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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평점 :
잘 다듬어진 성장소설의 매력을 청소년보다 오히려 어른이 더 많이 얻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내 믿음은 일생에서 가장 빠르고 많이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대한 성인과 청소년의 상이한 이해와 기억에 기초한다. 청소년에게 그 시기는 가장 복잡하고 힘든 시간이면서도 불가해한 '현재'라면, 성인에게는 이미 지나갔지만 가슴 한 켠에 소중히 자리잡고 있는 가해한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고 괴로웠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성장기가 갖는 오묘한 비밀이리라.
성장소설은 독자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은 문학계의 아이콘이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데미안』과 『양철북』이 그랬고, 『어린왕자』와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랬으며, 『연금술사』와 『리버보이』가 또한 그랬다. 한 인간이 성장하며 겪는 꿈과 희망, 성취와 좌절을 통해 얻는 개인의 보편적 깨달음, 곧 자기실현이라는 가치를 제시하는 성장소설의 감동은 매우 농밀하다. 과거를 안고 현재를 깨닫고 미래를 소망하는, 요컨대 일차원의 모든 시간대의 가치를 아우르는 성장소설의 아름다움을 나는 결코 멀리 할 수가 없다.
한국 문단계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김형경과 성장소설이 만났다. 그녀의 최신작 『꽃피는 고래』는 교통사고로 엄마와 아빠를 잃은 한 소녀의 상실과 이를 회복하며 한 단계 성장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다. 열일곱의 나이에 크나큰 상실감에 허둥되는 소녀 니은이의 아픈 현실에 아빠의 고향인 처용포 마을에서 듣게 되는 바다와 고래의 이야기가 씨줄처럼 엮여 있다. 작가 김형경은 한 소녀의 상실과 번민과 회복의 네러티브를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문체로 그려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니은이는 열일곱 살 소녀다. 엄마와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혼자 남게 된 니은이는 방황한다. 부모의 죽음 후 아빠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처용포 마을로 가게 된다. 초반, 니은이의 상실감은 심각하게 그려진다. 가장 친한 친구 나무에게 화를 냈던 것도, 그래서 나무가 떠났던 것도,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들르는 손님이 다들 미운 것도, 결국 편의점 유리창을 깨고 쫓겨났던 것도, 어울리지 말아야 할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도, 무기력하고 건조한 삶을 지속했던 것도, 그 모든 분노와 불만, 고독과 번민은 바로 상실감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니은이의 방황은 처용포에서의 경험, 곧 두 어른과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희석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평생 고래잡이의 삶을 살아온 장포수 할아버지와 식당집을 운영하는 왕고래집 할머니를 만난다. 장포수 할아버지로부터 '바다'라는 절대적 공간과 '고래'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의 깊이를 배우게 된다. 왕고래집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통해서도 삶의 원리를 알아가게 된다. 또한 영호언니가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문자메시지를 통해서 니은이는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니은이는 깨닫는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실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이 소중한 깨달음의 연장에서 엄마가 강아지를 잃고 이십년년간 울지 못했던 것, 왕고래집 할머니가 고양이와 강아지들을 돌보는 것, 장포수 할아버지가 뒷산에 나무를 심는 것까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얘기한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떠나보내면서 '기억'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상실이 완성된다는 것을. 또한 바로 그것이 좋은 떠나보냄의 공식이라는 것을. 시간은 흘러간다. 인간 의지의 바깥영역에 존재하는 시간의 일관된 흐름은 항상 동일한 속도로 흐르며 묵묵히 흐른다. 이 도도한 시간의 일차원에서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소설 속에서 니은이가 상실의 아픔을 다듬고 그것을 기억으로 치환시켜 가슴으로 밀어넣는 모습이 압권이다. 니은이의 가슴속에 봉인된 '그' 기억은 훗날 또 다른 인간을 성장시키는 밀알이 될 것이리라.
앞서 언급했지만 아름다운 성장소설 한 권은 비단 아이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깊이있는 사유와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준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라고 상실의 아픔은 계속된다. 떠나보내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트라이앵글 조합을 메타포하여 한 소녀의 성장기로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 김형경의 문장력이 인상깊다. 한마디로, 참 따뜻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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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