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소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에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강의 주제는 '청년의 본질'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20세기 현대사를 넘나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강의는 계획된 시간보다 꽤 많이 초과됐다. 그러나 청년들은 마지막까지 잘 따라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청년들에게 역설했다. 청년시기에 올바른 지식과 건강한 사랑, 올곧은 비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식'과 '사랑'과 '비전'은 청춘을 빛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며 그 시기 젊은이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성인의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시간 관계상 사랑과 비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그날은 청춘이 가져야 할 지식의 성질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구조적 무지와 같은 악의 평범성에 귀속되지 말 것을, 또한 중용을 파괴하는 편향된 지성에 함몰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나 아렌트가 설파했듯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악의 평범성을 생산시키는 귀속적 기제다. 젊은 시절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무지는 훗날 건강한 어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기대는 것은 일시적이고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청춘의 본질은 아픔에 있지 않다. 청춘은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다. 청춘과 어른 사이의 시간차는 청춘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증거다. 어른이라는 실존은 청춘의 본질을 규정한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진다. 청춘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이는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진정한 어른의 생으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게 용서됐던 상처와 실수가 무조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의 내내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솔로몬 등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두들겨 깠다. 쓰레기 같은 삶과 사상을 남긴 과거의 인물을 천착하며 청년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삶은 피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달콤한 말로 선동한 이데아idea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다른 곳'의 숭고한 비밀을 아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곳의 비밀을 경탄하며 그것을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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