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기에 이웃들과 나누며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이고자 한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영업은 인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간혹 매출, 수금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냉정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장부가 맞지 않는 문제는 꽤 악질적이다.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급사와 주문사 사이에 잔액이 맞지 않으니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은 평소에 좋은 관계를 가져온 거래처와 논쟁이 발생했다. 그 거래처와는 오래전부터 3,630원의 장부상 잔액 차이가 발생해왔다. 그랬기에 업체 측에서는 딱 그만큼의 차액을 제외하고 결제를 해왔다.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서 오랫동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업체 측에서 금년부터는 서로 간의 장부상 일치를 깔끔하게 정리하자고 나선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품의를 득해서 자사 잔액에서 3,630원을 떨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업체 측 장부와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업체 측도 3,630원을 함께 떨군 것이다. 팩스로 보내준 반품전표를 업체 측도 그대로 장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차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업체 측 회계담당자는 이 간단한 수학적 상식을 이해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 측에서 반품 전표를 처리했으니 그 전표대로 자기네도 함께 처리하는 게 맞다고 오히려 역성을 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황당했지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업체 담당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2011년 거래이력부터 보자며 그간 3년 간의 장부를 전부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결제를 할 수 없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까무라쳤다. 우리회사 여직원은 뒤로 자빠졌다. 내 직속상관은 경악했다. 업체 회계담당자의 무지와 고집으로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무려 한 시간을 소비하며 에너지를 낭비했다. 바쁜 가운데 무더운 날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거래처 회계담당자의 기초적 무지와 오만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기의 수준과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지각으로 보는 세계가 참 세계라고 생각하는 우를 쉽게 범한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개별성의 영역을 자신만의 객관화로 색칠하여 재단한다. 정작 진리의 영역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지 좋아>에서 외쳤던 것처럼 진리의 구분선을 조롱하며 허투루 흘려보낸다. 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발생된 무지의 결과로서 인류 역사를 불행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현대사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시대였다.

   어떤 사람은 무지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지와 행이 모두 마음의 활동으로서 하나라는, 즉 지식과 행위에 대한 근본 명제를 불러일으킨 양명학의 논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는 지행합일설은 무지에 대한 기초적 해석 뒤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지란, 구조론적 본질로서의 무지, 즉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체계적인 무지를 일컫는다.

   물론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순수하게 모르는 것 자체가 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형성된 '구조적 무지'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제대로 된 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본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를 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정신과도 직통으로 연결된다. 자사子思가 자신의 명저 《중용》에서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가르친 중용의 개념은 산술적인 의미로서의 '가운데'가 결코 아니다. 중용은 시 속에서 중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의 전체를 다 안 뒤의 시간적 선택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총량을 가늠하고 그중 시대와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을 뽑아내는 능력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와 중용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앎이란 항시 겸손과 짝이 되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자신의 앎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의 토대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존경받는 지식인은 항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과 성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훌륭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상대의 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거래처 회계 담당자의 작태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지와 불관용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고발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을 올리며 거래처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편견의 무지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만큼은 이러한 구조적 무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강력한 도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역설했듯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달콤한 거짓이 엉성한 사실을 숨기고 편리한 불의가 불편한 진리를 가리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침묵의 미덕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만하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새삼 참과 거짓의 매커니즘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3,630원의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거래처 회계담당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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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벌써 마지막 주에 와 있다. 가정은 사랑으로 형성된다. 사랑을 먹고 살며, 그것이 잘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이 되는 게 바로 가정이다. 필자는 그간 '사랑 전도사'를 자칭하며 사랑에 대해 많은 탐구를 진행해왔다. 필자가 책을 읽는 이유 중 5할은 사랑에 대한 탐구이다. 사랑에 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책을 읽는다는 건 책에 대한 모독이자 세상에 대한 교만이다. 그렇기에 시끄러운 철학자 러셀조차도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 중 하나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꼽았던 게 아닌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모두 사랑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 그중 부부의 사랑은 행복한 가정의 핵심조건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정의 무게중심이 점차 자녀로 옮겨가고 있다. 자녀가 가정 내 대부분의 가치판단과 결정사항의 우선순위가 된다. 부부관계는 뒤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가정의 설계적 본질에 이탈된 무지몽매한 것이다. 가정은 전적으로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지탱되는 공동체다. 부모와 자녀의 영역은 공고한 부부관계 위에서만 펼쳐져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혹은 의미)도 들어올 수 없고 그 어떤 논리(혹은 가치)도 개입할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정 행복'과 '부부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네이버 사전을 검색했다.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정도의 의미로 정의되어 있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다른 사전들도 이와 대동소이한 수준에서 사랑을 풀이한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의미가 공허하다. 해석이 허전하다. '좋아하는 마음' 정도의 해석으로는 사랑이 향유하는 아름다운 복잡성을 관통하기 힘들다. 사랑은 몇 마디 말로 정의된 사전적 풀이를 통해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원천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랑에 관한 많은 책들을 탐독해왔다.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최고의 책은 단연 성경(聖經, Bible)이다. 특히 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章'으로 불리면서 사랑 탐구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디테일은 후술하겠다. 반면 사랑에 대해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책도 더러 있다. 그중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性>은 가장 가관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의 연인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면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적 텍스트로 군림했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으로 평가받는 <제 2의 성>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읽지 말아야 할 1순위 책으로 규정된다.

   내가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까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사랑의 원천적 정의를 과히 악랄한 논리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사랑을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로 구분한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의미화된 것으로서 서구 사상계 안에서 '아가페(Agape)'와 함께 사랑의 삼원성을 구성하는 용어이다. 문제는 보부아르가 이 둘을 병렬적이고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논증한다는 데 있다. 즉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따로 없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정신적인 순결만 지켜주면 되고 육체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놀랄 건 없다.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행위를 전도자적으로 보여준 예이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삶은 곧 포르노그라피였다.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비인간성을 매개로 한 허위의식에 불과했다. 여기서 보부아르의 추잡하고 거짓된 삶에 대해 구구절절 기술하지는 않겠다. 필자가 보부아르의 삶과 저작을 인용한 이유는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마적 영향력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직면했다. 길고 잔인했던 전쟁은 이전 시대의 지식과 가치관을 붕괴시켰다. 인간 실존에 방점을 둔 다양한 철학들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그 시대 청춘들의 응급실이었다. 주체와 자존을 강조하는 철학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상대주의 가치관은 양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열매를 생산해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 도덕과 양심이라는 19세기적 가치관은 붕괴했다. 보부아르의 사상과 저작도 그 연장선상 위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보부아르는 틀렸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병렬적이고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리아는 에로스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필리아는 사랑의 본질에 인격성을 부여한다. 본연의 인격적 사랑은 한 인격체에서 다른 인격체에게로 향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사랑은 대응하는 사랑이 있을 때에만, 즉 상호응수적相互應酬的일 때에만 온전한 형태로 꽃피우게 된다고 설파했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 사랑을 철저히 거부하고 상대를 오직 사랑의 목표로 삼는 이타적 사랑의 양식을 도출시킨다. 이타적 사랑이야말로 상대방을 독자적인 고유 가치를 지닌 인격자로 인정하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참 사랑이다.

   부부애夫婦愛는 그 뿌리를 에로스의 절정 속에 두고 있는 필리아다. 부부에게는 제3자에 대한 배타성과 부부만의 내밀함이 존재한다. 부부의 합일 속에서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인격적 사랑의 온전한 삼투작용이 실현된다. 이 삼투작용의 원만한 결과로서의 부부 일치가 실현될 때에 에로스와 필리아 사이의 권력 구도가 깨지고 서로를 보호하고 지탱하는 부부관계가 유지된다. 에로스와 필리아의 균형과 원만한 삼투작용은 부부 생활의 건실한 기반을 형성한다. 사랑에 '책임'이라는 속성은 필연적으로 부여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에로스에게 입체적으로 공급하는 건 필리아의 삼투성이다. 이 작동방식이 고장난 부부관계는 궁극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필리아의 연합만으로 사랑은 완전태가 될까. 다시 말해 사랑이 가진 전 우주적 포괄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말이다. 에로스와 필리아만으로는 무결점 절대선으로서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이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도 이끌 수 있는 총체적 기본 능력이다. 사랑이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방향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삶에서 결정적 요인이 된다. 에로스는 물론 필리아조차도 무오하고 완전한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다. 교묘한 자기 추구의 위험과 상대에 대한 우상화는 필리아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의 거대한 본질이 호출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가페는 에로스와 필리아의 구원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가페는 인간 능력 안에 본성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선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인간의 감각적 사랑 에로스와 인격적 사랑 필리아는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단지 그것을 건드릴 수 있을 뿐 영원히 그 안에 머물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통해서 에로스와 필리아를 넘어서 신적 생명에 부응하는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자체인 사랑이 먼저 인간과 만물에게 선물로 전달되면서 가능해진다. 성경은 아가페에 대한 주석이다. 인간에게 특별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에는 신적 사랑의 다양한 각론이 녹아 있다.
아가페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전시간적全時間的 메시지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사랑을 논하지만 그중 백미는 선술했듯이 단연 '고린도전서(Korinthos前書)'이다. 특히 13장은 아가페에 대한 세밀한 각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4절부터
7절까지가 핵심이다. 무엇보다 7절은 앞선 세 절의 내용을 종합하면서 동시에 심플한 집대성으로 마무리하는 명문장이다. 우선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⑤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⑥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⑦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 4~7절 -

 

  우리가 관심있게 볼 문장은 7절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이 문장 속에는 아가페의 본질을 관통하는 웅장한 지혜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우선 '참는다'는 말부터 보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할 때 '참는다'는 말은 단순히 인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으며'는 헬라어로 '스테고(stego)'란 말로 "감싸준다. 비밀을 지켜준다. 침묵 중에 너그럽게 봐준다"란 뜻을 가진다. 어떤 번역에는 "사랑은 어떤 것이든 덮을 수 있으며"라고 했다. '참는다'의 바른 해석은 가정에 적용될 때 적확성을 띤다. 가정은 상처를 내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곳, 다시 말해 참 사랑은 가족 간에 서로서로 실수도, 약점도, 부족함도, 허물도 덮어주고 감싸주고 기도해주고 침묵하며 기다려주는 것이다.

   둘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헬라어로 '피스튜오(pisteuvw)'란 말로 여러가지 부족함을 다 알면서도 믿어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어준다는 말은 상대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필리아와 연합되는 의미로서 상대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있어도 여전히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다. 완벽해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믿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과 연합된다. 사랑과 믿음은 서로 간에 필요충분조건한 관계로 동등 대응함으로써 독특한 관계 방정식을 성립한다. 사랑이 있는 가족은 서로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고 모든 일을 믿어주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라며"에 '바란다'란 말은 헬라어로 '엘피조(evlpi,zw)'로 단순하게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현재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또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한다. 사랑은 원칙적으로 소망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아가페를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환난을 당할 때 인내를 부여한다. 인내를 통해 인격이 만들어지고 이 인격은 곧 소망을 낳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근원적 힘은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견뎌낼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헬라어 '휘포메노'란 말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것도 아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견디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고난 속으로 함몰시키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대척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 사랑, 즉 견디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번 희생하고 마는 것이 아닌 계속적인 희생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지속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찬란한 사랑의 심연에는 '견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신약성서의 명구절까지 주석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탐색한 이유는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사랑의 정결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또한 가정의 파괴에 직면해 있는 현대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을 직시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새삼 가정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행복한 가정의 원형이 어디서부터 세워지는지를 깨닫기 위함이다. 즉 참 사랑의 숭고한 의미를 회복하고 이해하며, 각 가정 안에서 그것이 어떤 기작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도전하기 위한 것이다. 

   연인과의 순간적 로맨스를 사랑의 숭고한 포괄성에 등가시켜서는 곤란하다. 연인 사이의 감정은 총체적 사랑의 지엽적 각론이다.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가는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의 명대사는 헛소리다. 제인 오스틴은 틀렸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람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이 보다 뚜렷하고 명징한 생명력 속에서 끌어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경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아숨쉬는 주체가 되어 주인공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인간 이전의 것, 혹은 인간 너머의 숭고한 무언가가 인간 본연의 심해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신적 사랑 아가페이며, 이를 집대성하는 유일한 유토피아가 바로 가정이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한다. 가정은 필사적으로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다양한 병적 증세와 부조리 현상은 원천적으로 가정의 파괴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가정에서 얻은 상흔은 절대로 사회가 치유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인간의 전인격적 선함과 완전함을 이해하고 훈육하는 과정의 특권을 가정 이외의는 그 어떤 형태의 그룹에도 부여한 적이 없으시다. 인간은 오직 가정 안에서 인간이 된다. 이는 가정에 독점적으로 부여하신 신의 매커니즘이다. 활력있는 사회와 힘있는 국가는 행복한 가정이 폭포수처럼 샘솟는 데서 출발한다.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역시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은 외연의 공허한 형태로서의 관념적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와 필리아, 아가페의 삼원성으로 수용되는 원천적인 실재로서의 사랑이다. 부부 간 사랑의 합일은 행복한 가정의 기초 조건이다. 부부애가 결락된 '작은 천국'은 존립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곧 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는 가정에서 나온다. 사회와 국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오직 가정만이 천국이 될 수 있다. 이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각기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때, 세계는 점차 어둠을 벗고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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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공부 -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조윤제 지음 / 흐름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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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큼 계발서가 가진 구조론적 모순에 대해 차갑게 비판해온 리뷰어도 드물 것이다. 내가 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계발서의 형태적 구조가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를 예외없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러나 가끔 그럭저럭 읽어볼만한 실용서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물론 달콤한 이야기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다른 계발서와 별반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주제를 추출하는 방식과 내용을 전개해가는 수준에 있어 가볍지 않은 밀도가 포착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된다. 대개 인문학적 재료와 방법을 적용한 책들이 이들 부류에 속한다. 즉 같은 계발서라 하더라도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는 내용상의 내공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조윤제의 <말공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분명한 계발서지만 인문학적 콘덴츠를 적절히 융화시켜 꽤 괜찮은 실용서를 만들어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한 저자의 경험이 실용적인 텍스트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뻔한 얘기지만 지루하지 않게 글을 쉽고 유려하게 뽑아내는 저자의 공력이 눈에 띈다.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쉽고 실용적인 계발서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말(言語)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말 공부'라는 강력한 책 제목은 이 책이 인문학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을 홍보한다. 『논어論語』, 『맹자孟子』,『사기史記』 등 동양사상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불멸의 텍스트를 통해 '말 공부'의 각론을 훑는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고전의 가르침과 예화를 통해 관통한다.

   이 책의 매력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동양고전 속에서 한 토막의 글감을 추출하여 재미있게 버무려낸 데 있다. 본격 실용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서술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치도 않은 적정선을 잘 포착한다. 여기에 매끄러운 문장이 결합되어 책의 주제와 카테고리에 맞는 적확한 힘을 지니게 됐다. 온갖 자극적인 미사여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서점가의 대부분의 계발서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세태에 대한 시의성에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언어의 홍수 시대다. 작금의 대한민국도 소통의 중요성이 화두가 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말이 통하지 않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작게는 부부 사이에서 크게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까지, 현실 한국은 극심한 소통부재로 적지 않은 피로를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의 공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며칠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했다. 짧지 않은 분량에 눈물까지 흘린 담화였지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나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소통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담화에 엄청난 조직 개혁과 눈물의 사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은 '꼭 해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이토록 극심한 소통부재에 직면한 본질적인 원인도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데서 온 후유증이 아닐까. 청와대 참모진은 이 책을 대통령에게 추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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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이 번역 논쟁에 휘말리며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는 역자와 출판사, 댓글러들 간의 치열한 토론이 전개 중이다. 출판사의 요란한 마케팅 방법과 역자의 공격적인 논조, 즉 '태도'를 비판하는 댓글이 주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이번 논쟁의 핵심인 '번역'의 디테일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댓글도 적지 않이 눈에 띈다. 긴 연휴 기간(어린이날-석가탄신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출판사 측에서 그간의 댓글들을 일괄 삭제하기도 했지만 당분간 이 논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리뷰어로서 다양한 주관적 해석을 엿보고, 그 와중에 간주관적(intersubjective)인 것을 추출하며, 종국적으로 가장 '카뮈적'인 게 무엇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을 생각할 때 역자의 논증과 새 번역본의 가치를 깊게 탐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한계 때문에 생산적이고 학습적인 책읽기에 더욱 열정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이방인> 탐구의 선순환적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본문과 긴 역자후기 모두 꼼꼼히 읽었다. 단어와 쉼표, 어느것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세밀히 살폈다. 느린 속도는 불가피했다. 물론 모든 책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이는 평소 내 독서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에 우선하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역자(이정서)가 지금까지 최고의 번역으로 꼽혀왔던 기존 번역(김화영 역)이 오역이었다고 지적하며 강렬한 논리로 비판하고 재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자가 자신의 번역이 카뮈의 의도와 <이방인>의 본래성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치열한 정독은 불가피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힌다. 문장이 매끄럽다. 낱말의 의미를 풀어내는 일차적인 해독력은 무난하다. 딱히 막히는 부분은 없다. 번역본이 매끄럽게 읽힌다는 건 일단 장점이다. 사실 기존의 김화영 역은 매끄러운 문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유의 밀도나 표현상의 의도와 무관하게 문장 자체만으로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맞춤법, 주술 호응, 문단의 전후 맥락, 단어 선택 등에서 김화영 역은 다소 투박한 듯 읽혔고 일부분에서는 조악한 느낌마저 들었다. 최소한 가독성에 있어 김화영의 번역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두 번역본(김화영 역, 이정서 역)을 비교한 결과 단어와 문장이 주는 외연상의 어감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화영 역은 마치 교정이 되지 않은 글을 읽는 듯한 단절성의 비문을 자주 사용한 데 비해, 이정서 역은 거침없이 미끄러울 정도로 유려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일관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매끄러운 문장이 무조건적으로 옳거나 좋다는 뜻은 아니다. 번역의 핵심은 원문을 얼마나 충실히 옮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카뮈의 문체가 본래적으로 가독성과는 거리가 먼, 투박함과 불명확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한 것이라면 그 고유성을 그대로 살리는 게 제대로 된 번역이다. 어려운 건 어려운대로 모호한 건 모호한대로 오류는 오류대로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최고의 번역인 것이다.

   선술했듯이 각 사건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정서 역이 보다 높은 가독성을 가진다. 또한 주인공 뫼르소를 위시한 소설 속 주요인물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데에도 이정서 역이 명확한 입장에 서 있다. 역자 이정서 씨는 이례적으로 긴 역자후기에서 김화영의 오역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무려 58개의 오역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오역으로 규정한 문장과 문단을 세밀게 해부하며 소설 <이방인>의 개별적 각론들을 주석한다. 역자의 논증은 구체성, 성실성, 일관성에서 부분적으로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그래서인지 출판계의 잡음과는 별개로 서점에서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기존 번역을 재단하는 역자의 논거 중 핵심은 단연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동기다. <이방인>이 부조리 문학으로 불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살인 동기와 법정 태도에 있었다. 기존 번역서들은 공통적으로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태양'에서 찾았다. 그러나 역자 이정서 씨는 '칼날'에서 찾고 있다. 태양은 칼날을 수식하는 형용적 위치에 있을 뿐이다. 역자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정당방위였고 사건 전후에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진행과 사건 전개가 명징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필연성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힘을 주어 강변하기도 한다. 즉 역자는 부조리 문학으로서 소설 <이방인>이 분출해왔던 특질에 대한 기존 통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해석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이다. 김화영 교수의 오역으로 한국인들이 여태까지 <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다,는 역자의 주장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뿐만 아니라 해외의 출판계와 비평가, 독자들도 역자와 비슷한 선상에서 <이방인>을 읽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쏟아낸 역자의 논증 중에서 이에 대한 디테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사르트르의 해설을 위시하여 <이방인>에 대한 해외의 권위있는 비평과 해석에 대한 대응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역자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김화영 번역본이지만, 논쟁의 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역시 핵심은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은 역자의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역자의 정당방위 주장은 철저히 역자 자신의 '해석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 실제로 역자의 번역이나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나 뫼르소의 살인 장면에서 보이는 사건 전후의 인과적 전개과정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의 문제로 볼 사안도 아니다. 위대한 소설은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역자는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뫼르소의 행동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뫼르소 당사자의 머리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이상은 불가해하다. 시종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1인칭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뫼르소가 가진 생명력을 외면한 채 소설 구조의 형식적 기제에 해당하는 우연과 필연을 연역적으로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뫼르소가 소설 속 가상인물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생명력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필연의 프레임은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는 번역을 넘어서는 영역, 즉 열려있는 텍스트로서의 '소설적 자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개별 수용자가 가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역자는 정당방위라는 연역적 결론을 상정하고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에 구속시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번역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역자가 카뮈의 세계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비롯한 카뮈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번역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필수적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부조리는 우리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를 카뮈가 어떻게 픽션화했는지, 그리고 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와 긴장이 어떻게 부조리라는 개념을 입체적으로 천착해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꼭 필요하다. <이방인> 한 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작가로서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거리두기로 수렴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르트 개인의 해석이지만 최소한 작가와 주인공, 즉 카뮈와 뫼르소 간에 존재하는 '객관적 여백'은 분명 존재해 있는 것이다. 카뮈도 이럴진대 이정서 씨의 주장은 타언어권 번역자의 입장치고 지나치게 일방적인 면이 있다.

   양비론을 싫어하지만 김화영 교수의 침묵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논쟁의 흐름상 가만히 있어야 할 단계를 넘어섰다. 물론 새움출판사와 역자 이정서 씨의 문제제기 방식과 태도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 선술했듯이 아무리 자신의 번역에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선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 오해를 살 만했고 비판 받을 만했다. 김 교수로서는 불편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논쟁의 핵심은 번역의 질이다. 어떤 번역이 카뮈와 <이방인>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정서 씨는 집요하고 일관되게 기존 번역의 오류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왔다. 또한 김 교수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응답은 없다. 개정판에 참고하겠다는 말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 중이다. 지식인의 참된 실력은 질문을 대하는 태도와 실력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성실한 답변은 지식인이라면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는 게 위대한 학자의 태도다. 이런 차원에서 김 교수의 적절한 답변을 기다리는 독자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이번 번역 논쟁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 하나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반으로 텍스트의 해석은 개별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심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내 책읽기의 부끄러운 현재상을 직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식이 있었다. 그랬다. 고백컨대 난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카뮈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를. 쉼표 하나도 무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뒤늦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새 번역본, 이정서 역)이 나에게 준 선물은 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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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bal 2014-05-2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관적으로 쓰시려고 노력은 하신 것 같습니다만...

김화영에 대한 공격이 시정잡배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언 수준이라... 오로지 김화영을 매장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눈에 핏발 세우고... 그렇게까지 안해도 충분한 일이고, 오히려 더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인데...

문화, 출판 종사자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금도는 지키면서 사업을 했었는데, 이정서에 오면서 그런 금도가 최초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글을 쓰시면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는 셈이 됩니다.

정당방위인데 번역이 잘못 되어서 몇십년 동안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정서가 주장하고 대대적으로 마케팅하였는데, 이제 정당방위는 아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고...

정당방위가 잘못되었다는 반론에 이정서는 일체 재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 주장은 소설의 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엉뚱한 주장이고, 세계적인 코메디라 할 것입니다. 재반론을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잘못된 정당방위 주장에 사과를 하여야할 것입니다.


김화영의 반응은 그 다음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덧글을 달았더니, 고압적으로 글쓰지 말라고, 명령까지 하더군요. 부정적인 덧글, 리뷰글이 우리 문화계에 아주 안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훈계까지 덧붙여서.... 자기네는 아예 김화영을 물고뜯기를 살떨리게 하였으면서 말이죠... 정상적인 출판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전직 조폭들이 모인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윗 2014-05-21 10:12   좋아요 0 | URL
요청드린 마지막 문장 삭제는 바로 해주셨군요. 빠른 피드백, 고맙습니다.

서평에 기술했듯이 저도 이번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님은 제가 결과적으로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학문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예의와 태도를 보다 중요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정서 씨의 논리가 갈팡질팡하고 있고 궤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내용조차도 점차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제 서평이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님이 제 글을 잘못 읽으셨거나 제가 글을 잘못 쓴 것입니다. 글을 쓴 리뷰어로서 본 서평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각인해둡니다.

제가 이번 번역 논쟁을 보면서 경계했던 건 '불관용'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출판사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댓글 토론도 출판사측의 일괄 삭제로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댓글을 삭제하고 통제하며, 더욱이 법적 소송까지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첨예한 문제를 토론하다보면 나와 다른 너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인정하는 전제로부터 토론은 출발해야 한다고 보는데, 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상당히 씁쓸합니다. 물론 입장을 바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정서 씨와 일부 댓글러들 간의 싸움을 보면서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했던 저 같은 미천한 독자는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하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비통한 마음으로 루터파와 교황파에 관해 말했듯이,"말과 글의 전쟁이 오래가면 폭력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정확한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새움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 논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즉 생산적인 토론의 장으로 호출할 수 있는 당사자는 바로 김화영 교수로 본 것입니다. 이황 선생이 기대승에게 보인 대학자로서의 크기를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그것을 감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김화영 교수에 대한 제 입장의 취지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분이 번역하신 카뮈 전집을 통해 카뮈를 읽은 사람입니다. 물론 님의 분노하는 마음과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jaibal 2014-05-2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 님....
감사드리며, 고견에도 감사드립니다.
 
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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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불특정다수가 읽는 서평이기 때문에 존칭은 생략)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 있을까. 동시에 많은 욕을 받은 정치인이 또 있을까. 지극히 나이 드신 분을 제외하고 한 번쯤 좋아했을 법한 정치인이 바로 노무현이다. 좋아할 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졌고 동시에 실망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존재했다. 그가 서거한 지 어느덧 5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영화 <변호인>으로 그를 재인색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만 최근의 어지러운 시국 탓도 있겠다. 그 어느 때보다 주변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많이 회자된다.

<그가 그립다>는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수필집이다. 노무현 5주기 추모집의 성격을 띤다. 많은 저자들이 참여했다. 자칭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었던 작가 유시민을 위시하여 총 22인의 글을 담았다. 집필에 참여한 22인의 이력은 가지각색이다. 작가, 평론가, 교수, 방송인, 연극인, 이발사, 요리사 등 우리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다양한 빛깔을 담았다. 한 권의 소설집처럼 독립된 에세이들은 주제와 문체가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개별성을 가진다.

그중 몇몇 글이 눈에 띈다. 당선 전부터 인연이 되어 청와대 전속 이발사와 요리사가 된 두 저자의 글은 순박하고 따뜻해서 좋다. 이들의 글은 재임 당시 권위와 허례허식 없는 노무현의 소박한 인간미를 잘 소개한다. 특히 퇴임하는 날 함께 기차를 타고 사저로 가는 도중에 필요한 도시락을 준비한 요리사의 애틋한 일화는 훈훈하고 애잔하다. 결국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실린 글이 모두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몇몇 저자들은 이 책의 존재목적인 노무현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아닌 개인의 정파적 입장을 토로하는 함몰성을 보인다. 곱게 읽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저자 중 어느 정신 나간 교수는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국민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대통령이었고, 그로 인해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책을 읽고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는 명확한 진리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한 능력과 잠재력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진다.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도 우리사회는 역사와 인물을 천착함에 있어 극단적인 진영주의에 함몰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동시에 놓고 입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지력과 판단력이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을 완전무결한 신의 연역성 위에 올려놓고 모든 비판과 반론을 굴곡시키는 행태는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도 옳지 않은 짓이다.

나 또한 노무현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과 한계까지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가진 명암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거리두기가 결여된 정치인 팬클럽은 교조적 신격화의 경향을 띠게 되고 종국적으로 보편 국민과 반대세력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은, 노무현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한다.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한 얼빠진 교수의 지성과 현실인식에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사랑과 그리움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다.

내가 노무현을 좋아했던 건 그가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행동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땅의 어렵고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마치 자기 일처럼 관통하려 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과 패기를 사랑했다. 또한 그것을 뚫고 나가는 소신과 용기도 존경했다. 적어도 '좌파'를 하려면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을 가진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지고한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따뜻한 박애주의야말로 진보좌파가 가져야 할 핵심가치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 노무현의 진심과 열정을 나는 한없이 사랑한다.

물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많이 실망했고 미웠다. 그러나 그에 대한 향수는 내 가슴 한 구석의 작은 방 안에 오롯이 보관돼 있다.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우리에게 이토록 인물이 없는가 하는 푸념을 하게 될 때, 가끔 나는 가슴속 작은 방 안 노무현의 얼굴을 그린다. 신간 <그가 그립다>는 이 그리움을 애틋하게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몇몇 저자의 정신 나간 주장으로 맥이 빠지는, 그래서 부득불 선택적으로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책이다.

그러나, 나도, 노무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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