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을 꼽자면 단연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다. 당시 이 한 권의 소설에 나는 녹록지 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소설의 주인공 맥은 딸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극한의 분노와 상처로 내면을 파괴당한다. 바로 그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맥을 찾아온다. 숭고한 자상함으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소설의 구조가 흥미로운데,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메시지는 팩션이다. 이 놀라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나를 자못 흥분시킨다.

   책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작가 폴 영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소설에서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로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었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원작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교제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묘사한다. 제도나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신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진실된 심정으로 진리와 평안을 전달하고자 하는 신의 수고로움을 오두막이라는 표상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따뜻하게 녹여놓는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모든 영화는 원작에 못 미친다. 잘 만들어야 본전이다. 소설은 텍스트고 영화는 영상이다. 텍스트는 독자의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를 일원화하지 않는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자기만의 자유와 개성으로 작가의 제시를 상상한다. 구속력보다 상상력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영상으로 모든 걸 다 보여준다. 표정과 색채, 배경과 분위기까지 완벽히 보여준다. 영상의 구속력이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원작(소설)에 필패하는 이유다.

   물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건 불필요할 것이다. 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다. 저예산 밀실 스릴러 영화 <이그잼>으로 유명한 스튜어트 하젤단이 연출했고 <아바타의> 샘 워싱턴이 주인공 맥의 역을 맡았다. 지나치게 종교적인(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대중적으로 널리 흥행할 영화는 아니다.

   나는 원작자 윌리엄 폴 영이 내한했을 때 독자 사인회에 참석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매우 좋은 질문"이라고 운을 뗀 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두렵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그 간결한 작가의 메시지가 소설 『오두막』을 창작할 수 있는 신성한 동기이자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는 근원의 힘이었을 것이다.

   워낙 감명깊게 읽은 원작이라 영화 개봉 소식에 나도 모르게 들떠서 횡설수설 글 몇 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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