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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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43718

 

 

‘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였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을 도와 혁명을 도모하고 있었고,

그 혁명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었다.

그와 같은 이상을 갖고 있었던,

그와 함께 이상을 쫓고 있었던,

혹은 그와는 다른 이상을 갖고 있었지만 그처럼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혹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노력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런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김산만이 님 웨일즈의 글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을 뿐이고, 그렇게 남겨진 그에 대한 글만이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일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은 어떤 의미에서든 소중한 작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의 정치적 한계와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김산과 같은 이들에 대한 많은 정보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리랑’은 점점 더 중요한 작품이 되어가는 것 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리랑’과 같은 수준의 당시 시대를 살아간 사람에 대한 글을 접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산과 같은 인물이 꽤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억될 수 있는 존재는 김산 단 한명 뿐이라는 사실에 어쩌면 김산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의 이상과 꿈이 제대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쁨 보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리랑’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김산의 모습은 흔히들 떠올리게 되는 혁명가의 모습 바로 그대로이고,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그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리랑’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과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이에 대한 기록으로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이상과 그 이상을 이루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겪게 되는 좌절과 희망 그리고 그 과정들 속에서 삶에 대한 하나의 입장을 그리고 생각을 전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이런 ‘아리랑’에 담기지 못하고 누락된 내용들과 님 웨일즈가 김산과 나눴던 대화들에 대한 부분적인 메모들 그리고 당시 시대에 대한 김산의 정세분석, 그리고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김산 본인만의 시각까지 모아져 있는 ‘아리랑 2 - 김산의 생애 및 한국에 관한 보충’은 조금은 산만하고 두서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리랑’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김산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아쉽게도 1980년대에 출판이 되었고,

이미 절판이 된지가 오래되어서 더 이상 접하기는 어렵기는 하겠지만 우연히 헌책방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며 반가움에 손이 가게 되는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를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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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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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그동안 다루지 않던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기존에 갖고 있었던 자신의 시각과 입장에서 쉽고 간결하게 써내려간다는 점에서 뛰어난 글쟁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다루지 않고 있었던 ‘건축’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행복의 건축’도 건축에 관한 그의 생각과 입장을 전문적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는 해도 포기하지는 않도록 만들며 전달하고 있다.

 

물론,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조금은 엉뚱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건축과 관련된 전문가들도 나름대로 그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공감할 것이고 그가 주장하듯이 건축이 무엇을 담아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에 일정부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알랭 드 보통은 난해한 건축 이론이나 어떤 건축이 가장 탁월한 건축인지와 같은 진부한 논의에 빠져들지 않고 있고, 건축이 갖고 있는 시각적, 공간적, 정신적, 철학적 측면에 대해서 논의를 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총론적인 입장일 것이고, 어떤 방향과 지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는 그런 측면과 함께 건축이 갖고 있는 역사적 혹은 시대에 대한 반영적인 측면에 대해서 파고들고 있는데, 그런 논의를 통해서 알랭 드 보통은 근대건축에 있어서 끝없이 논의되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에 대한 주장’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반박을 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건축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내용에 대한 변화를 설명하며 그 미학적 관심의 변화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가 그리고 교감이 이뤄지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고, 건축의 외적인 부분과 함께 그 내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안정감과 감수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논의를 통해서 알랭 드 보통은 아름다운 건축이란 그리고 행복의 건축이란 결국 건축을 통해서 시대가 그리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시각적 요소와 기능적 측면에 대한 절묘한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함몰되어 있을 뿐인 건축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고, 시각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건축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탁월함과 함께 지향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통찰력과 설득력은 뛰어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만들어내고자 하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한 입장이 고려되지 않고 있었던 과거의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는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근대건축가의 입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건축에 있어서 좋은 건축과 나쁜 건축의 구분이란 결국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들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채워주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고, 어떻게 주변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의 절충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건물이 갖고 있는 외양을 통해서 그리고 그 내부에서 행복이 담겨지게 되는 것이고, 그 행복의 채워짐(건축)은 사람들이 그동안 이뤄졌던 삶을 고려하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기 보다는 절충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하나의 이론적 입장과 논리적 결론이 아닌 다양한 검토 속에서 이뤄진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알랭 드 보통의 글의 성격에서는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고, 소재가 ‘건축’이라는 이전에 비해서는 독특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작인 ‘불안’과 같이 현대 사회에서의 삶에서 보다 (정신적 / 육체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건축이 갖고 있는 외적이고 시각적인 부분과

내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부분에 대해서 별도의 구분 없이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고, 그 논의들에 대한 결론도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자기 자신의 문제의식과 글쓰기를 흔들리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노력도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문가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을 그는 놓치지 않고 얘기를 하고 있고,

그는 그 부분을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입장과 연관시켜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이런 일관성 덕분에 그의 다양한 관심이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참고 : ‘행복의 건축’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도 잠시 언급되는데,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무덤덤하게 느껴졌지만 책을 읽게 되니 조금은 그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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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사회 모델 동문선 현대신서 98
쥐스탱 바이스 지음, 김종명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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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국가는 어떤 식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여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그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읽혀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천국

지배 국가

헤게모니 국가

악의 축

이상향 등등

 

미국은 사람들에 따라서 각자의 입맛에 맞게 읽혀지고 있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질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하나의 신기루도 허상도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되어 있든 무언가로 구성된 하나의 실체이고, 쥐스탱 바이스는 그런 방식으로 미국의 존재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짧은 분량인 ‘미국식 사회 모델’은 프랑스 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이고, 프랑스와 미국이 어떤 차이를 갖고 있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떤 구성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간략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밀함은 부족하겠지만 반대로 대략적인 윤곽으로 이해하기에는 썩 괜찮은 내용이다. 물론, 출판이 된지가 좀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바라보던 모습과는 미국의 모습이 조금은 변화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변화되었다는 의견에 대해서 바이스 본인은 당연히 수긍할 것이다. 그도 내용 중에 언급했듯이 하나의 모델은 시간의 흐름과 정치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쥐스탱 바이스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하나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문화적인 분석보다는 경제, 정치행위, 의회의 구성, 정당과 법체계, 국가기구의 구성 등 사회 체제의 뼈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논의를 한정시키고 있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게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언급하고 있고, 그렇게 하나의 구조적인 측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조금은 기능적 혹은 형태적 측면으로 미국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이데올로기로서 혹은 문화나 기타 세부적인 방식으로 미국을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기는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분량이 짧고 대체적인 흐름과 형태를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단한 입문서나 상식 수준의 지식으로 생각하며 읽어나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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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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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스럽게 읽혀지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최근에 발표한 미국 문학 작품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가장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코맥 매카시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은데, 성서에 비견될 정도로 호평일색이라 조금은 의무감으로 읽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인지 썩 괜찮게 읽혀지면서도 생각 이상의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그저 ‘과연 9/11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와 ‘미국의 정신적 공항상태가 꽤 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작품의 배경은 아마도 핵전쟁 이후의 세계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지만 코맥 매카시는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고, 명확한 설명은 해주지 않고 있다. 그저 그곳은

 

모든 것이 어둡고,

춥고,

자주 비가 내리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곳이고

 

그 고통만이 남겨진 공간을 그리고 희망이 없는 공간을 남자와 소년이 끊임없이 걷(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코맥 매카시의 글은 대화와 설명의 구분을 두지 않고 있고,

시점은 엉켜있으며,

현실과 환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남자와 소년은 있지만 어째서 여자는 없는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진 않고 있다. 추측을 하도록 하고 있고, 남자와 소년 그리고 그들의 고난에 많은 은유와 의미 부여가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한 의도를 부여하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절망과 고통, 희망 등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다.

 

간간히 남자는 회상에 잠기고 있기는 하지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회상이기 보다는 지독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혹은 과거는 지금의 현실과 얼마나 다른 풍경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의 참혹함을 보다 더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어둡기만 한 세계 속을 그들은 끝없이 걷고 있을 뿐이고,

그들은 잠시 안락함을 누리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불안감을 수반하고 있을 뿐인 안정일 뿐이고, 다시 그들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불을 운반’한다는 목적으로 그들은 이동하고 있지만 그저 조금 더 안락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느낌만이 들게 될 뿐이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그 불이라는 것이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르고,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은 약간의 설명을 해주고 있으면서도 그 설명에 큰 설득력을 갖도록 노력하지는 않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는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의 그들은 하나의 고정된 혹은 정지된 공간에서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이동하고 있을 뿐인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동일한 공간 속에서 새로운 상황들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뜻인데 아마도 이는 고통스러운 여정만이 있을 뿐인 그들의 여행으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피로 때문인 것 같다.

 

묘사는 때로는 매우 세밀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흐릿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재를 머금은 비로인해 눈이 젖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듯이 책장 속 모든 것들은 뚜렷하기 보다는 어둡고 흐릿하다.

 

번역자도 언급했듯이 ‘코카콜라’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명칭이 언급되지 않고 있고, 소년과 남자의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저 두려움, 고통과 같은 어두운 감정과 기분에 작품은 집중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괴로움을 말함으로써 삶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작품일 것이고, 희망이 없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을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코맥 매카시는 그 절망과 고통을 더욱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묘사를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희망을 보다 더 희망있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지루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조한 글을 담아내고 있고,

간략한 대사들과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묘사는 회색 빛 풍경을 보다 진하게 선사하고 있다.

 

9/11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알고서야 조금은 더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희망 없음을 통해서 희망을 꿈꾸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단순하게 말해서 9/11 없이도 이 작품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 고통을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게 되는 것 같다. 고통이 없는 희망은 없고, 삶은 괴로움과 고통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희망은 희망으로서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삶이 희망을 하지 못하는 삶이 과연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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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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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43624

 

 

 

자주 얘기하지만 진중권의 글은 시사평론가로서의 글과 미학자로서의 글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각각의 성격에 따라 그의 글쓰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 조금씩 두 개의 영역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각각의 영역에 따라 관련된 독자들이 다르기 때문에 글쓰기 방식이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성공작이자 대표작으로 알려진 ‘미학 오디세이’는 제목부터 그의 미학자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는 되도록 일반인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간결하면서도 흥미를 갖도록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기존의 2권까지 발표가 되었던 ‘미학 오디세이’는 서구 유럽과 미국의 그리스 시대 미술부터 시작해서 중세와 근대 그리고 근대 이후의 현재까지의 ‘미’의 흐름을 들려주고 있고,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도판과 함께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로(때로는 유머 있고, 때로는 대화를 하듯이 그리고 때로는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관심을 놓지 않도록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보다는 미학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논의들을 토대로 그는 미학의 흐름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입문서로서로서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권과 2권으로 많은 독자를 갖게 된 이후에 발표한 3권은 2권의 말미에 다뤘었던 근대 이후의 예술에 내용을 집중하고 있고, ‘예술의 종언’을 말하는 지금 시대에서 도대체 무엇이 예술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논의를 위해서 그는 고전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디오게네스를 불러오고 있고, 그들의 입장의 차이와 함께 보르헤스와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하이데거, 보드리야르, 리오타르,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의 미학적 입장을 가져와서 원본과 복제 / 주관과 객관 /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등을 논의하며 결국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되어버렸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가 모호해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술이라는 것은 없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결론에 조금은 놀라움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이런 논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뤄졌던 논의들이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느끼기 보다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게 만들고 있다.

 

과연 앞으로도 ‘예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진중권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일정부분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해를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하지 말라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잡하거나 황당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현대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중권은 좋은 안내를 해주고 있고, 그의 안내에 따라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고 이해가 되지 않기만 하던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논의가 프랑스 / 독일의 철학적 흐름을 조금은 알고 있어야지만 더 이해가 쉽게 된다면 점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진중권은 어려운 것들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철학적 입장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쉽다는 뜻이 가볍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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