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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스트
김순덕 지음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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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조중동>이라는 아이콘을 낯설게 여기는 이는 드물 것이다. 조중동은 참여정부 지난 5년동안 각종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구 중에 하나다.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3대 메이저 신문은 여러가지 면에서 정부와 충돌하고 대립각을 세워왔다. 정책과 이념은 물론이요, 국가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에 있어 정부와 조중동은 5년 내내 전쟁을 불사를 정도의 싸움을 진행했다. 굳이 구별하자면 지난 10년의 정권은 좌파 정권이요, 조중동은 우파 언론이다. 정책과 노선에서 오는 논쟁은 불보듯 뻔한 일이요, 인신공격성 기사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언론과 정부와의 싸움은 수년 내내 활력을 잃은 경제에 힘들어 하는 국민들에게 주름살 몇 개를 더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조중동, 즉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3대 메이저 신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3개 신문사가 전체 신문시장의 80%를 차지하면서 일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3사 모두 강한 우파적 논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중앙일보는 그나마 그 기조가 옅은 편에 속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기사의 논조와 기질에 있어서 거의 엇비슷한 성향을 보여준다. 지난 5년간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지나치게 괴롭혔던 언론계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신문의 기질을 보다 심층적으로 천착하면 희미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다소 비겁한 면이 있는 데 비해 동아일보는 그나마 기백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독극물이고, 중앙일보는 불량식품이다."라고 말해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유시민 의원의 발언을 놓고 두 신문사의 비판방식은 상이했다. 동아일보는 유시민 의원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며 거칠게 비판했던 데 비해, 조선일보는 <동아일보가 강렬히 비판한 것>을 인용 보도했다. 오십보 백보 차이지만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미세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된다.
대한민국 신문 시장을 삼등분하고 있는 동아일보사의 현 편집부국장 김순덕 씨가 세계화와 관련된 책을 출간했다고 하여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목 <글로벌리스트>에서부터 대략 내용이 예상되지만, 신문이 아닌 별도의 도서로 정리된 의견을 만나는 것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리라. 예상했던 대로 저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에 대해 철저한 보수 우파적 입장을 대변하며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침투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맹렬한 글로벌리제이션의 흐름 속에서 세가지 절대조건을 언급한다. 먼저 유연성(Flexbility)이며, 다음은 적응력(Adaptability)이고, 그래서 경쟁력(Competitiveness)이라는 것이다. 이름하여 F.A.C.로 정리할 수 있는 글로벌리스트의 세가지 전략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작금의 21C가 점점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글로벌 경쟁시대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보다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경쟁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당연하고 명확한 통찰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산물인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사회에서는 경쟁만이 살 길임을 거듭 강조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활발한 경쟁이 이뤄져야 하고, 그 경쟁을 통하여 최고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 개인들에게도 철저한 경쟁을 통하여 최고의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직 '경쟁'만을 외치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현재 번영을 누리고 있는 최고의 선진국들과 선진기업들은 결코 경쟁의 논리로만 선진화를 이룩한 것이 아니다. 경쟁을 초월한 협력과 공생의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유일무이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안녕과 헤게모니는 3억의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며 공존하는 바탕 위에서 이뤄진 것이며,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 도요타는 50년 간의 노사 무분규를 이끌며 상생하며 공존하는 기업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동일한 목적과 비전을 갖고 있는 공동체간에는 건전한 경쟁과 더불어 반드시 협력하고 공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GDP 3만불을 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단언한다.
저자는 또한 저명한 비주류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존재감을 건드리고 있다. 올 한 해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며 장교수의 주장은 유통기한이 지난 경제학이라며 공격한다. 우파 경제학과 좌파 경제학,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배치되는 저자와 장교수의 경제관점은 현재와 과거, 예방과 진단이라는 측면에서 그 상이함의 폭이 더욱 배가된다. 저자는 현재의 경제 지형이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점점 귀결되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침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장하준 교수는 현재 선진국들의 과거 경제 선진화의 역사는 그들이 현재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시장논리와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시장적인 요소가 상당했음을 언급했다. 더불어 이는 이미 선진화를 누린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이익과 계산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장교수가 자신의 논지를 객관적인 사실과 정확한 데이터를 통하여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 데 비해, 저자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만을 반복할 뿐이어서 경제 부분에 대한 둘 사이의 수준 차이를 목도한다. 장하준 교수가 몇 수 위라는 얘기다.
저자의 주장 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한가지 소개한다. 글로벌리제이션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저자의 주장이 사뭇 흥미롭다.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여성후보 세골렌 루아얄이 패배한 것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저자는 아직도 여성들은 미모, 부드러움, 모성 등의 여성적 아이콘에 갖혀 있다고 주장한다. 이젠 더이상 여성성에 구속된 여성지도자는 국가에 필요치도 않으며, 국민이 원하지도 않는다고 거침없이 설파한다. 공감가는 논설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여성들은 흔히 남성우월적인 편견과 제도로 인하여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 기회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관대한 여성우대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성공한 여성'이 적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현재 97개국에서 정부 직책에 여성 쿼터제를 두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따지면 여성 각료는 14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 의원도 17퍼센트 정도다. 이는 제도와 편견의 문제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여성성 안에 구속되어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여성 자체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오른손엔 남성성을, 왼손엔 여성성을 쥔 능력 있는 여성만이 글로벌 시대의 전사(戰士)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동아일보 출신답게 거칠고 과감한 문체로 글로벌리제이션을 논하는 저자 김순덕 씨는 다양한 사회적 담론들을 관통한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와 12·11 중국의 WTO 가입, 이 두가지 사건이 21C 세계화의 문법을 바꿔 놓은 것에서부터 세계화 시대를 위한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거칠면서 유쾌한 활자로 논지를 피력한다. 마치 조중동의 평소 기조를 옮겨 놓은 듯하면서, 한나라당의 정책집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신자유주의 노선의 예찬이자, 보수 담론의 연장이라 할 만하다.
2008년 2월 25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실용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한 시장주의 노선을 천명한 바 있다.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며 각종 규제의 철폐와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작은 정부를 구축할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시장 친화적인 노선은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될 듯 싶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화의 문법이 바뀌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맞서 과연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더욱이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떤 글로벌리스트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는 비단 내년에 취임할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 각자가 모두 가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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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