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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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나이의 두 자릿수 중에서 앞자리 숫자가 바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서 서른의 나이가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은 나이 또한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에 노출된 이후, 내 가치관과 사유의 폭은 이전엔 알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깨달음을 통해 수없이 넓어져 왔음을 느끼고 있다.  

  이십 대의 나이에 얻은 중요한 두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은 매우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의 형상을 투영시켜 설계한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존재는 신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할 존귀한 영장(長)이다. 또한 신으로부터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여성은 그 위대한 작업으로 말미암아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에 가장 근접한 사랑의 현현(顯現)인 모성애를 가진 위대한 존재이다. 인간과 여성에 대한 이 깊은 통찰을 나는 이십 대의 나이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올 한 해의 뒷부분은 여성에 대한 탐구를 농밀히 진행한 독서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처음 만난 파울로 코엘료는 신의 여성적 면모를 천착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 나를 빨려들게 했다. 또한 우리시대 최고의 여류작가 공지영은 『즐거운 나의 집』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삼아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게 했다. 더욱이 단 하루만에 빛의 속도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여성들의 삶이 존재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림으로써, 여성에 대한 깊이있는 재사유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나라인가? 지난 2001년 9월 11일, 비행기 폭탄 두 방을 얻어 맞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총알 세례를 퍼붓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들, 서산 왕조의 사람들, 아랍인들, 몽골인들, 소련인들에 이르기까지 아프간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침략의 역사였다. 더욱이 국민의 평균 수명을 43세에 묶어 놓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다섯 살도 못 살다 죽게 만들고, 어른의 70퍼센트가 문맹에 평균 소득 200달러인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의 인권이 참혹하게 말살되어 아프간에 사는 여성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과 가난과 비인권의 세계에서 아프간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현대사를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두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관통한다. 

  이야기는 일반적 서사의 흐름으로 흘러간다. 순행적인 시간의 흐름과 주인공격인 두 여인(마리암, 라일라)의 교차되는 이야기를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그려냈다.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잔잔하고 일상적인 문체를 통하여 두 여인의 고난과 모성과 슬픔과 우정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서사에서 두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그녀들의 동질감을 목도하는 것에서부터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프간이라는 비극적인 세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운명, 한 남자를 남편으로 둘 수 밖에 없는 운명, 외세의 침략과 수없는 내전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운명 등은 나이와 가정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사이를 믿음과 사랑으로 연결케 하는 동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외연적인 동기 외에 보다 내면적인 동기가 관찰된다.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마리암과 라일라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우정을 쌓게 되는 본질적인 동기는 바로 <모성애>라는 여성만이 행사할 수 있는 찬란한 특권에 대한 동질성의 추구에 있다.  

  수없이 많은 유산으로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암에게 라일라의 두 아이 아지자와 잘마이는 동경과 흠모의 대상이다. 더욱이 딸로 태어난 아지자에 대한 마리암의 사랑과 관심은 특별하다. 피폐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아지자를 고아원에 맡길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라일라는 어미로서의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을까? 로켓포탄이 작렬하는 길거리를 해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지자를 만나기 위해 고아원으로 향하는 라일라의 발걸음은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모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여성의 원초적 모성에 공감하는 마리암의 사랑은 종국에 자신의 죽음으로써 라일라의 행복을 지켜주게 된다. 여성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과 여성으로서 갖는 모성에 대한 동질성은 마리암과 라일라, 두 여인의 웅숭깊은 우정을 존재케 하는 원동이 되기에 지극히 감동적이다. 

  마리암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마리암은 라일라를 폭행하는 남편 라시드를 살해한 이후, 라일라를 떠나 보내면서 자신은 도망가지 않고 한 남자를 죽인 것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지불한다. 마리암의 죽음은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여성의 행복>이 라일라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또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을 포함키도 한다. 다시말해서 마리아의 죽음은 라일라의 모성과 가정이 완성되어 행복한 결말을 도출하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한 아내로서의 양심과 책임이 오롯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여러가지 사랑의 방향이 목도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중후하게 그려지고 있는 아버지 잘릴에 대한 마리암의 방향성이 애절하다. 잘릴과 마리암이 모두 죽은 후, 라일라를 통해 드러나는 딸 마리암에 대한 아버지 잘릴의 회개와 사랑의 편지는 독자로 하여금 애절함의 극치를 자아내게 한다. 또한 라일라가 평생 마음에 심은 남자 타리크에 대한 라일라의 사랑의 방향성은 종국에 둘의 사랑을 완성함으로 마무리된다. 타리크와 라일라의 행복과 사랑의 완성은 라일라에 대한 마리암의 또다른 사랑의 완성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웅숭깊은 사랑의 진정성을 사색케 한다.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현대사를 그려낸 호세이니의 작업에 나는 적잖은 감동을 선사받았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문체와 단 하나의 아포리즘도 포함하지 않은 평범한 활자가 이토록 읽는 이의 전두엽과 가슴을 후벼놓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감탄한다. 라일라의 마음속에서 빛났던 마리암이라는 여성의 존재감이 당분간 내 마음속에서도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리라. 어쩌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세상의 모든 딸들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닌,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읽어야 할 책이리라.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별 다섯 개를 흔쾌히 던진다. 그리고 인내와 모성이라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사유하며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인다.
 

타리크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라일라는 이 점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우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말을 하고 싶은 충동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라일라는 그녀의 오빠들도 이랬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라일라는 남자들이 태양을 대하는 것처럼 우정을 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때, 그것의 광채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 태양.   <p. 180>

마리암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녀는 이곳에 있다. 그들이 새로 칠한 벽, 그들이 심은 나무,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담요, 그들의 베개와 책과 연필 속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있다. 그녀는 아지자가 암송한 시편, 아지자가 서쪽을 향하여 절하면서 중얼거리는 기도 속에 있다. 하지만 마리암은 대부분, 라일라의 마음속에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다.   <p.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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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스트
김순덕 지음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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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조중동>이라는 아이콘을 낯설게 여기는 이는 드물 것이다. 조중동은 참여정부 지난 5년동안 각종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구 중에 하나다.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3대 메이저 신문은 여러가지 면에서 정부와 충돌하고 대립각을 세워왔다. 정책과 이념은 물론이요, 국가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에 있어 정부와 조중동은 5년 내내 전쟁을 불사를 정도의 싸움을 진행했다. 굳이 구별하자면 지난 10년의 정권은 좌파 정권이요, 조중동은 우파 언론이다. 정책과 노선에서 오는 논쟁은 불보듯 뻔한 일이요, 인신공격성 기사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언론과 정부와의 싸움은 수년 내내 활력을 잃은 경제에 힘들어 하는 국민들에게 주름살 몇 개를 더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조중동, 즉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3대 메이저 신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3개 신문사가 전체 신문시장의 80%를 차지하면서 일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3사 모두 강한 우파적 논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중앙일보는 그나마 그 기조가 옅은 편에 속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기사의 논조와 기질에 있어서 거의 엇비슷한 성향을 보여준다. 지난 5년간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지나치게 괴롭혔던 언론계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신문의 기질을 보다 심층적으로 천착하면 희미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다소 비겁한 면이 있는 데 비해 동아일보는 그나마 기백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독극물이고, 중앙일보는 불량식품이다."라고 말해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유시민 의원의 발언을 놓고 두 신문사의 비판방식은 상이했다. 동아일보는 유시민 의원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며 거칠게 비판했던 데 비해, 조선일보는 <동아일보가 강렬히 비판한 것>을 인용 보도했다. 오십보 백보 차이지만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미세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된다. 

  대한민국 신문 시장을 삼등분하고 있는 동아일보사의 현 편집부국장 김순덕 씨가 세계화와 관련된 책을 출간했다고 하여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목 <글로벌리스트>에서부터 대략 내용이 예상되지만, 신문이 아닌 별도의 도서로 정리된 의견을 만나는 것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리라. 예상했던 대로 저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에 대해 철저한 보수 우파적 입장을 대변하며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침투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맹렬한 글로벌리제이션의 흐름 속에서 세가지 절대조건을 언급한다. 먼저 유연성(Flexbility)이며, 다음은 적응력(Adaptability)이고, 그래서 경쟁력(Competitiveness)이라는 것이다. 이름하여 F.A.C.로 정리할 수 있는 글로벌리스트의 세가지 전략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작금의 21C가 점점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글로벌 경쟁시대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보다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경쟁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당연하고 명확한 통찰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산물인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사회에서는 경쟁만이 살 길임을 거듭 강조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활발한 경쟁이 이뤄져야 하고, 그 경쟁을 통하여 최고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 개인들에게도 철저한 경쟁을 통하여 최고의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직 '경쟁'만을 외치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현재 번영을 누리고 있는 최고의 선진국들과 선진기업들은 결코 경쟁의 논리로만 선진화를 이룩한 것이 아니다. 경쟁을 초월한 협력과 공생의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유일무이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안녕과 헤게모니는 3억의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며 공존하는 바탕 위에서 이뤄진 것이며,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 도요타는 50년 간의 노사 무분규를 이끌며 상생하며 공존하는 기업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동일한 목적과 비전을 갖고 있는 공동체간에는 건전한 경쟁과 더불어 반드시 협력하고 공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GDP 3만불을 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단언한다. 

  저자는 또한 저명한 비주류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존재감을 건드리고 있다. 올 한 해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며 장교수의 주장은 유통기한이 지난 경제학이라며 공격한다. 우파 경제학과 좌파 경제학,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배치되는 저자와 장교수의 경제관점은 현재와 과거, 예방과 진단이라는 측면에서 그 상이함의 폭이 더욱 배가된다. 저자는 현재의 경제 지형이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점점 귀결되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침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장하준 교수는 현재 선진국들의 과거 경제 선진화의 역사는 그들이 현재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시장논리와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시장적인 요소가 상당했음을 언급했다. 더불어 이는 이미 선진화를 누린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이익과 계산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장교수가 자신의 논지를 객관적인 사실과 정확한 데이터를 통하여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 데 비해, 저자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만을 반복할 뿐이어서 경제 부분에 대한 둘 사이의 수준 차이를 목도한다. 장하준 교수가 몇 수 위라는 얘기다. 

  저자의 주장 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한가지 소개한다. 글로벌리제이션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저자의 주장이 사뭇 흥미롭다.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여성후보 세골렌 루아얄이 패배한 것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저자는 아직도 여성들은 미모, 부드러움, 모성 등의 여성적 아이콘에 갖혀 있다고 주장한다. 이젠 더이상 여성성에 구속된 여성지도자는 국가에 필요치도 않으며, 국민이 원하지도 않는다고 거침없이 설파한다. 공감가는 논설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여성들은 흔히 남성우월적인 편견과 제도로 인하여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 기회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관대한 여성우대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성공한 여성'이 적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현재 97개국에서 정부 직책에 여성 쿼터제를 두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따지면 여성 각료는 14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 의원도 17퍼센트 정도다. 이는 제도와 편견의 문제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여성성 안에 구속되어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여성 자체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오른손엔 남성성을, 왼손엔 여성성을 쥔 능력 있는 여성만이 글로벌 시대의 전사(戰士)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동아일보 출신답게 거칠고 과감한 문체로 글로벌리제이션을 논하는 저자 김순덕 씨는 다양한 사회적 담론들을 관통한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와 12·11 중국의 WTO 가입, 이 두가지 사건이 21C 세계화의 문법을 바꿔 놓은 것에서부터 세계화 시대를 위한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거칠면서 유쾌한 활자로 논지를 피력한다. 마치 조중동의 평소 기조를 옮겨 놓은 듯하면서, 한나라당의 정책집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신자유주의 노선의 예찬이자, 보수 담론의 연장이라 할 만하다.  

  2008년 2월 25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실용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한 시장주의 노선을 천명한 바 있다.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며 각종 규제의 철폐와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작은 정부를 구축할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시장 친화적인 노선은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될 듯 싶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화의 문법이 바뀌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맞서 과연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더욱이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떤 글로벌리스트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는 비단 내년에 취임할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 각자가 모두 가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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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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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내게는 소박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간절하고도 특별한 꿈이 있다. 신께서 가장 최초로 만드신 공동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세상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을 건설하는 것이다. 행복하고, 안정감을 얻고, 평온하고, 쉼을 누릴 수 있는 곳, 바로 <가정>이라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공동체를 <행복>의 수식어로 완성하고자 하는 꿈, 다시 말해서 작은 천국이라 할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내 꿈의 실체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한 가정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보다 구체적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수많은 아동심리학자들은 안정감있는 양부모 아래서 평온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다. 부유하거나, 가문이 좋거나, 구성원이 많은 것이 아닌, 아빠와 엄마가 싸우지 않고 아이들 앞에서 언제나 안정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에 대한 정갈한 정의라는 것이다. 비록 돈이 없다 할지라도, 가문이나 뼈대가 특출나지 않더라도, 몇 대에 걸친 많은 구성원이 함께 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양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절대로 싸우지 않으며 담대하게 서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의 일차적 요건이라는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2006년 한국 문단은 그녀의 해라고 할 정도로 찬란한 활약이 돋보였던 작가 공지영은 신작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성이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비일반적인 가족의 얘기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 투영시켜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세 번의 이혼 경력을 지닌 엄마, 각기 다른 아빠를 둔 세 명의 성이 다른 아이들, 유명 작가를 엄마로 둔 자녀들의 고심 등의 평범치 않은 특별한 가족상을 통하여 가족의 의미와 부모의 존재감을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게 얘기한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의 역사는 가족의 의미를 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경직된 의미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지옥같은 대학입시제도와 세계 1위의 이혼율까지 합쳐진 나머지, 한국의 가족행복지수는 OECD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어쩌면 공지영이 용기있게 그려낸 자기 자신의 자전적 가족상은 공지영 개인의 고백을 넘어선, 이 땅에 수없이 존재하는 우울하고 파괴된 가족상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아빠와 엄마로부터 동시에 안정된 사랑의 영양분을 공급받는 정상적 부모 가정이 아닌 비정상적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말이다. 

  공지영이 말하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사유한다. 공지영은 소설속에서 진정한 가족의 전제조건으로 두가지를 언급한다. 가족은 반드시 <관심>과 <믿음>을 포함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내게 귀를 기울여주고 나를 믿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가족의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동일 유전자를 가진 것, 동일한 말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어떤 사물 어떤 상황에 대해서 아주 비슷한 경로로 반응하고 있는 것 등은 핏줄로만 가족의 의미를 한정하는 외연적 접근일 수 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동질감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랑의 관심과 절대적 믿음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에 웅숭깊은 가치리라. 

  제목을 탐구한다. 제목 <즐거운 나의 집>은 소설속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맞딸 위녕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문구가 아닐까? 즐거운 집이지만 가족 모두가 공감하지 못하는 외롭고 고독한 즐거움으로 비춰지는 듯하다. 가족의 의미를 함의한 <집>이라는 명사를 수식하는 소유격에 오직 자신에게만 한정된 단수형 <나의>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아닌 <나의> 집은 즐거움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동질성의 추구가 가족 구성원 모두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위녕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제목 <즐거운 나의 집>은 '아직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말하는 공지영표 가족의 의미를 간결하게 함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뛰어난 가독성으로 가벼움과 무거움, 유쾌함과 잔잔함을 교차시켜 새로운 가족의 의미에 접근하는 작가 공지영의 노력에 만족감을 누린다. 더욱이 자신의 가족사를 생동감있게 활자화한 기백과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라는 명문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용기와 고백을 부연하는 작가후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지지한다. 더욱이 내게 절대적 목표이자, 꿈의 실체인 <행복한 가정>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새롭고 특별한 각도로 접근할 수 있께 한 작가 공지영에게 나는 심히 매료되었다. 언젠가 훗날에 내 아이들의 입에서 즐거운 <우리> 집이라는 명문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때에는, 이 소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지 않을까, 하는 흐뭇한 상상을 하면서 읽은 후의 좋은 느낌을 재확인한다. 

 

행복이란 건 말이다. 누가 물어서 네,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란다. 그건... 죽을 때만이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거야. 살아온 모든 나날을 한 손에 쥐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지.   <p. 105>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 세상에는 많은 서열이 있고 많은 점수가 있어. 네가 잘하는 것, 그래서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것 그걸 하면 돼... 대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p. 224>

그런데 수화기 너머 아빠를 느끼고 그리고 머릿결로 엄마의 손길을 느끼는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을 체험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p. 305>

성모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냥,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모성의 완성은 품었던 자식을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p.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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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윤석전 지음 / 연세말씀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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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게 된다. 그분의 신성은 물론, 일하시는 방법과 스타일, 그리고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깊이있는 학습이 가능하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알게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실행하시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철저한 <하나님중심주의>의 기본적 토양 위에서 <인간중심주의>라는 나무를 세우시면서 당신의 작정을 완성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분의 성품이요, 그분의 방식이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항상 인간과 함께 일하신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지 않았다면 홍해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요, 다윗이 용기있게 나서지 않았다면 골리앗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며, 베드로의 설교가 없었다면 한 번에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역사를 작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실행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그런 이적의 도구로 사용된 존귀한 존재가 인간이란 사실 또한 자명하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쓰임이라는 오묘한 조화와 연합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윤석전 목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사용하시는지를 설교한다. 총 아홉 개의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님의 용인술을 설파하는 윤 목사는 결국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 귀결하여 정리하고 있다. 비록 말을 못한다 할지라도, 리더십이 형편없다 할지라도, 추진력이 부족하고 아는 것이 미흡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에서도 언쟁과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목사를 위시하여 교회 내의 수많은 조직구조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파생된 작은 권위들의 유기적 생명체라 할 수 있다. <토론>보다는 <순종>이, <지시>보다는 <섬김>이 필요한 것이 교회 조직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면 개인의 달란트를 확인하려는 문화가 팽배한 느낌이다.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순종하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아니라, 자신을 부각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며 상호간에 토론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세상적인 리더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은 세상적 리더십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십에 대한 분별력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결과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교회를 다니면서 매번 확인하는 것은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못난 사람이 아니라 잘난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못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잘난 것이 문제가 된다. 그 잘남들의 부딪힘과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분란이 일어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용인술을 보라.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끄시어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말 못하는 사람 모세를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출애굽하셨고, 양치기 소년이었던 한 집안의 막내 아들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시작하셨으며, 예수를 지나치게 핍박했던 자를 선택하시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족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연약함 안에서 당신의 찬란한 계획의 불꽃을 준비하신다. 말과 외모와 가문과 지식 등의 외연적 겉치레가 아닌 오직 <중심>만을 보시는 하나님, 바로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용인술의 실체다. 

  마치 주일 예배의 설교처럼 무겁고 깊이있게 설파하는 윤석전 목사의 가르침은 이 시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를 웅숭깊게 정리한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이라는 절대 명제를 부여잡고, 겸손하며 섬김으로 일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사원칙을 재확인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현현(顯現)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담고 있는 자를 찾고 계신 것이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리더십이 존재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작정과 섭리는 불변하다. 이는 하나님의 용인술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령에 충만함을 입은 자, 바로 그런 사람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하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사권에 침투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소중히 쓰임을 받는, 그리하여 먼 훗날 면류관으로 보상받는 소망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갈 뿐이다.
 

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절대 복종하며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과감하게 복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즉각 움직이는 사람을 쓰십니다. 내일로 모레로 미루는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p. 37>

우리는 꿈이나 환상, 직감에 매달리지 말고 언제나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내 영감이라도 성경과 다르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견고한 터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p. 56>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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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 행운의 절반
스탠 톨러 지음, 한상복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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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확실히 깨닫는 게 한가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십 대 중반 전까지는 돈이나 능력, 리더십, 자신감 등이 좋은 삶을 이루기 위한 일차적 요소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연차가 늘어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난관에 자주 봉착하면서 행복한 삶의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부(父)와 모(母)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완성된 우리의 형체는 10개월 동안 모성의 몸 속에서 발육기간을 거친 후 때가 되어 자궁문을 박차고 세상에 등장한다. 엄마의 몸 속에서 성장하는 10개월의 작은 우주는 사회적인 동물로의 학습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어미로부터 공급받는 영양분과 심리적 영향을 수용받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수동성에 구속된 약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10개월이 지나 어미의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는 수많은 인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 그 첫 발을 디디게 되는 것이다. 

  작년 한 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 중 하나인 『배려』의 저자 한상복 씨는 새로운 자기계발 우화를 들고 나타났다. 스탠 톨러가 집필하고 한상복 씨가 옮긴 『행운의 절반 친구』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잔잔한 우화 속에서 그려놓고 있다. 삶에서 쉽게 만나고 끊임없이 교제하는 <친구>라는 존재를 주제 삼아 진정한 친구의 의미와 바람직한 대인관계의 모범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하고 있다.  

  상당히 『배려』틱하며, 지나치게 『청소부 밥』스럽다. 광고회사의 광고팀 팀장 조 콘래드가 커피숍 주인인 맥 달튼을 만나면서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이다. 삶의 소중한 진리들을 들려주는 멘토를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한다는 점에서 『청소부 밥』의 구조를, 이기주의를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과 정성으로 대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배려』의 내용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전형적인 '위즈덤하우스'식의 인간계발우화는 책의 구조와 내용의 측면에서 적지않은 진부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역시나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내용의 진부함을 압도하기에 식상한 느낌은 금새 소멸된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내 주변을 돌아본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친구가 아닌, 심장을 나눌 수 있는 진심어린 친구가 과연 내게 몇이나 있을까를 생각한다. 조건과 효율의 개념이 아니라 진심과 평안의 정의로 소통하는 친구, 전두엽과 이성이 아니라 심장과 감성으로 교제하는 친구, 그런 친구의 숫자를 카운팅한다. 더욱이 과연 나 자신은 내 베스트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타성을 갖고 대했는지를 반추한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알고, 좋은 친구가 좋은 나를 만드는 것을 알며, 성공한 자의 공통분모는 사람이었다는 진리를 이미 <이성적>으로 알고 있는 내가 과연 이를 내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적>으로 누리며 살아가는지를 계속해서 사유한다.  

  최근 직장을 비롯한 수많은 행동반경에서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나친 이기심의 극대화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개인의 이기심이 다른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압박하는 모습을 볼 때에는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혐오스럽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가식과 위선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로 인해 지구는 병들고 초라해졌다. 자신의 소우주 안에 철저하게 구속되어 비겁하고 비열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이들로 인해 우주의 넓이는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일 지 모를 일이리라.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돌아본다. 

   1980년 대에는 '지능지수(IQ)'가, 1990년 대에는 '감성지수(EQ)'가 부각되는 사회였다면, 21C에 이른 작금의 2000년 대에는 '의사소통지수(CQ: Communication Quotient)'와 '공존지수(NQ: Network Quotient)'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남과 인연을 맺으며 그 관계를 잘 꾸려나가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각광받고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다시말해 작금의 사회는 의사소통이 뛰어나고 공존 능력이 비범한 자에게 사랑과 기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요즘같은 정보통신이 발달된 복잡다단한 사회에서는 거미줄처럼 얽히는 인간 네트워크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친구를 둘 것인가보다 얼마나 좋은 친구를 둘 것인가를 고민하는 친구철학이 필요하다. 따뜻하게 공감하고, 따뜻하게 소통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런 친구가 되어가는 것, 그것이 돈과 명예보다 훨씬 더 소중한 행복의 원리임을 되새기며, 핸드폰에 저장된 친구 목록을 한 명, 한 명씩 확인하는 여유를 가져본다. 그리고 행운의 절반으로서 명확하게 현현(顯現)하는 <친구들>의 웅숭깊은 존재감을 재확인한다. 
 

외로움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따지고 계산하는 데 익숙한 우리들이..   <p. 57>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네."   <p. 237>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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