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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나이의 두 자릿수 중에서 앞자리 숫자가 바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서 서른의 나이가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은 나이 또한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에 노출된 이후, 내 가치관과 사유의 폭은 이전엔 알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깨달음을 통해 수없이 넓어져 왔음을 느끼고 있다.
이십 대의 나이에 얻은 중요한 두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은 매우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의 형상을 투영시켜 설계한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존재는 신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할 존귀한 영장(長)이다. 또한 신으로부터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여성은 그 위대한 작업으로 말미암아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에 가장 근접한 사랑의 현현(顯現)인 모성애를 가진 위대한 존재이다. 인간과 여성에 대한 이 깊은 통찰을 나는 이십 대의 나이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올 한 해의 뒷부분은 여성에 대한 탐구를 농밀히 진행한 독서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처음 만난 파울로 코엘료는 신의 여성적 면모를 천착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 나를 빨려들게 했다. 또한 우리시대 최고의 여류작가 공지영은 『즐거운 나의 집』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삼아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게 했다. 더욱이 단 하루만에 빛의 속도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여성들의 삶이 존재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림으로써, 여성에 대한 깊이있는 재사유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나라인가? 지난 2001년 9월 11일, 비행기 폭탄 두 방을 얻어 맞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총알 세례를 퍼붓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들, 서산 왕조의 사람들, 아랍인들, 몽골인들, 소련인들에 이르기까지 아프간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침략의 역사였다. 더욱이 국민의 평균 수명을 43세에 묶어 놓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다섯 살도 못 살다 죽게 만들고, 어른의 70퍼센트가 문맹에 평균 소득 200달러인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의 인권이 참혹하게 말살되어 아프간에 사는 여성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과 가난과 비인권의 세계에서 아프간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현대사를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두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관통한다.
이야기는 일반적 서사의 흐름으로 흘러간다. 순행적인 시간의 흐름과 주인공격인 두 여인(마리암, 라일라)의 교차되는 이야기를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그려냈다.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잔잔하고 일상적인 문체를 통하여 두 여인의 고난과 모성과 슬픔과 우정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서사에서 두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그녀들의 동질감을 목도하는 것에서부터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프간이라는 비극적인 세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운명, 한 남자를 남편으로 둘 수 밖에 없는 운명, 외세의 침략과 수없는 내전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운명 등은 나이와 가정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사이를 믿음과 사랑으로 연결케 하는 동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외연적인 동기 외에 보다 내면적인 동기가 관찰된다.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마리암과 라일라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우정을 쌓게 되는 본질적인 동기는 바로 <모성애>라는 여성만이 행사할 수 있는 찬란한 특권에 대한 동질성의 추구에 있다.
수없이 많은 유산으로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암에게 라일라의 두 아이 아지자와 잘마이는 동경과 흠모의 대상이다. 더욱이 딸로 태어난 아지자에 대한 마리암의 사랑과 관심은 특별하다. 피폐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아지자를 고아원에 맡길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라일라는 어미로서의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을까? 로켓포탄이 작렬하는 길거리를 해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지자를 만나기 위해 고아원으로 향하는 라일라의 발걸음은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모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여성의 원초적 모성에 공감하는 마리암의 사랑은 종국에 자신의 죽음으로써 라일라의 행복을 지켜주게 된다. 여성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과 여성으로서 갖는 모성에 대한 동질성은 마리암과 라일라, 두 여인의 웅숭깊은 우정을 존재케 하는 원동이 되기에 지극히 감동적이다.
마리암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마리암은 라일라를 폭행하는 남편 라시드를 살해한 이후, 라일라를 떠나 보내면서 자신은 도망가지 않고 한 남자를 죽인 것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지불한다. 마리암의 죽음은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여성의 행복>이 라일라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또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을 포함키도 한다. 다시말해서 마리아의 죽음은 라일라의 모성과 가정이 완성되어 행복한 결말을 도출하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한 아내로서의 양심과 책임이 오롯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여러가지 사랑의 방향이 목도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중후하게 그려지고 있는 아버지 잘릴에 대한 마리암의 방향성이 애절하다. 잘릴과 마리암이 모두 죽은 후, 라일라를 통해 드러나는 딸 마리암에 대한 아버지 잘릴의 회개와 사랑의 편지는 독자로 하여금 애절함의 극치를 자아내게 한다. 또한 라일라가 평생 마음에 심은 남자 타리크에 대한 라일라의 사랑의 방향성은 종국에 둘의 사랑을 완성함으로 마무리된다. 타리크와 라일라의 행복과 사랑의 완성은 라일라에 대한 마리암의 또다른 사랑의 완성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웅숭깊은 사랑의 진정성을 사색케 한다.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현대사를 그려낸 호세이니의 작업에 나는 적잖은 감동을 선사받았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문체와 단 하나의 아포리즘도 포함하지 않은 평범한 활자가 이토록 읽는 이의 전두엽과 가슴을 후벼놓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감탄한다. 라일라의 마음속에서 빛났던 마리암이라는 여성의 존재감이 당분간 내 마음속에서도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리라. 어쩌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세상의 모든 딸들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닌,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읽어야 할 책이리라.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별 다섯 개를 흔쾌히 던진다. 그리고 인내와 모성이라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사유하며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인다.
타리크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라일라는 이 점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우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말을 하고 싶은 충동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라일라는 그녀의 오빠들도 이랬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라일라는 남자들이 태양을 대하는 것처럼 우정을 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때, 그것의 광채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 태양. <p. 180>
마리암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녀는 이곳에 있다. 그들이 새로 칠한 벽, 그들이 심은 나무,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담요, 그들의 베개와 책과 연필 속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있다. 그녀는 아지자가 암송한 시편, 아지자가 서쪽을 향하여 절하면서 중얼거리는 기도 속에 있다. 하지만 마리암은 대부분, 라일라의 마음속에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다. <p.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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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