이기에 많은 기대감을 갖고 한달음에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 시대의 알렉상드로 뒤마'라고 불리며 90권이 넘는 저서를 쓴 프랑스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통한다는 막스 갈로와의 첫대면은 흥분 그 자체였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후 기다리는 것은 허탈함뿐이었다. 마치 당시의 로마제국이 수많은 노예들의 인권을 잔인하게 유린했던 것처럼 이 소설은 내 기대감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서사의 맥조차도 마음껏 유린하고 짓밟은 느낌이다. '내 이름은 가이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이다.'라고 외치는 크라수스의 부관 살리나토르의 시점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자유를 갈구하는 트라키아인 스파르타쿠스, 디오니소스 신의 여사제 아폴로니아, 유대인 치료사 자이르, 그리스인 웅변술 교사 포시디오노스, 검투사 교관 쿠리우스 등의 중심인물들의 언어와 관점이 섞이면서 액자형구조 속으로 이야기를 침투시키고 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삼류 번역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사의 맥이 뒤범벅되어 스토리텔링의 형편 없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저자는 기원전 70년경에 발생한 이 노예반란사건을 독자들이 어떻게 인식하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저 고대 로마사 그 자체? 자신과 체제의 한계에 도전하는 한 남자의 영웅담? 로마제국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변천과정을 전초하는 영웅들의 출현기? 자유로운 죽음을 위해 싸운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기?.. 머리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아쉬움과 씁쓸함만이 일렁인다. 번역 또한 형편 없는 수준이다. 외국도서의 경우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원작이 주는 느낌이 달라진다. 아무리 훌륭한 원작이라 할지라도 일관성 없고 깔끔하지 않은 문장으로 번역되면 작가가 제공하는 원초적인 맛이 희석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굳이 이 소설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것이 있다면 스파르타쿠스의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유대인 치료사 자이르의 존재이다. 실존 인물인지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스파르타쿠스가 끊임없는 결정과 판단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자신이 섬기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기준에서 조언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연인인 아폴로니아로 대변되는 디오니소스 신의 존재감과 자이르로 대변되는 유대의 유일신의 존재감이 교차되고 대조되며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의 마지막은 "오,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시는 유일신이시여, 정의의 지배자시여, 고통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도록 하소서!"라고 외치는 자이르의 기도로 정리된다. 기독교의 출생과 박해와 번영이라는 역설적인 역사가 머지않아 로마제국을 뒤덮을 것이라는 작가의 예언적 메시지일까? 흥미있는 천착이 아닐 수 없다.
 

  형편 없는 번역과 어설프게 맞추려는 이야기 전개에 적지 않이 실망한 작품이다. 뒷표지에 이 책을 평가하는 문구가 매우 흥미롭다.

고대 로마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쉽게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다.   - 쿠리에 프랑세

역사가로서의 정확성과 엄정함, 소설가로서의 재치와 입담이 어우러져 훌륭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기독교가 탄생한 곳인 고대 로마 사회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씌었다.   - 레코 드 루에스트

 

  위와 같은 평가를 한 이들에게 김훈의 『남한산성』이나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책여행 보내고 싶을 심정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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