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얼빠진 철학자 니체도 간혹 멋진 말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혐오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니체를 조망하는 내 기준에는 여러가지 복잡성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겠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위의 명언 만큼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니체의 저 문장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대변되는 '세 가지 변신'의 비유는 생성의 존재론, 위버멘쉬(초인), 영겁회귀론, 관점주의, 힘에의 의지 등과 함께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적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삶의 온갖 모순적인 면, 즉 미와 추, 고통과 기쁨, 사랑과 증오 등을 모두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오로지 삶이 유일한 가치이자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설파함으로써 쇼펜하우어가 온갖 악과 불행의 원천으로 보았던 의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초인(Übermensch, 超人)'으로 집대성되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시킨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힘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모든 세계관을 해체시킨 것과 다름없다.

    니체 식의 기독교 사멸론은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주장한 '신=인간' 도식에 비하면 그나마 세련(?)된 면이 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자의식이 절대화된 산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화 너머의 대상화로 역동적인 성장을 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지금까지의 종교가 전제해온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성'은 신의 '무한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개인의 사유에 갇히지 않고 외연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기제다. 을 주조해나가며 느끼는 인간 스스로의 제한성은 단순히 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분리되어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외연에 또 다른 무수한 주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또 다른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실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

    여기서 니체와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反기독사상의 디테일을 서술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준비과정이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언을 일반적인 시적 구조가 가진 외연적 의미로 걸러내 해석하고,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외로 걸죽한 사유의 추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니체의 언어를 反니체적 입장에서 공격해보자는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인내력의 지고함이나 희생의 숭고성이 아니다. 또한 자유를 쟁취하고 자아실현을 도구적으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근본적 웃음에서 생성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규정하며 그 해석성을 부각시킨다.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놈으로써 인간의 자기변형의 최종적 단계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어린아이가 가진 초고차원적 힘의 원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이 아닌 심연을 관통한 인간의 내재적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틀렸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총론은 현실의 다양한 각론들로부터 배반당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태도와 습성을 끊임없이 천착한다. 가끔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 가운데 은연중 드러나는 찬란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다. 그때는 잠시 소름 돋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치열한 현실을 견디는 과정과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생명력'이었다.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내재된 힘이다. 여기에 생명력이 보태지면 그것을 더욱 오롯화하고 현실세계를 천국의 자장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초월적 자유가 추동하는 신적인 생명력이 존재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니체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어린아이의 초자유적 순수성은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산물이다. 민족, 문화, 국경,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는 초월적 생명력을 소유한다. 이는 본래적이다. 니체의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가 함의한 변신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거룩한 창조성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현현되는 초월적 자기긍정의 힘은 근원적으로 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리고 경외한다. 이 놀라운 경험의 연속성은 과히 폭포수가 샘솟는 것과 같다. 니체가 '어린아이'에게 부여한 저 많은 형용사들은 곧바로 신의 찬탄스러운 속성을 압도적으로 헌사하는 반증의 도구가 될 뿐이다. 결국 니체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신을 긍정하고 경외한 것이다.

    내가 니체의 말 한 토막을 끄집어내 이렇게 장황한 글로 버무리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됨을 바로 천착하자는 취지에 있다. 인생의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한 특질에 아파하는 주변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웃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웃어야 한다. '희喜'와 '비悲'는 등가적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 웃음은 울음을 포괄한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위대한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신성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의 본질이다. 웃음은 완벽히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라는 신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인간이라면 비단 웃어야 한다. 인생의 짧고 추악함, 고단과 가난함을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저 위대한 푸쉬킨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웃어라. 신성한 긍정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현된다. 웃음은 신적 행위이자 신의 축복이다.

    웃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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