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학계(출판계)에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해왔던 기존 번역의 권위가 과히 '혁명'적인 내용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거리다. 무엇보다 해당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이 가진 모호한 매력에 한참이나 미쳐 지냈던 나에게도 그 관심의 폭발력은 응당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김화영의 번역을 최고로 쳐왔다. 고려대 김화영 명예교수는 평생을 카뮈 연구에 몰두해왔고 카뮈 전집을 번역해냈을 정도로 카뮈 전문가다. 프랑스 현지에서 카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다. 그렇기에 국내에 수십여 권에 달하는 <이방인> 번역판 중에서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민음사판(김화영 역)을 '갑'으로 꼽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번역이 오류투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한 <이방인>은 이정서(필명) 씨에 의해 번역됐다.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도 역자가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던 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역자 이정서 씨는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엉터리인지 구체적으로 공박해왔다. 주변에서 노이즈 마케팅이 아이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올린 글과 신문의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면서 논리의 세밀함과 논증의 설득력이 녹록지 않은 수준에 있어 쉽사리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정서 씨는 기존 번역을 비판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방인>에 대한 기존 독자들의 해석적 통념은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뫼르소의 모호한 항변은 그 어처구니 없는 반논리성으로 인해, 소위 '부조리不條理'로 대변되는 20세기 문학 역사상의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부조리 문학의 창시자로서의 카뮈 문학의 거대한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서 씨는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랍인의 칼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조리적인 살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건을 오독한 김화영 교수의 잘못된 번역 때문에 한국 독자들이 수십 년 간 <이방인>을 오해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자의 말을 통해 <이방인>이 "어느 한 문장 이해되지 않는 곳도 없는, 완벽한 소설"이라고 결론내린다. 계속해서 "이제 경험해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카뮈의 '이방인'은 서너 시간이면 다 읽고 감탄할 소설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 국내에 형성돼왔던 <이방인> 해석에 대한 복잡성과 보편성을 재단하고 있다. 즉 김화영 교수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자신만의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방인>의 문학성은 법정에서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리고 타인들(독자 포함)의 몰이해 사이의 압도적인 긴장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는 뫼르소의 살인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며 불합리·불가해·모순으로 인도되는 이 소설의 핵심 사유이기도 하다. 즉 뫼르소의 살인동기가 '강렬한 태양'인지 '아랍인의 칼날'인지는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양립 불가능성의 단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번역 논쟁은 언어와 해석이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 <이방인>에 대한 궁극의 도전이다.

   문학에서 번역과 해석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계를 가진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사를 해석의 관점에서 통일시켰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작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그러나 이를 번역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해석의 주관적 완결성은 독자와 비평가의 권리이다. 역자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번역의 지엽적인 기능으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역자는 본질적으로 작가의 입장에 있어야 한다. 작가적 의도를 관통하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야말로 최고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가장 주요한 출발은 '작가적 객관'인 것이다. 역자의 주관과 개성은 그 다음이다. 이번 번역 논쟁을 바라보는 독자와 출판계의 시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이정서 씨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김화영 교수는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 문학과 관련된 이런 식의 논쟁은 독자에게는 땡큐요 선물이다. 텍스트를 비틀고 뒤집어 봄으로써 하나의 문학작품을 과히 입체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 불문학계 최고의 석학이자 대학자로서 김 교수는 성실하게 본인의 학문적 견해를 피력해주기를 바란다. 듣보잡인 익명의 번역가가 도발적인 방식으로 본인이 쌓아올린 학문적 권위에 도전한 것 자체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학자는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하는 법이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전범이 아니었던가.

   김 교수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의 번역으로 수없이 읽고 느낀 <이방인>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방인>을 통해 내 젊은 시절의 불가해한 고민과 아이러니한 모호성을 녹여냈다. 카뮈가 제기했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용솟음치는 반증적 열정을 통해 세계 속에서 내 실존의 현재상을 살폈던 것이다. 나에게도 김 교수의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정말 반갑고 기대되며 재미있는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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