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기에 이웃들과 나누며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이고자 한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영업은 인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간혹 매출, 수금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냉정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장부가 맞지 않는 문제는 꽤 악질적이다.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급사와 주문사 사이에 잔액이 맞지 않으니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은 평소에 좋은 관계를 가져온 거래처와 논쟁이 발생했다. 그 거래처와는 오래전부터 3,630원의 장부상 잔액
차이가 발생해왔다. 그랬기에 업체 측에서는 딱 그만큼의 차액을 제외하고 결제를 해왔다.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서 오랫동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업체 측에서 금년부터는 서로 간의 장부상 일치를 깔끔하게 정리하자고 나선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품의를 득해서 자사 잔액에서 3,630원을 떨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업체 측 장부와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업체 측도 3,630원을 함께 떨군 것이다. 팩스로 보내준 반품전표를 업체 측도 그대로
장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차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업체 측 회계담당자는 이 간단한 수학적 상식을 이해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 측에서 반품 전표를 처리했으니 그 전표대로 자기네도 함께 처리하는 게 맞다고 오히려 역성을 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황당했지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업체 담당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2011년 거래이력부터 보자며 그간 3년
간의 장부를 전부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결제를 할 수 없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까무라쳤다. 우리회사 여직원은 뒤로 자빠졌다. 내 직속상관은 경악했다. 업체 회계담당자의 무지와 고집으로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무려 한 시간을 소비하며 에너지를 낭비했다. 바쁜 가운데 무더운 날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거래처 회계담당자의 기초적 무지와 오만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기의 수준과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지각으로 보는 세계가 참 세계라고 생각하는 우를 쉽게 범한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개별성의 영역을 자신만의 객관화로
색칠하여 재단한다. 정작 진리의 영역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지 좋아>에서
외쳤던 것처럼 진리의 구분선을 조롱하며 허투루 흘려보낸다. 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발생된 무지의 결과로서 인류 역사를 불행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현대사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시대였다.
어떤 사람은 무지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지知와 행行이 모두 마음의 활동으로서 하나라는, 즉 지식과 행위에 대한 근본 명제를 불러일으킨
양명학의 논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는 지행합일설은 무지에 대한 기초적 해석 뒤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지란, 구조론적 본질로서의 무지, 즉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체계적인 무지를 일컫는다.
물론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순수하게 모르는 것 자체가 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형성된 '구조적 무지'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제대로 된 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본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를 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정신과도 직통으로 연결된다. 자사子思가 자신의 명저 《중용》에서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가르친 중용의 개념은 산술적인 의미로서의 '가운데'가 결코 아니다.
중용은 시時 속에서 중中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의 전체를 다 안 뒤의 시간적
선택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총량을 가늠하고 그중 시대와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을 뽑아내는 능력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와 중용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앎이란 항시 겸손과 짝이 되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자신의 앎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의 토대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존경받는 지식인은 항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과 성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훌륭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상대의 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거래처 회계 담당자의 작태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지와
불관용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고발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을 올리며 거래처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편견의 무지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만큼은 이러한 구조적 무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강력한 도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역설했듯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달콤한
거짓이 엉성한 사실을 숨기고 편리한 불의가 불편한 진리를 가리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침묵의 미덕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만하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새삼 참과 거짓의 매커니즘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3,630원의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거래처 회계담당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