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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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사태가 갈수록 험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크림반도가 난리다. 전 세계가 경악하며 연신 러시아와 푸틴을 비난 중이다. 물론 크림반도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참여한 투표를 통해 러시아 귀속을 원했다. 러시아는 자결권이라는 수사로 포장하며 크림반도에 대한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남의 나라에 군대까지 파견시키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건 어디서 얻은 명분인가.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알아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과거 구소련의 스탈린 집권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600만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당시 스탈린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체제를 만들기 위해 농민개혁을 실시했다.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은 과히 대단했다.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모조리 불태워 고의적인 기근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600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로 죽어간 것이다. 이를 제 2의 홀로코스트, 즉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실로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라 하면 치를 떨고 스탈린은 악마와 같은 존재로 경멸해오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가진 악마성은 과히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악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국가적 고의성으로 희생된 사람을 적게는 1,2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1991년 소비에트 붕괴 후 스탈린 비밀문서가 속속 공개되면서 스탈린 체제의 악질성이 여실히 증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서 구소련의 스탈린을 친구로 신뢰하고 협력했던 루즈벨트의 낙천적 태도가 악랄한 스탈린 정권의 공고화를 부추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분단도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스탈린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전체주의 체제로 꼽힌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타민족도 아니고 자국민을 스탈린처럼 집요하고 단호하게 살육한 지도자는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당시에는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속했던 스탈린의 악행이 구조적으로 묻혀버렸다. 더욱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공산유토피아의 대두로서 그에게 덮혀진 영웅적 신비성은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깡패를 잡기 위해 엇비슷한 다른 깡패의 악행을 허용한 것이다. 애당초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쓰레기 깡패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자신의 노동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하여 스탈린 체제의 지옥성을 고발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스탈린 체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처참한 단면을 극도의 세밀한 필치로 그려낸 걸작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생명력을 폭발시킨다. 작가는 참혹한 수용 생활의 일상성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양면적인 문체로 담담히 그려냈다. 과히 불멸의 작품을 인류에 남긴 것이다.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간명하다.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속성은 현실을 비틀어 픽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고발하고 천착하는 것이다. 작가 솔제니친은 반소反蘇행위를 했다는 누명으로 1945년부터 약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삶을 보냈다. 그간 자신이 겪은 고통과 어두운 세월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담은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노동수용소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토로했다.

    소설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작가 솔제니친의 분신이다. 슈호프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정부로부터 '반역죄'를 선고받고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소련 정부는 그가 이틀간 독일 포로생활을 했던 것을 꼬투리 잡았다. 반역죄의 내용은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됐으며,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한결같이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 모두 억울함으로 수용소에 갇힌 채 언제인지 모를 석방의 날을 기다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보낸다. 작가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상을 포착하면서 스탈린 체제가 수많은 약자를 억압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있음을 우회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같다. 주인공 슈호프는 하루 동안 몸이 아팠고, 요령을 피우며 작업을 했고, 감시원을 속이고 죽 한 그릇을 더 먹었고, 잎담배를 구했고, 줄칼 조각을 들키지 않고 숙소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저항하지도 않고, 탈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는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담담한 일상성 속에 녹아있는 처참한 비인간적 삶의 단면들은 이 소설이 내재한 정치적 의미를 고결한 문학성 위에서 완성시킨 작가적 역량을 대변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한 맺힌 분노, 혹은 고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문학적 목소리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삶은 위대한 작가의 정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소련 정부의 보이콧으로 수상대에는 오르지 못한다. 결국 소련의 정치체제와 타협을 거부하여 1974년에는 반역죄로 추방되기에 이른다. 2008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전체주의를 비롯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 자본주의가 가진 물신적 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으로 살았고 문학으로 저항했다. 그의 삶 자체가 문학이요, 문학은 그의 인생 전체를 휘감은 열정이었다. 솔제니친은 작가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전 인생을 통해 보여준 가장 빛나는 예였다. 그토록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며 체제에 저항했던 그가 생전에 스탈린의 향수를 공유하는 푸틴을 지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정권이었던 스탈린 체제에 대해, 보다 넓게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정치구조적 기제에 저항했던 솔제니친의 삶은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위시하여 전 세계에 도사리는 반자유적 카테고리를 향한 숭고한 일갈이다.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며 텍스트를 낭비하는 이 땅의 얼빠진 작가들에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사실을 조언하는 강력한 울림이기도 하다.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와 '문학'은 러시아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프레임이다. 러시아는 미우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러시아가 스탈린과 푸틴, 공산혁명의 나라지만, 동시에 톨스토이와 푸쉬킨, 솔제니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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