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얼빠진 철학자 니체도 간혹 멋진 말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혐오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니체를 조망하는 내 기준에는 여러가지 복잡성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겠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위의 명언 만큼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니체의 저 문장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대변되는 '세 가지 변신'의 비유는 생성의 존재론, 위버멘쉬(초인), 영겁회귀론, 관점주의, 힘에의 의지 등과 함께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적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삶의 온갖 모순적인 면, 즉 미와 추, 고통과 기쁨, 사랑과 증오 등을 모두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오로지 삶이 유일한 가치이자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설파함으로써 쇼펜하우어가 온갖 악과 불행의 원천으로 보았던 의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초인(Übermensch, 超人)'으로 집대성되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시킨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힘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모든 세계관을 해체시킨 것과 다름없다.

    니체 식의 기독교 사멸론은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주장한 '신=인간' 도식에 비하면 그나마 세련(?)된 면이 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자의식이 절대화된 산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화 너머의 대상화로 역동적인 성장을 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지금까지의 종교가 전제해온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성'은 신의 '무한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개인의 사유에 갇히지 않고 외연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기제다. 을 주조해나가며 느끼는 인간 스스로의 제한성은 단순히 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분리되어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외연에 또 다른 무수한 주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또 다른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실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

    여기서 니체와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反기독사상의 디테일을 서술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준비과정이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언을 일반적인 시적 구조가 가진 외연적 의미로 걸러내 해석하고,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외로 걸죽한 사유의 추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니체의 언어를 反니체적 입장에서 공격해보자는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인내력의 지고함이나 희생의 숭고성이 아니다. 또한 자유를 쟁취하고 자아실현을 도구적으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근본적 웃음에서 생성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규정하며 그 해석성을 부각시킨다.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놈으로써 인간의 자기변형의 최종적 단계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어린아이가 가진 초고차원적 힘의 원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이 아닌 심연을 관통한 인간의 내재적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틀렸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총론은 현실의 다양한 각론들로부터 배반당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태도와 습성을 끊임없이 천착한다. 가끔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 가운데 은연중 드러나는 찬란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다. 그때는 잠시 소름 돋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치열한 현실을 견디는 과정과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생명력'이었다.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내재된 힘이다. 여기에 생명력이 보태지면 그것을 더욱 오롯화하고 현실세계를 천국의 자장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초월적 자유가 추동하는 신적인 생명력이 존재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니체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어린아이의 초자유적 순수성은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산물이다. 민족, 문화, 국경,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는 초월적 생명력을 소유한다. 이는 본래적이다. 니체의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가 함의한 변신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거룩한 창조성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현현되는 초월적 자기긍정의 힘은 근원적으로 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리고 경외한다. 이 놀라운 경험의 연속성은 과히 폭포수가 샘솟는 것과 같다. 니체가 '어린아이'에게 부여한 저 많은 형용사들은 곧바로 신의 찬탄스러운 속성을 압도적으로 헌사하는 반증의 도구가 될 뿐이다. 결국 니체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신을 긍정하고 경외한 것이다.

    내가 니체의 말 한 토막을 끄집어내 이렇게 장황한 글로 버무리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됨을 바로 천착하자는 취지에 있다. 인생의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한 특질에 아파하는 주변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웃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웃어야 한다. '희喜'와 '비悲'는 등가적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 웃음은 울음을 포괄한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위대한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신성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의 본질이다. 웃음은 완벽히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라는 신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인간이라면 비단 웃어야 한다. 인생의 짧고 추악함, 고단과 가난함을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저 위대한 푸쉬킨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웃어라. 신성한 긍정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현된다. 웃음은 신적 행위이자 신의 축복이다.

    웃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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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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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사태가 갈수록 험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크림반도가 난리다. 전 세계가 경악하며 연신 러시아와 푸틴을 비난 중이다. 물론 크림반도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참여한 투표를 통해 러시아 귀속을 원했다. 러시아는 자결권이라는 수사로 포장하며 크림반도에 대한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남의 나라에 군대까지 파견시키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건 어디서 얻은 명분인가.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알아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과거 구소련의 스탈린 집권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600만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당시 스탈린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체제를 만들기 위해 농민개혁을 실시했다.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은 과히 대단했다.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모조리 불태워 고의적인 기근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600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로 죽어간 것이다. 이를 제 2의 홀로코스트, 즉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실로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라 하면 치를 떨고 스탈린은 악마와 같은 존재로 경멸해오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가진 악마성은 과히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악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국가적 고의성으로 희생된 사람을 적게는 1,2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1991년 소비에트 붕괴 후 스탈린 비밀문서가 속속 공개되면서 스탈린 체제의 악질성이 여실히 증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서 구소련의 스탈린을 친구로 신뢰하고 협력했던 루즈벨트의 낙천적 태도가 악랄한 스탈린 정권의 공고화를 부추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분단도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스탈린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전체주의 체제로 꼽힌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타민족도 아니고 자국민을 스탈린처럼 집요하고 단호하게 살육한 지도자는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당시에는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속했던 스탈린의 악행이 구조적으로 묻혀버렸다. 더욱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공산유토피아의 대두로서 그에게 덮혀진 영웅적 신비성은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깡패를 잡기 위해 엇비슷한 다른 깡패의 악행을 허용한 것이다. 애당초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쓰레기 깡패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자신의 노동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하여 스탈린 체제의 지옥성을 고발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스탈린 체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처참한 단면을 극도의 세밀한 필치로 그려낸 걸작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생명력을 폭발시킨다. 작가는 참혹한 수용 생활의 일상성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양면적인 문체로 담담히 그려냈다. 과히 불멸의 작품을 인류에 남긴 것이다.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간명하다.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속성은 현실을 비틀어 픽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고발하고 천착하는 것이다. 작가 솔제니친은 반소反蘇행위를 했다는 누명으로 1945년부터 약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삶을 보냈다. 그간 자신이 겪은 고통과 어두운 세월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담은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노동수용소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토로했다.

    소설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작가 솔제니친의 분신이다. 슈호프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정부로부터 '반역죄'를 선고받고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소련 정부는 그가 이틀간 독일 포로생활을 했던 것을 꼬투리 잡았다. 반역죄의 내용은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됐으며,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한결같이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 모두 억울함으로 수용소에 갇힌 채 언제인지 모를 석방의 날을 기다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보낸다. 작가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상을 포착하면서 스탈린 체제가 수많은 약자를 억압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있음을 우회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같다. 주인공 슈호프는 하루 동안 몸이 아팠고, 요령을 피우며 작업을 했고, 감시원을 속이고 죽 한 그릇을 더 먹었고, 잎담배를 구했고, 줄칼 조각을 들키지 않고 숙소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저항하지도 않고, 탈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는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담담한 일상성 속에 녹아있는 처참한 비인간적 삶의 단면들은 이 소설이 내재한 정치적 의미를 고결한 문학성 위에서 완성시킨 작가적 역량을 대변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한 맺힌 분노, 혹은 고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문학적 목소리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삶은 위대한 작가의 정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소련 정부의 보이콧으로 수상대에는 오르지 못한다. 결국 소련의 정치체제와 타협을 거부하여 1974년에는 반역죄로 추방되기에 이른다. 2008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전체주의를 비롯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 자본주의가 가진 물신적 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으로 살았고 문학으로 저항했다. 그의 삶 자체가 문학이요, 문학은 그의 인생 전체를 휘감은 열정이었다. 솔제니친은 작가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전 인생을 통해 보여준 가장 빛나는 예였다. 그토록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며 체제에 저항했던 그가 생전에 스탈린의 향수를 공유하는 푸틴을 지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정권이었던 스탈린 체제에 대해, 보다 넓게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정치구조적 기제에 저항했던 솔제니친의 삶은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위시하여 전 세계에 도사리는 반자유적 카테고리를 향한 숭고한 일갈이다.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며 텍스트를 낭비하는 이 땅의 얼빠진 작가들에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사실을 조언하는 강력한 울림이기도 하다.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와 '문학'은 러시아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프레임이다. 러시아는 미우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러시아가 스탈린과 푸틴, 공산혁명의 나라지만, 동시에 톨스토이와 푸쉬킨, 솔제니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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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언어 - 한국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사상 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서
양동안 지음 / 북앤피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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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심한 사상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못지않은 좌·우익의 극렬한 사상 전쟁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치열한 방식으로 전개되며 국민의 삶을 옭아매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대한민국을 사상 전쟁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는가.

   물론 사상의 균형있는 대립과 절제된 토론은 건강한 사회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균형과 절제와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객관적 지식이 호도되고 역사적 사실이 굴곡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좌든 우든 극단적인 것은 반드시 악의 결과로 귀결된다. 2차 세계대전의 교훈이 명징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스탈린과 히틀러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사회에서 사상 대립과 담론 구조가 극단화되면 될수록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중용적 지성과 건강한 양심은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

   양동안 교수의 <사상과 언어>는 바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다. 용어 탄생의 역사성과 현재의 통용 상황의 국제성을 논증으로 각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알려준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지식인마저도 사상과 언어 사이의 괴리가 많은 만큼 이 책이 교정해줄 수 있는 대상은 꽤 폭넓다.

   사상과 언어는 왜 일치해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은 사물인식과 사유의 핵심적 기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성과 정파성에 유독 예민한 국내 여론의 특질을 감안할 때 사상·정치용어들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찾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힘있고 건강한 언어생활의 첫 출발은 '바른 말'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담론을 구성한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올바른 언어생활이 사회의 건강한 담론문화를 형성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대한민국 만큼 '좌파·우파'와 '진보·보수'의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회도 드물다. 그러나 문제는 좌·우파의 개념도 정확하게 모른 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매체들과 지식인 사회에서 '익翼: wing - 당黨: party - 파派: faction'로 일목요연하게 단위를 구분하여 사용되던 합리적인 정치세력 호칭법을 무시하여 사용해온 결과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진보'라는 용어가 좌익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좌익(파)=진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공식이 우리사회의 여론 구조 속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의 'liberal'을 국내에서는 'progressive'와 동일하게 '진보적'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무지의 횡행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conservatism)는 개념화가 확립되어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갖춘 사상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가능하다. 그러나 '진보주의'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의 뜻은 '보다 좋은 상태로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보편적 명사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지 어떤 하나의 객관적인 사상체계로 지칭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 저자는 이러한 오용 사례를 풍성하고 깊이있는 설명으로 바로잡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자유주의·신자유주의', '민주주의·시장경제', '반공·메카시즘', '사회주의·공산주의', '민족해방·민종민족주의' 등 국내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을 해부한다. 정치인 중에서도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와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다수인 한국의 현실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각 용어의 중요성을 감안한 순서적 배치가 돋보인다. 매 장마다 깔끔한 설명을 통해 잘 정리했다. 정치학 교수다운 저자의 흠 잡을 데 없는 기술과 객관적 설명이 강점인 책이다. '바르고 고운 말'을 위해서라도 일독이 필요한 책이다.

   어느 누구보다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분들이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력과 무관하게 지력 자체가 미달되는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사전 시험을 쳐서 합격자에 한해서만 국회의원 입후보 자격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마냥 반가운 보물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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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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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가. 왜 역사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가. 혁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혁명은 선한가. 숭고한 것인가. 요컨대 '혁명'이란 단어는 이런저런 질문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며 깊은 사유 속으로 밀어넣는 힘을 가졌다.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탁환이 '혁명'을 말한다. <불멸의 이순신>, <열녀문의 비밀>, <나, 황진이> 등 그간 역사소설로 사랑을 받아왔던 그가 조선왕조 500년 전체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거대한 작업을 위해 펜을 들었다. 김탁환의 신작 <혁명>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특유의 공력으로 '이성계-정도전-정몽주' 사이의 공통된 꿈과 이상, 그러나 분명히 달랐던 혁명의 방법론적 성격에 대해 탐구한다. 동시에 앞선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꾼 또 하나의 혁명가 이방원의 외면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의 시종을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네 인물들 사이의 공통과 대척의 내외면적 대비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증대시키는 일차적인 구조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과 정몽주는 혁명 동지다.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같은 곳을 바라봤으며, 같은 뜻을 품었다. 두 사람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이상국가, 누가 왕위에 오르든 건강하게 돌아가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려 했다.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하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였고 정몽주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체제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자 했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소설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혁명가의 대조점을 극히 절제된 내적 번민의 언어로 박진감있게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정도전이다. 정도전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일기체가 정도전 외의 인물들을 이끌어가는 편년체를 압도한다. 소설의 시공간적 시점과 사건의 전개방식은 유배지에서 혁명 과업의 디테일을 사유하는 정도전의 내면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만큼 소설 속에서 정도전의 아우라는 독보적이다. 이성계, 정몽주, 이방원 등은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작가는 주인공인 정도전을 유독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애착을 직선적으로 내뿜는다.

   그래서인지 소설 <혁명>은 인물 갈등에 있어 구도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비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혁명의 본질적인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존재감을 후퇴시킨 것이다. 본래 혁명의 균열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비에 있다.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되고 재상이 정치하는 나라,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립시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정도전 혁명'에 대한 궁극의 보이콧은 절대왕권주의를 역설한 이방원이었다. 정몽주의 죽음까지만으로는 정도전 혁명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천착하기 힘들다. 최소한 '1차 왕자의 난'과 함께 정도전의 죽음까지 다뤘다면 훨씬 더 세밀한 혁명성의 전후를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서평의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김탁환은 왜 지금 혁명을 말하고 있는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혁명은 누구를 위한 주제인가. 소설 속에서 정도전은 혁명은 '절망을 먹고 자라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어 그는 "혁명을 도모한다는 건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는 뜻일세. 지금 여기의 사람과 제도로는 도저히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확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절망에서 싹튼 혁명이 무조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정도전은 일갈한다. 혁명의 성공에는 힘이 필요하기에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혁명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혁명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들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혁명의 태동에 관한 분명한 진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반복 입증된 결론은 명징하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가진 자가 교만할수록, 사회가 부조리할수록, 그래서 그것에 '분노'하고 '실패'하며 '절망'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혁명을 원했다. 명확한 사실이다. 소설 <혁명>의 시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권,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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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복거일 엮음 / FKI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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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는 우리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自由主義者, liberalist)의 고백집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당연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를 의미한다. 총 스물한 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소설가 복거일을 위시하여 <대한민국역사>의 저자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번역한 김이석 박사, 전교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명지대 조전혁 교수(전 국회의원) 등이 눈에 띈다. 공저자 대표는 복거일이 맡았다.

대부분 대학 교수로 구성된 공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각기 다른 자유주의에 이른 배경과 원인이 소개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진화적'으로 자유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주의의 허구를 학문적으로 깨달은 후 자유주의로 전향한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유사성을 파헤치며 논증한 사람도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가지각색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유주의의 숭고한 정신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집단주의의 허구를 생생하게 경청할 수 있게 된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첫 장의 서울대 이영훈 교수 편이다. <수량경제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위시하여 평소 그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녹록지 않은 내공을 갖춘 학자라는 인식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는지는 나에게 자못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학자답게 실증적인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탈했다. 그는 18~19세기 농민들의 계층별 동향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열되는 게 아니라 표준적인 경작규모의 소농 계층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한 양반가의 15~16세기 상속문서에 적힌 노비들의 수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깨달음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세밀한 실증으로 연구해가면서 그는 사적 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뼈대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교수뿐만 아니라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학문적 입장에서 범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다. 미제스(Ludwig Mises), 하이에크(Friedrich Hayek),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뷰캐넌(James Buchanan) 등 저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사상도 각 편마다 몇 토막씩 간략히 소개된다.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을 가볍게 훑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오해한다. 아마 자유주의의 밑바탕인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교권으로 속해 있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군사적 집단주의에 함몰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개별 인간에 대한 철학을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집단(공동체)'으로 묶어 사고하는 습관이 은연 중 몸에 배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서구사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밀(John S. Mill)이 주장했듯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로 구분되어 정의된다. 17~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룬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포함해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 명칭한다. 20세기가 되어 자유주의는 앞에 '진보', '질서', '신新' 등의 이름을 붙이며 그 형태와 의미를 변화시켜갔다.

21세기에 당도한 지금의 시점에서 자유주의를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토론이 불가한 보편적 통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성 속에 선언적으로 녹아있다. 문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프리드먼이 강조했듯이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런 전례가 없다. 즉 정치적 자유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새 정치'를 주장하며 신당을 창당한 모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명명했다. 그들이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19세기말 밀을 중심으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자유주의 1세대로서의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 = 사회적 자유주의, social liberalsim)'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본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 부자연 관계다. 역사적으로 용어의 혼선이 있다. 본래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정치학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20세기 들어 서구사회에 많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liberalism'의 개념은 'progressivism'과 혼용됐다. 그 결과 요즘에는 아예 진보를 '리버럴(liberals)'로 부르고 있다. 즉 'liberals'의 의미 속에 함의된 '보수'와 '진보'의 성질이 혼용되면서 복잡성을 띠어왔다. 그래서 이와 구별하기 위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용어 전환의 역사성을 전제한다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자유지상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단언컨대 나는(도) 자유주의자다. 철학적이고 체질적으로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를 싫어한다. 특히 사회주의의 원뿌리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과히 증오하는 수준이다. 숭고한 개인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어줍잖은 평등의 논리로 재단하여 결국 집합주의(集合主義, collectivism)로 귀결시키고야 마는 사회주의적 논리와 사상은 치를 떨 정도로 거리감을 둔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복무할수록 이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20세기 세계사를 유심히 탐구하다보면 '사회 역할의 강조'와 '개인 자유의 보장'은 정확히 반비례로 등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개입주의자들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사회공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플라톤과 데카르트 식으로 환원하면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와 '설계주의(constructivism)', 그리고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구조론적으로 병합된 세계다. 이러한 병합구조는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바와 같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사회의 전체주의적 기작을 생산해낸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히 증명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시 천국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위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불완전하다. 인간 이성에 대한 교만은 밀부터 뷰캐넌까지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외쳤던 경고였다. 그렇기에 개입주의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조차도 '하아비가의 전제'를 가정했던 게 아닌가. 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매우 불완전하게 본 하이에크의 입장에 동의한다. 또한 "인간의 인식은 의식의 주관적 산물이므로 인간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Immanuel Kant)의 인식론을 적극 지지한다. 인식을 '형식(능력)'과 '내용(재료)'으로 구분하여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강조했던 칸트 철학이 현대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명언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이성의 긍정과 부정을 양립시키며 경험을 통한 끊임없는 인식 능력의 발전을 주장했던 칸트의 견해는 충분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는 물론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개별 시민 모두에게 말이다.

자유주의를 이러한 칸트주의(Kantianism)의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로 꼽히는 빈부 격차, 환경파괴, 독과점, 공공재 부족 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궁핍한 자에게는 정부가 따뜻한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해줘야 하고, 기업거래에 있어 명확한 법치를 세워 독과점을 규제해야 하며, 균형을 잃고 파괴되는 환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각론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기본 철학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는 결국 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로서 내 철학은 분명하다. 내 밥은 내가 해먹는 것이고, 자식 우유는 부모가 주는 것이며, 노후는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그게 안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돌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현실의 각론에 치열하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내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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