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필자는 중등부 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주제는 「이성교제와 성性」이었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딱히 관심이 가거나 실제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주제임은 분명했다. 교회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꽤 높은 수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시각을 넘어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다. 이 칼럼은 어제 세미나를 통해 느낀 필자의 단상을 글로 추린 것이다.

   불신자(non-Christian)들이 갖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기독교는 성을 배척한다는 생각이다. 이 불편한 오해는 성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거룩성'과 동일한 의미로 여기는 오류를 발생시켰다. 성적 추구를 마치 불신앙의 양태인 것처럼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는 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나님은 성에 대한 인간의 후퇴와 외면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부부夫婦'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 사랑의 연합은 부부관계라는 절대불변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 성 사상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비극이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그중 성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당일 만난 남녀가 아무 조건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하는 게 가벼운 놀이처럼 되어 있다. 혼전순결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나 가야 할 처지가 됐다. 첫 성관계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성병 감염률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사랑'과 '섹스'는 더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포르노를 위시한 다양한 성적 미디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법률 제정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는 섹스 산업의 규모는 작금의 시대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에 대해 뭐라 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기 때문이다. 펄펄 끓어오르는 청춘의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만의 문화와 방식으로 성적 에너지를 불태우는 행동을 두고 일개 개신교 집사가 이러쿵저러쿵 지적한다는 건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욕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랑이라는 인간 생명력의 원초적 갈망이자 고결한 기본능력이 싸구려처럼 취급받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사실 현대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입양은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른다.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찬란한 유전자가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들끓게 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흡수한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5월 칼럼(『사랑과 가정에 관한 신앙적·인문학적 고찰』)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두들겨 까며 이 책이 끼친 해악을 지적한 바 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제2의 성>을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을 내놓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헛소리가 따로 없다. 과연 그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이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저자는 지적인(인격적인) 사랑과 육체적인(감각적인) 사랑 사이의 종속성과 삼투압성을 전제적으로 차단시키며 자신의 주관을 논증한다. 저자의 사랑관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인과 부부 간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탈구속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온전한 '자유'를 부여할 수 있고 구속성을 타파하는 열정에 복무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개소리가 따로 없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 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보부아르에게 사랑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 게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란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것과 달리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들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해 개념적으로 제시한 상대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의 디테일을 구구절절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두 철학자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부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각한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마치 대한민국이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력이 결핍됐다. 선과 악, 지식과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졌다. 프랑스 68혁명 이후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쓰레기 담론들이 21세기 한국 대학강단의 주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인문·사회과학계열 교수 중 80% 이상은 '구조주의 좌파'라고 규정한 모변호사의 외침이 결코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역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neo-Marxism)'와 살벌하게 씨름 중에 있다. 이미 8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폐기처분된 이론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지식사회와 담론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수들이 의외로 논문 표절에 많이 노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 나라 청춘들에게 일갈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분리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둘은 공히 지독한 희생과 올곧은 책임의 영역 안에서 작동·발현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절제하고 지켜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게 바로 인간의 성과 사랑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성과 사랑의 일체성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집 <향연>에서 에로스의 본질적 성격을 구명究明하고 다른 대화집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로부터 필리아에로의 이전 경위를 명료하게 거론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로스에 대한 언급 대신에 필리아에 관한 놀랄만큼 깊이있고 상세한 서술을 남겼다. 기독교는 에로스와 필리아를 그리스도적 아가페의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시하고 몰이해할 정도로 사랑 탐구의 연원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필경 악으로 귀결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이 '거짓'과 '교만'은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며 파괴다. 현실에서 지옥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든 자유가 용납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런 질서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시공간,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기에 선악과는 필경 낙원에 존재했던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 실상 이 말은 개소리다. 인생은 징징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남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청춘이기 때문에 아플 수 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비단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 할지라도 면죄받을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젊음이 가진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임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기도한다. 잊지 말라. 인간 세상의 가장 단단한 질서와 권위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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