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읽었다. 지난 번 린드그렌님께서 책여행으로 보내주신 4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가장 먼저 출간되었고 얇은 두께의 이 책을 선택하였다. 더욱이 린드그렌님께서 성석제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언급하셨고 나 또한 평소 그의 걸죽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바 기대감이 남달랐다. 얇은 두께의 부담없는 분량과 코믹한 이야기들이 한달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소설집이다. 총 32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소설집이라고는 하나 에세이 같은 느낌이 강하다. 작가 자신의 소소한 일상가운데 한 순간 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포착한 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불법 사냥에서부터 군대 라면, 딸기 찬가, 술버릇 나쁜 사람, 동네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을 그리고 있다. 또한 각 단편의 분량도 굉장히 짧다. 저자 자신의 조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단편 『가지』의 경우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다. 공간적 배경의 경우도 도시보다 농촌과 외지를 주로 선택했다. 농촌민들의 소소한 일상과 구수한 입담들이 발견되면서 유쾌한 웃음을 불러 일으킨다. 32편의 단편 중에서 인상 깊은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자.

  『군대 라면』은 군대 취사반장과의 요상스런 만남가운데 얼떨결에 먹게 되는 라면을 회상한다. 당시 먹었던 라면이 사회에서 먹었던 어떤 라면보다 감동적이고, 기념비적이고, 호소력 그 자체였으며 그 라면 때문에라도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정도라 고백하는 저자의 말에 문득 공감이 형성된다.

  『딸기』도 흥미로운 단편이다. 세상에는 무조건 맛있는 과일이 두 종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딸기라고 언급하고 있다. 딸기라는 과일에 상당히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고모의 사촌동생의 아랫집에 살던 사람의 사돈이 딸기농장을 하는데 성공적인 장사수반 이면에 비양심적인 농약살포가 있음을 꼬집기도 한다. 시종일관 딸기에 대한 찬가가 이어진다.

  『소리』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질과 비본질의 몰이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상을 소개하고 있다. 내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과 세상이 변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고난의 지름길일게다.

  『말과 말귀』 또한 교훈적이다. 가납사니 주인공과 당나귀의 일화는 말에 대한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해서 모두 예언자가 될 수는 없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당나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찬양』은 매우 흥미있는 단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에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자라는 종족에게 당했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찬양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들의 놀라운 적응을. 찬양한다, 여성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아기자기함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것인 지 조소가 섞인 표현인 지 알 바가 없다.

  『도선생네 개』는 유쾌하고 상쾌하다. 이웃들 간에 벌어진 애완견 싸움이 흥미롭다. 내력과 겉치레를 중시하는 부잣집 한씨의 풍산개, 그리고 세퍼트와 토종개의 잡종인 도선생의 애완견 두만이의 싸움은 내포적 힘과 외면적 겉치레와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사회풍자적인 내용도 적지 않은 편이다. 속도문화, 짝퉁문화, 경쟁의식, 학연과 지연, 음주문화, 운전문화, 불신과 비양심 등의 한국인의 다양한 습속들을 단편들에 녹여놓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 그리고 있고 작가 자신이 외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절제미와 유머로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준다.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집에서의 제목은 단편 제목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의 단편 제목은 없다. 아마도 '번쩍, 하고 열리는 황홀한 세상!'이라는 책 표지의 수식어구가 말해주듯이 이 책의 특질을 대변하는 문구일게다. 사실 그렇다. 일상에 대한 관찰력과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 그곳에서 번쩍과 황홀을 목도하고, 거침없이 터지게 만드는 유쾌한 웃음체로 그린,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바로 그런 책이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 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 '작가 후기' 에서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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