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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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텍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시보다 산문이 좋은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시의 구조가 가진 불명확한 압축에 묘한 결핍과 피로를 가진다고나 할까. 요컨대 나에게 시는 피곤한 세계다.

   물론 시는 위대하다. 시인이 되지 못해 소설 쓰고 소설가가 되지 못해 평론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시인은 최정상의 글쟁이인 것이다.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게 관조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던 소설가들이 있다. 톨스토이도 그랬고 공지영도 그랬다. 시는 넘사벽의 세계인 것이다.

   시는 좋아하지 않지만 시인이 쓴 산문은 좋아한다. 산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인이 쓴 산문'이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실상 시인이 쓴 산문은 달랐다.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핵심적인 낱말로 문장을 구성했다. 연이어지는 짤막한 문장들로 삶과 인간과 우주에 관한 중요한 토막들을 웅변했다. 시인의 시는 별로였지만 시인의 산문은 아름다웠다. 내 수준이 딱 거기까지다.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시인이 쓴 산문집이다. 여러 삶의 단편들을 시인의 언어로 담았다. 작가는 총 51편의 산문 속에 삶과 인간에 대한 내적 담론을 녹여냈다. 시인 특유의 울림과 시선이 잘 담겨 있다. 주로 여행을 통해 추출한 여러 삶적 디테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과히 아름다운 글의 향연이다. 독자만 즐겁다.

   수록 산문 중 상당의 글들은 이미 페이스북에서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퀘렌시아', '찻잔 속 파리',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마음은 이야기꾼',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등의 글들이 그렇다. 특히 표제작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내용 중에는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는 명문장을 담아 작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오롯하게 드러냈다. 
 
   작가는 글감의 주된 소재를 여행에서 얻은 듯하다. 수록 산문의 절반 이상이 여행에서의 경험 혹은 여행이 준 깨달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이어지는 인도여행에서의 경험은 책 곳곳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작가에게 인도는 특별한 시공간이다. 그에게 인도는 명상의 나라이자 깨달음의 공간이며 시적 창작이 만개하는 곳이다. 작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장소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여행자 자신이 그곳의 혼에 닿았기 때문이다. 장소의 혼에 다가간 작가의 고결한 사랑이 정갈한 글을 낳았다. 아름다운 피드백이다.

   문학평론가 로자(필명) 이현우는 시와 소설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은 일상성에 대한 예찬이다. 하지만 시는 일상을 충돌하고 거부한다. 말랑말랑한 일상의 디테일을 시의 언어가 수렴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시와 소설의 세계는 완전 분리되어 있고 서로를 완전 배반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운명적 고립이자 위대한 고독이다. 작가가 항시 일상을 떠나 여행길 위에서 삶과 인간을 천착한 데에는 이러한 시적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오롯한 자기반영이었을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시인의 산문은 달랐다. 미사여구를 배제한 절제의 언어가 아름답다. 형용사와 부사를 자제한 담백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언어의 낭비없이 진정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담았다.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적정량의 무게는 잃지 않았다.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라는 매혹적인 문구로 띠지를 두르고 있는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지난한 일상에 지친 이 시대 모든 피로한 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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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공 - 육아 100단 엄마들이 오소희와 주고받은 위로와 공감의 대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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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여행작가 오소희가 신간을 냈다. 기존의 여행에세이와는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육아 100단 엄마들이 오소희와 주고받은 위로와 공감의 대화'라는 인상적인 수식어구를 전면에 배치한 <엄마 내공>은 엄마와 여자 사이에서 존재론적 번민에 빠져 있는 이 시대 모든 엄마들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 오소희는 이 얇은 에세이를 통해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아이를 양육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공유한다.

   이 책이 다른 육아집과 구별되는 지점은 저자 혼자만의 설명이 아닌 여러 팔로워들과의 교류과 공감에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 많은 고민과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여러 이웃의 조언과 경험담이 댓글로 달린다. 이를 저자가 종합적으로 조화하고 조정하면서 각 주제에 대한 '엄마론'은 갈무리된다. 신간 <엄마 내공>은 이러한 연대의 방식으로 현실 엄마로서 가지는 실제적인 육아 고민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네 개의 큰 주제에서 총 27개의 질문을 뽑았다. 사교육, 대안학교 등의 눈에 보이는 현실의 영역부터 관계, 관심 등의 보이지 않는 정서적 영역까지 크고 작은 육아적 담론을 관통한다. 육아라는 분명한 카테고리를 주제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존의 에세이적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책 곳곳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선술한 바와 같이 일방적인 설명이 아닌 서로 간(팔로워-저자)의 위로와 공감의 소통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통계와 해외적 사례를 제시하며 일방적인 정답을 제시하는 기존의 육아집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저자 특유의 유려한 문체 만큼이나 아름다운 경험이 뒷받침된 데 있다. 저자는 아들 중빈이 36개월일 때부터 터키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 경험은 저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중빈에게도 그대로 흘러내려 지금의 중빈을 만든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여행의 기계적 기능보다 내재적 과정에 중심을 두는 저자의 여행관은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글을 추출하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저자의 작가적 힘은 이번 신간에서도 유감없이 발현하고 적용됐다. 저자에게 있어 '삶', '여행', '육아'는 본질의 영역을 공유하고 피드백하는 '연결된 우주'인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특히 공교육의 초점이 오직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를 성공으로 이끄는 요건이다"라는 얼토당토않는 말이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이 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교육담론은 많은 부분 고장 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올바른 육아의 원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반추하는 여러 엄마들의 대화는 아름답고 찬연하다.   

   저자는 과거 자신의 첫 에세이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고마움을 배운다는 것과 동의어다"라고 육아를 멋지게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 아이를 키울수록 나 자신은 점점 더 낮아진다는 걸 느낀다. 어떨 때는 낮아질대로 낮아져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나의 최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결코 비루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극한의 최저점에서 객관화된 '참 나'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나의 감추어진 이면을 발견하는 건 경이롭다. 요컨대 아이는 부모로 하여금 삶과 우주를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숭고한 동기이자 신의 선물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를 만난 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책만을 좋아했던 총각시절이었다. 그와 나는 작가와 독자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사석에서 내게 사랑을 찾는 용기에 관해 조언했다. 이후 나는 내 사랑을 다시 찾았고 결혼에 골인했으며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나를 터키와 라오스로 안내했고, 아프리카와 남미로 데려갔으며, 사랑을 가르쳤고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주었다. 국가적 비극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에는 감동적인 소설로 '삶은 곧 축복'이라는 걸 일깨우기도 했다. 작가적 일면성을 초월한 따뜻한 위로자이며 조언자로서 내 영혼의 일부분을 차지해왔던 것이다.

   그는 항상 썼고 나는 꾸준히 자랐다. 그가 쓰는 만큼 나는 성장했다. 작가와 독자라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스탠스에 맞물려 있지만, 그와 나는 고밀한 영혼의 영역에서 서로를 피드백하며 성장해온 것이다. 그와 동시대를 공유하고 그의 글에 감동을 누적해왔다는 것. 그것이 나를 고무하고 성장시킨다는 사실에 나는 아낌없는 영광을 헌사한다. 

   오소희의 신간 <엄마 내공>을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엄마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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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와 우상 - 전원책의 정치 비판
전원책 지음 / 부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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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책의 신간 <잡초와 우상>을 힘들게 읽었다. 어렵지도 않은 책을 힘들게 읽은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재미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오류가 어떻고 정치인의 위선이 어떻고 하는 등의 공염불과 같은 얘기를 어마어마한 분량의 각주와 함께 지난하게 설명한다. 현실적으로 크게 와 닿지 않는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내용을 왜 글감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마저도 자기만의 매력적인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 따분한 글을 읽어야 하는 독자만 곤욕이다.

   사실 그간 출간된 몇 안 되는 전원책의 책들은 한결같이 무료하고 재미없다. 재미없는 주제를 더욱 재미없게 쓰는 게 전원책표 필력의 현주소다. 과거 시인으로 데뷔했다던 그의 시적詩人 유전자는 온데간데없다. 정치 관련 책을 재미로 보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치만큼 뜨겁고 재미있는 주제가 어디 있나. 예컨대 강준만의 책들은 한결같이 재미있지 않나. 지나친 비교평가일 수 있으나 그의 텍스트 생산능력이 [썰전]에서 겨루는 유시민의 절반만 되었더라도 형편없이 재미없는 책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식인 전원책에 대한 내 견해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입장이다. 긍정은 그가 내세우는 보수적 가치에 대한 오롯한 공감에 있고, 부정은 깊이있는 지식의 발굴 노력과 그것을 축적하여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데 힘을 쏟기 보다 우선 목소리 높여 상대에게 일갈하고 보자는 꼰대식 태도에 대한 불만에 있다. 흥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고 본인의 주장에 탄력이 붙는 건 아니다. 진보·보수, 니편·내편을 떠나 솔직히 그가 유시민의 토론 상대가 되는가. 그나마 유시민에게 버티기라도 하려면 논리적 맥락과 이성적 차분함을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인으로서 전원책의 고질적인 한계는 책을 많이 읽은 건 알겠는데 그 지력의 발산이 타자적 언어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번 신간에서도 '그의 언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각주는 저자의 성실한 인용표기로 볼 수 있지만 반면 그의 텍스트가 타자적 지식의 병렬적인 나열에 함몰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공있는 지식인의 언어는 'output' 되기 전에 자기 언어로 치환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 다음에 논리적이고 평이한 보편의 언어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한국 보수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여러 담론에 대해 자기만의 매력적인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계는 참으로 아쉽다.

   대북관계, 복지정책, 병역제도, 노사문제 등 우리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해 나는 전원책과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여태까지 그가 미디어에서 보여준 내·외면적 아우라는 제법 강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한국 보수의 자산으로 수렴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지식인의 종국적인 역할이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지적 자산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전원책의 책과 글은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칼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선동집 <공산당 선언>을 집필했고, 버트런드 러셀은 살아생전에 발군의 필력으로 68권이라는 기념비적 저작들을 남겼다.

   작금의 한국 보수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수가 '수구' 혹은 '꼴통'과 등치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베'를 보수의 한 분파로 인식하는가 하면 '성추행'과 '부정부패'를 한국 보수의 독특한 특질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서점가에서는 보수적 담론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은 대학생은 거의 없고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라는 책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미국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200만 부 이상 팔린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편향은 마치 정의의 문제인양 프레임되고 있어 더욱 암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지식인의 책이 일반독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고 안타깝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 유독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표출해왔다. 예컨대 마르크스, 러셀, 프로이트, 사르트르 등 그가 두들겨 깐 사상가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의 표적이 됐던 지식인들은 일관되게 어마어마한 저작을 남긴 불세출의 필력가들이다. 그들을 깔 시간에 자신의 텍스트 수준은 어떤지 냉정하게 돌아보는 소크라테스적 이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전원책에 대한 나의 이러한 냉소는 그가 한국 보수계의 소중한 보석이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애정의 독설인 것이다. 제발 책 좀 매력적으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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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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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이 신간을 냈다. 꾸준하게 들려오는 그의 신간소식이 반갑다. 이제 유시민에게 '작가'라는 호칭은 낯설지 않다. 몇 년 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본업을 작가로 갈음한 그였다. 당시 자신을 작가로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정서와 감회가 있었다. 이후 그는 성실한 집필과 강연으로 대중에게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어필해왔다. 그간의 비블리오그래피는 작가 유시민으로서의 안정된 아우라를 잘 담아내고 있다.

   유시민의 신간 <표현의 기술>은 글쓰기 관련 책이다. 전작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도 전업작가가 된 저자가 대중에게 글쓰는 방법론을 안내한 책이다. 이번 책은 글쓰기 자체에 관한 안내서라기보다 여러 형태의 글을 쓰면서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담론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담았다. 유시민 특유의 쉽고 간결한 서술은 독자를 편안하게 자신의 논증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해서 다양한 얘기들을 들려준다. 자기소개서, 논문, 보고서, 회의록, 비평 등 각기 다른 형태의 글들이 갖는 구조와 성격,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저자 자신만의 노하우를 여러 예시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특히 글 곳곳에 배치된 공저자 정훈이의 만화는 글의 본류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유머와 풍자를 선사한다. 유시민의 글과 정훈이의 만화는 교차적으로 편집되어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다. 두 공저자의 콜라보레이션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바를 맛깔나고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표현의 기술'이 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맑이 읽어야 한다는 저자의 조건은 합당하다. 많이 읽어야 문장 쓰는 기술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등의 다양한 글감을 무리없이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책읽기'보다 '느끼는 책읽기'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시, 소설, 에세이 등의 문학장르뿐 아니라 기사와 비평 등의 모든 형식의 글을 감상함에 있어 글쓴이의 주관과 목적을 헤아리기 위한 고민과 탐구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수한 독자가 되어 텍스트 속에 담긴 의미를 깊이 느끼려는 노력은 거꾸로 자신이 온전한 필자가 되었을 때 자기 글을 읽을 독자에게 유의미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양방향적 피드백이라는 측면에서 저자의 조언은 경청할 만하다.

   잘 읽히지 않는 난해한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도 동의한다. 저자는 칸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을 예시로 들어 '텍스트(text)-콘텍스트(context) 관계'에 대해 자신의 논증을 풀어낸다. 위선과 허영은 좋은 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책읽기와 글쓰기에도 겉멋과 허세가 작용한다. 글쓰는 능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문장을 자주 다듬다 보면 글을 화려하게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지곤 한다. 사유의 추출물이 아닌 현란한 기교로서의 글쓰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유혹받고 함몰된다. 자기자신조차 무슨 뜻인지 모를 애매한 문장으로 겉멋을 부리는 건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칸트의 명저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다양한 담론에 대해 언급한다. 악플에 대한 입장과 태도, 표절에 관한 견해와 해석, 베스트셀러의 조건, 훌륭한 글쓰기에 전범이 될만한 작품 등 저자는 글을 쓰면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종류의 고민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풀어낸다. 특히 7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직면해 자신의 감정을 언급한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저자는 당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됐다고 기술한다. 바로 그때 소설가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을 만났고 그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그 길었던 여름을 견디게 됐다고 고백한다. 가슴 짠한 대목이다.

  
나는 과거의 여러 글을 통해 유시민에 대한 따뜻한 긍정을 피력한 바 있다. 다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시민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내재적 아우라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렵지 않게 말한다. 또한 쉽고 간결하게 쓴다. 그의 글에서는 지적 허영심이나 과잉된 좌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민하고 난해한 지식을 명료하게 재구성하여 대중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인 유시민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신간 <표현의 기술>은 작가 유시민의 발군의 역량이 잘 반영된 책이다. 유시민이란 이름 석자에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글쓰기에 고민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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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르게 받아야 하는가 케빈 드영 시리즈 3
케빈 드영 지음, 김수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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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확하고 간결하며 거침없는 책이다. 미국 개혁파 교회의 담임목사인 케빈 드영은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르게 받아야 하는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제공한다. 저자는 이 얇은 책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어떤 관점과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성경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으로 정리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뜻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전제한다. 하나는 '작정하신 뜻'이고 다른 하나는 '바라시는 뜻'이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은 불변하며 확정적이다. 작정하신 뜻이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라면 바라시는 뜻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저자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사물을 정하신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하신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는 것을 일깨운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파고드는 인간의 지나친 호기심이 왜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저자는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지금까지 접근해왔던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경적인 원리는 무엇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설파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잘못된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경계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방법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경'과 '상담'과 '기도'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님 중심적 방법으로서 우리를 지혜의 길로 안내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생명의 길로써 최상의 행동방침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을 행하면서 늘 지혜 가운데, 늘 자유롭게, 때로는 빠르게 결정내리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저자는 정리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는 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소소한 일상의 디테일에까지 지나친 신성적 메시지를 소망적으로 전제하여 결국 수동적인 삶에 함몰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나도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기도만 하다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 적이 꽤 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말씀해주실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갈망했다. 시간은 흘렀으나 아무런 코멘트도 듣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며 아무런 행동과 결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우스운 시간낭비였던가.

   시간에 관한 인간의 지독한 무지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한 과학의 시간대에 올려놓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원은 동일선상에서 논증될 수 없다. 인간은 아주 극미세한 차원에서만 하나님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한 과거와 총알처럼 날아가는 현재,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오는 미래로 수렴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직 현재적 시간대에서 통합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천 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며 기다리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초월하되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시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케빈 드영의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르게 받아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하는 이들에게 성경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힘있는 책이다. 짧고 시원하며 명확한 전달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젊은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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