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가 정이현을 좋아한다. 정이현 소설의 특징은 동시대의 초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삼십 대의 생활상을 솔직하고 맛깔나게 그려내는 데 있다. 그다지 무겁지 않고, 잘 읽히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젊은 여성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정이현 문학을 재단하는 대중들도 적지 않다. 편향된 페미니즘적 관점, 지나치게 가벼운 문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소재 등을 근거로 작가 정이현은 공격받곤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 특질을 잃지 않고 브랜드화하여 새콤하고 발랄한 활자를 만들어내는 소설가 정이현을 나는 결코 멀리할 수 없다. 

  소위 '동시대코드'로 대변되는 정이혀니즘의 등장 이후, 이에 대한 아류가 급속도로 퍼져가는 느낌이다. 왕왕 접하게 되는 무슨 무슨 신문사의 신인 단편문학상들을 훑어 보면 이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여성', '2~30대 세대', '동시대', '일상', '다이어트' 등이 21세기 한국 문학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각되고 있을 정도다. 소재는 그렇다 치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과 플롯의 구도, 작가의 차별성과 활자의 무게감 등을 생각하면 마음은 더욱 씁쓸해진다. 

  '제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강력한 홍보문구를 달고 있는 백영옥의 장편소설 『스타일』은 앞서 언급한 정이혀니즘의 아류를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정이현만큼 공감적이지 않고, 덜 가볍지 않으며, 노련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속도감과 이를 풀어가는 시원한 스토리텔링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작가는 국내 메이저 패션잡지의 8년차 여기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주인공 이서정의 생활반경에서 일어나는 직장생활과 대인관계, 남녀간의 사랑과 섹스, 음식과 패션의 최신 트랜드 등의 세계를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그려냈다. 장을 이어나가면서 소소한 이야기의 전복과 과거와 연결되는 현재성을 배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소설이라는 온전한 플롯의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이러한 구성은 그저 밋밋할 뿐이다.  

  동시대를 살면서 동일한 생각과 고민을 갖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 또한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동시대의 전형성과는 거리가 먼 각 캐릭터들의 의미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밥맛보다 못한 직장상사, 다이어트에 대한 호도된 사고, 성性에 대한 대중적 개방성, 이삼십 대 여성들의 다양한 동질감 등 소설에 등장하는 21세기적 공감대 배치는 미지근한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미지근하고 또 미지근하다. 그저 빠르게 읽힌다는 것, 그리고 한없이 가볍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원동력으로 소설의 막장을 한달음에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장을 이어나가면서 점층적으로 구성되는 듯 보이는 이야기는 뒷부분에 와서 미흡한 플롯의 전형을 보여준다. 초중반과 종반의 이야기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뒷부분에 다양하게 배치한 반전들은 오히려 스토리 라인의 매끄러움을 방해한 요소로 지적된다.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듯한 부자연스러움과 비공감되는 이야기의 전복은 밋밋한 장편소설이 갖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문단의 위기'가 비단 어제 오늘의 담론은 아니다. 성석제를 위시한 아홉 명의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을 동시대의 피상성, 깊이 없음을 쿨하게 잘 형상화한 재기발랄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스타일』은 한국문단의 위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인지, 문학에 이해가 덜 되어 있는 한 미천한 독자의 얼버무림의 대상인지,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는 그저 그런 미지근한 소설이다. 내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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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2008-04-24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아류가 중앙의 손기자를 비롯한 여러 메이저 신문기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요. 아,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소위 전문가들이란 사람의 식견이 생각보다 높지 않더군요. `스타일`이 문학상 당선작이라는데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프레이야 2008-04-2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움이 미덕이 되고있는 세상이에요.
격을 세우지도 못하고 파격을 운운하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갑갑할 때가 많은데, 아마도 이책도 그런 종류인가요? 전 읽지 않아서..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없음.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두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관통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평범한 활자로 그려낸 호세이니의 작업에 나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동을 선사받았었다.  

  호세이니는 평범한 문장의 연속으로 독자를 부담없이 인도한다. 하지만 두꺼운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범상한 것처럼 보였던 활자들이 재조합되면서 장난이 아닌 감동을 발현시킨다. 그리고 한동안 독자를 가만히 <정지>하게끔 만든다.  

  한 작가의 작품을 현재에서 과거로 역행하여 만나는 것은 굉장히 흥미있는 일이다. 나는 그 흥미로움이 주는 달콤함을 예찬한다. 개인적으로 문학에 늦게 손을 댄 이유도 이유거니와, 작가의 존재성을 탐구하는 데 그만큼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도 드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 두 권의 작품을 발표한 호세이니에 대해 시간의 선후를 언급한다는 것이 다소 우습지만 그의 처녀작 『연을 쫓는 아이』는 바로 이러한 내 독특한 독서방식에 의해 만나게 된 작품이다. 그리고 기대했던 만큼 나를 감동시켰고, 기대했던 이상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연을 쫓는 아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각기 주인과 하인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 하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두 아이의 우정, 한 사건으로 인해 변질되며 아파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 긴 세월이 지나 회복되는 양심과 속죄 등의 이야기를 호세이니는 장장 500페이지가 넘는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로 완성시킨다. 빠르게 읽히면서도 전혀 가볍지 않은 이 거대한 드라마는 인간의 비열함과 악함, 이에 대한 상처와 아픔, 이를 회복하기 위한 양심과 용기의 네러티브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파쉬툰인으로 태어난 아미르. 반면 억압받는 소수 시아파 이슬람교도 하자라인으로 태어난 하산. 둘의 태동은 주인과 하인으로 구분되며 아프가니스탄 인종문제의 전형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며 자라나는 아미르와 하산. 더욱이 둘다 엄마의 존재를 모르는 동질성을 공유한다. 항상 동일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성장하기에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내보내는 단어는 상대방의 이름 '아미르'와 '하산'이다. 이런 둘 사이의 농밀한 관계는 1975년 연날리기 대회가 있던 겨울 어느 날, 하산에게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아미르가 목도하면서 급반전된다.  

  이후 아미르는 하산 가족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집에서 내쫓는다.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아미르와 아버지 바바. 그곳에서 아미르는 첫 눈에 반한 여인 소라야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평생을 흠모하며 동경했던 바바의 죽음. 오랜 기간 동안 평온하게 흘러가는 미국 생활. 그리고 어느 날 바바의 평생지기 친구였던 라임 칸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이 한 통의 전화는 아미르 자신의 트라우마인 1975년 겨울의 일을 현실의 시공간으로 불러들이며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낸다. 아프간에 가서 만나게 되는 생면부지의 어린 아이 소랍. 그리고 알게 되는 진실들.  

  아미르가 1975년의 겨울에 경험한 고통은 그의 양심을 계속해서 두드리며 삶을 옥죈다. 사실 아미르가 겪은 고통은 세상 어느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성질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고, 용기가 없었고, 지나친 이기심이 있었기에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삶의 편린들. 어쩌면 호세이니가 그린 아미르의 고통과 상처는 우리네 과거와 현재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했고, 존재하는 삶의 단면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었을,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바로 그런 상처와 아픔들 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고통이 그저 고통 자체로만 끝난다면 인생의 나침반은 결코 행복을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아픈 만큼 성숙하고, 힘든 만큼 진보하며, 희생한 만큼 승리한다. 이는 명징한 삶의 원리다. 그것이 육체적 고단함이든, 정신적인 아픔이든, 양심의 고뇌든, 그 어떤 고통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훗날의 영광을 보증하는 힘이 된다. 아미르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비겁하게 묻어두지 않고, 용기와 양심으로 맞서 싸우며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승리하는 인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교훈받게 된다. 

  『연을 쫓는 아이』는 분명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 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차원의 가슴 뭉클함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 자신의 내밀한 눈물을 인지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호세이니는 고국 아프가니스탄에 내재된 사회적 인종적 오류와 모순을 극도의 절제된 표현으로 소설 배경 곳곳에 배치한다. 있는 그대로의 굴곡진 역사와 사회적 변화, 토종 음식과 아프간 민중들의 일상 등이 소설의 배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동경하며 바라보고 있는 작가 호세이니의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남자의 성장통이라는 기본적 스토리를 조국의 현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눈물과 가슴으로 내밀하게 녹여놓은 위대한 서사시리라. 

  호세이니 소설의 특징을 새삼 인식한다. 그의 소설은 그다지 대단한 문장들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평범한 활자로 조합된 그의 서사는 얼핏 보면 뛰어난 가독성만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야 비로소 호세이니의 진면목은 드러난다. 왜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르가 소랍의 작은 미소를 얻기 위해 떨어지는 연을 쫓아서 달려가는 장면은 소설의 모든 서사를 한 순간으로 통합하면서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존재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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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4-25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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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Edition Review]

'활자'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구성에 있다. 구두문화가 직관적이기는 하나 시간의 흐름 속에 변질되고 퇴색되는 한계를 갖는 반면, 문자문화는 절대불변의 원리를 갖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문자문화의 찬란한 기반 위에서 그 시대와 지역의 부흥이 성립되었음을 명징히 보여준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최근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입에서 출력되는 에너지의 양이 적으면 적을수록, 귀로 입력되는 에너지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대인관계를 이뤄갈 수 있음을 새삼 인식해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말 많은 내게 많이 들어야만 하는 의무감을 안겨주곤 했는데, 최근 이러한 최소의 의무감마저 사그라진 듯하다. 듣는 것,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작년에 읽은 위즈덤하우스의 『경청』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지혜 '경청'의 소중함을 잔잔하게 그려낸 책이다. 갑작스런 건강의 악화로 일상의 반전을 겪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무심코 잊으며 살아가는 '듣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아름다운 우화이다. 자기계발서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은 훈훈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와 호흡하는 이 책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책장 속에 꼽혀있는 책에 다시 손이 가게 된 이유는 근자에 '화자'로 살아가는 내 자신을 재인식하며 '청자'로서의 삶이 요원한 자아를 성찰했기 때문이리라.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말하는 것은 호흡과 같은 삶이다. 수시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말을 한 후, 뒤에 남는 것은 허전함뿐이다. 아는 것을 말하고, 멋있게 말하며, 상대방을 설득하게끔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말을 많이 한 뒤에는 개운치 않은 맛이 뒤따른다.  

  『경청』이 출간될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책의 홍보 소재로 자주 회자되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회장은 말 안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도 이 회장은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각 계열사 사장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언어들을 그저 주의깊게 <듣기>만 한다. 듣고, 또 듣고, 끊임없이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결정>만 내린다. 최근 특검이다 해서 말이 많지만, 어쩌면 이 회장은 아들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기 앞서 '듣는 것'의 소중한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으리라. 

  "내가 함께 일했던 탁월한 리더들은 대부분 키도 크지 않았고, 특별히 잘 생기지도 않았다. 연설도 대개 보통수준으로 돋보이지 않으며, 똑똑한 머리나 달변으로 청중을 매료시키지도 못했다. 그들을 구별짓는 것은 명료하고 설득력있는 생각, 깊은 헌신, 끊임없이 배우려는 열린 마음이다."
  세계적인 저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성공한 리더의 공통된 특징은 지성이나 달변이 아닌, 헌신과 배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서 분출하는 것이 아닌 남으로부터 공급받는 요소에 의해 탁월한 리더는 완성된다는 얘기다. 타인의 지식과 생각, 철학과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통찰한 드러커의 명문장에 나는 온전히 매료된다.

  말하는 것은 기술이지만 듣는 것은 예술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듣는 능력에 있어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말은 잘 못해도 오직 듣는 것으로만 사람의 마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귀와 머리가 아닌, 가슴과 심장으로 듣는다. 그 어떤 계산과 이익을 배제한 채, 진심을 다해 마음으로 경청하는 자들이다.  많이, 정확하게, 그리고 깊이있게 듣는 능력이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심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말하기를 열심으로 특심으로 좋아했고 즐겨했던 최근의 일그러진 자아상을 사유하며 다시 한 번 읽은 『경청』의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깨달음을 곱씹는다. 그러면서 귀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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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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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다섯 살 시절을 생각한다. 그 때 나는 누구였고, 무엇을 했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중학교 2학년의 시절. 학교와 집을 왕복했고,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를 외웠으며, 외모와 여자들의 눈길에 민감했던 시절.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 누구를 믿는다는 것, 누구를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경험과 학습이 없던 시절. 어설픈 이기가 다듬어진 이타를 압도했던 그 시절에 과연 나의 아름다운 추억은 무엇이 있을까. 곱씹고 곱씹지만 내 머릿속은 떠오르는 영상을 합성해 내지 못한 채 일렁이기만 한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와 열다섯 살 손녀의 아주 특별한 이별이야기인 『리버보이』는 해리포터의 아성을 무너뜨린 팀 보울러의 역작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열다섯 살 소녀 제스와 그녀의 할아버지 사이의 깊고도 특별한 사랑을 아름다운 판타지로 승화시키며 읽는 이의 영혼을 두드리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1차원의 시간은 정지가 없이 연속적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삶의 희로애락은 수없이 반복되며 우리의 삶을 채우고 또 채우게 된다. 어떨 때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떨 때에는 너무 느린 시간의 감각으로 무료할 때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시간은 분명 절대적인 속도로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 속도의 감각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감정과 이성이 체계있게 확립되지 않은 어린 시기에 사랑과 이별을 농밀하게 경험하는 것은 대단한 축복일 수 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넘어 성인과 노년의 시기를 거치는 우리네 인생은 수도 없는 사랑과 이별, 행복과 아픔의 반복으로 채워진다. 하나의 존재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로 인한 행복, 그리고 이별과 아픔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는 어쩌면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미리 계획하신 인간사의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리버보이』에서 '강'은 매우 중요한 우의(意)다. 시간과 인생, 사랑과 이별, 포기와 분노, 행복과 아픔에 이르는 인간성의 본질적 감정을 '강'이라는 메타포에 녹여 놓는다. 큰 바위가 있고, 방향이 바뀌고, 굴곡이 있고, 좁아지고 넓어진다 하더라도 그냥 흐른다. 저 멀리 '바다'라는 넓은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흐른다. 그것이 강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전두엽이라는 특이하게 발달된 뇌의 구조에서 증명된다. 과거 어느 순간에 겪은 기쁨이나 슬픔을 머릿속에 알고리화하여 먼 훗날에 다시 끄집어 내어 감상에 젖을 수 있는 낭만과 정념(念). 추억이라는 것은 인간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작업이자, 아름다운 낭만의 재창조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추억을 곱씹으며 그 사람을 지금 이 순간 추억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는 힘과 능력.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나는 『리버보이』를 청소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단호히 거부한다. 강처럼 흐르는 세월의 흐름은 청소년기에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시간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게 흐른다.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올 때, 부모와 어른의 사랑을 받으며 말을 배울 때,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할 때,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인으로 살아갈 때, 결혼하여 한 가정의 주인이 될 때,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될 때, 훗날 자식의 자식을 보며 미소를 지을 때,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얻을 때 등. 모든 인생의 편린들마다 시간은 동일하게 '강'과 같이 흐른다. 그렇기에 『리버보이』의 감동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참 아릅답다. 너무 감동스럽다. 팀 보울러가 창조한 감동은 활자가 아닌 판타지 영상으로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나의 삶, 인생, 사랑, 도전, 상실, 꿈에 이르는 폭넓은 사유의 바다 속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과연 내 '리버보이'는 어떤 존재일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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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슬립 - 전2권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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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그리 심각한 수준의 스포일러는 아님. 혹여 스포일러가 걱정되는 분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은 읽지 않기를 권고 드림. 

'시간'은 인간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제이다. 오랜 기간동안 인류의 과학과 문화는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조명하고 분석했다. 시간에 대한 인류의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1차원 이상을 초월하지 못하는 인류 과학의 아쉬운 현주소를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미 공간(space)은 3차원의 우주를 가시적으로 입증했지만, 시간은 1차원의 선의 구조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먼 미래, 과연 인류는 시간을 2차원 이상으로 확장하여 누릴수 있을 것인가. 

  시간에 대한 인류의 콤플렉스적 반증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이 창조한 책과 음악과 영화와 각종 미디어 등에는 현실에서는 발생되지 않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들이 녹아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또는 미래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있는가 하면, 먼 우주로의 여행에서 뒤바뀐 시간 체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간 관련 소재들은 대중들의 관심과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도해가고 있다.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하드보일드 에그』, 『벽장 속의 치요』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오기와라 히로시는 그의 신작 『타임슬립』을 통하여 흥미로운 시간여행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한 사람의 단수적인 시간 이동이 아닌, 두 사람의 복수적 교체적 시간 이동을 통하여 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운명이 뒤바뀐 두 남자의 시간여행을 통하여 태평양 전쟁의 암울한 일본사와 9.11테러로 대변되는 우울한 21세기의 시작을 관통한다. 

  '1944년 9월 12일부터 1945년 8월 16일까지 일어난 이야기 or 2001년 9월 12일부터 2002년 8월 16일까지 일어난 이야기'라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2001년을 살아가는 오지마 겐타는 21세기 일본청년의 초상으로, 1944년을 살아가는 이시바 고이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을 위해 항전을 불사르는 충성된 청년군인의 초상으로 각각 등장한다. 두 남자의 운명적인 타임워프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교차식 구성으로 전개되면서 박진감 넘치는 스펙타클을 선사한다. 

  작가가 설정한 시대 설정이 흥미롭다. 작가는 왜 암울하고 피폐했던 20세기 최악의 전쟁의 심장부를, 그리고 21세기 시작과 함께 경종을 울린 처참한 테러를 시간적 배경의 전면에 배치한 것일까. 소설 속에서 두 남자 주인공은 끊임없이 '현실(기존)'로의 회귀를 갈망한다. 겐타와 고이치는 기존과 다른 세상, 꿈꾸는 듯한 세상, 비상식적인 세상을 목도하며 교체된 시대의 모순성을 인식한다. 죽을 이유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살하길 원하는 청년군인들의 모습, 기존의 모든 가치관과 습속이 파괴되고 순수성을 잃어버린 자극적 문화 등은 두 주인공이 타임워프되는 시대의 모순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암울함에서 암울함으로의 여행은 어쩌면 과거의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반추하고자 하는 넓은 역사의식이 함의된 작가의 외도된 기계장치가 아닐까.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흐름이 있다. 미나미라는 여인에 대한 두 남자의 방향성이다. 본래 겐타의 여자친구인 미나미는 두 남자의 뒤바뀐 운명 가운데서도 그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 끊임없이 조명받는다. 이미 과거에 구속된 자신의 진짜 연인과 본성이 교체된 과거에서 온 가짜 연인으로부터 모두 사랑을 받는 여인이다. 겐타가 과거 시대에서 겪는 난관과 고생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 그리고 고이치가 가졌던 과거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점차 수그러뜨리는 원동력이 바로 미나미의 존재성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러브 스토리다. 

  소설이 좋은 점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그 어떤 이야기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픽션이라 할지다로 암울한 과거 속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에 대한 방향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준비하는 겐타라는 인물에 강한 매료를 느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 미나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겐타의 행동과 의지는 무척이나 감동깊다.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종결된다. 아니다. 희망이 있는 비극이 올바른 정리가 아닐까 싶다. 두 남자 모두 죽음으로 운명을 완성하지만, 미나미의 몸속에 잉태한 하나의 생명은 과거로 간 겐타의 희생적 산물이요, 미래로 온 고이치의 비극적 열매가 합일되는 존재이기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무언가 종결되지 않은 기분.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기대. 그것이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의 솔직하고 즉각적인 느낌이었음을 고백한다. 

  두 남자의 시간을 초월한 운명적 뒤바뀜, 이라는 흥미있는 소재를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멋지게 그려낸 오기와라의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을 염두한 활자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영상적 상상을 유혹하고 있다. 일본작가들의 넓고 튀는 이야기 창조 능력이 비단 어제 오늘의 공력은 아니지만, 활자에서 영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넓은 공간까지 확보해가는 그들의 능력에 새삼 부러움을 느낀다.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 애니나 드라마, 또는 영화. 그 가능성에 작은 기대를 걸어보면서 '시간'과 '사랑'의 조화로 빚어낸 오기와라의 러브 스토리를 여유있게 추천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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