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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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검푸른 바다를 소리없이 유영하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깊은 숨을 몰아쉬는

당신은 고래를 본 적이 있나요?

 

가난과 절망에 찌들어버린 세상을 헤치며
돈과 사랑을 쫓아 모진 인연을 쓸어왔으니
그녀의 이름은 금복.
거대한 꿈으로 자신의 고래를 세우던 날
붉은 바다는 결국 그녀를 삼켜버립니다.
 
잿더미로 죽어버린 바다에서
조용히 고래의 시체를 찾는 이가 있었으니
금복의 딸, 춘희.
원죄를 둘러쓰고 불길 속을 헤매던 
당신은 고래를 본 적이 있나요?
 
 
# 2.
 
금복은 "이전의 당당하고 인정 많은 여장부의 모습은 간데없고 이기심과 치졸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속 좁은 사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p289)
 
결국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p301)
 
"그대, 돌아오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수많은 날들이 흘러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쌍의 족제비가 사랑을 나누듯
  한 쌍의 잠자리가 사랑을 나누듯
  우리 다시 만나
  예전처럼 함께 사랑을 나누어요.
  그대, 어서 돌아오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p419) 
 
 
# 3.
 
고래가 보인다. 
간지작살의 구라빨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미쳐버린 초콜릿의 강렬한 중독성이랄까.
흥분된 오감으로 밤잠을 설친다.  
 
이외수 님의 초기 소설을 대했을 때처럼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상당히 독특하고 재미있어 읽는 이를 단번에 사로잡아 버리는 마력 덩어리였다. 하지만 너무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부의 신선함은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사그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표면적인 기교와 재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이야기 구조의 한계가 아닐까.
 
천명관, 그의 이름은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의 이름이지 싶다.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로 글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고래같이 거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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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책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존 코널리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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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책읽기를 좋아하는 데이빗은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새엄마(로즈)네 집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그가 묶을 다락방엔 "오래되고 이상한"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새엄마에 대한 불만으로 책에만 파묻혀 생활하던 데이빗은 우연한 기회에 지하 정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숲으로 뒤덮인 이상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몰랐던 데이빗은 그곳의 왕에게 물어보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길에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동화 속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 사슴과 나무꾼, ... 하지만 기존의 동화와는 달리 기괴하고 엽기적인 내용으로 각색되어 등장한다. 가령 데이빗이 길을 가다 난장이를 만났는데 이들은 형편없는 외모의 '뚱녀'에다 왕자를 기다리는 공상에 빠진 백설 공주를 독살하려 한 벌로 그녀는 돌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치 3류 고어영화를 보는 것 같이 황당하기까지 하다. 기존의 사냥에 실증을 느낀 여자사냥꾼은 보다 똑똑한 사냥감을 원한나머지 사람의 머리에 동물의 몸을 가져다 붙인 괴물 종족을 만들어낸다. 머리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사방으로 피가 튀기는 모습을 지극히 평이한 문장으로 서술한다. 남의 집 불구경하는 듯한 이런 서술 방식 때문에 더 잔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와 동화라는 소재를 판타지와 모험으로 그려놓았다는, 유명한 상도 많이 받았다는 말에 구입한 책인지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몇 주간의 외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시차적응이 덜된 상태로 맞이하는 기이한 아침의 모습이랄까...
 
 
  # 2
 
  아뿔싸! 이게 다가 아니었다. 기괴할 뿐 밋밋하게 다가왔던 소설 속에는 수십 편의 동화가 배경그림으로 치밀하게 깔려있었다. 하지만 난 그 복선과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껍데기만 본 것. 기껏 알아본 것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 <헨델과 그레텔>, <빨간 모자> 정도였으니...
  책 뒤에 부록으로 수록된 동화, 이 책의 소재로 사용된 동화를 보고서야 나의 무지를 통감하게 되었다. 그림형제의 <룸펠스틸트스킨>, <생명의 물>, <빨간 모자>, <헨젤과 그레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 <세 명의 군의관>, <거위 소녀>, <어린 브라이어 로즈>, 보몽 부인의 <미녀와 야수>, 빌뇌브 부인의 <미녀와 야수>, 그리고 <세 마리 염소>와 <그리스 로마신화>, <리어왕> 등 수많은 동화와 고전이 인용되고 패러디 된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뒤집어보면 이런 동화들을 전혀 몰라다는 말인지라 상당히 부끄러웠다. 나의 '고전' 이해도 이정도란 말이었던가... 하긴 고등학교 때 가서야 조금 읽기 시작했었지 중학교까지는 책이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았으니 지극히 당연한 결과리라. 아무튼 부록에 수록된 원작을 보면서 동화에 대한 나의 무지와 함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동화가 그림형제에 의해 쓰였다는 것에 놀랐다.
  아울러 그림형제의 원작이 갖고 있는 거친 표현들도 인상적이었다. 권선징악을 넘어선 응징이 조금 섬뜩했다는 말! 한 때 주인공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거나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모습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 3
 
  소설이라 보기에는 밋밋하고,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외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지만 우리나라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어른과 청소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쳐버린 형국이랄까. 화려한 서평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것을 건지지는 못한 것 같다.
  끝으로 몇 해 전에 개봉한 <그림형제-마르바덴 숲의 전설>의 내용과도 상당히 연관이 있지 싶다. 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그림형제의 동화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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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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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를 넘기자 목차가 보이고 바로 소설이 시작된다. 깔끔하고 정갈해서 좋다. 어떤 책은 책머리에 작가의 말이니 뭐니 해서 사족이 너무 많은데 정유정 님은 오로지 글로서 말하겠다는 식으로 당차 보인다.
  이야기는 7년 전으로 돌아가 세령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빠른 스케치로 그려놓는다.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이지만 언제 읽히는가 싶게 빠르게 넘어간다. 속사포처럼 풀어놓는 증언을 교차해서 듣는 느낌이랄까.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곳으로 모여드는 사건의 흐름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한다.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그 광란의 밤에 멀쩡하게 살아남은 아이." (p18) 
 
  나(최서원)는 세령호의 재앙을 일으킨 살인마의 아들로 7년이라는 시간을 세간의 눈을 피해 살아왔다. 어떻게 전개된 사건인지도 모른 체 아버지의 직장 부하였던 아저씨(안승환)와 함께 등대마을에서 버텨왔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나의 존재와 세령호 사건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나의 버팀목 같았던 아저씨마저 세령호 사건에 대해 쓴 원고뭉치를 남겨놓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이야기는 다시 7년 전 세령호로 옮겨지고, 끔찍한 재앙이 있게 된 발단부터 차례로 복기된다. 세령호의 보안팀에 근무하던 아저씨(안승환)와 이제 막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아버지(최현수), 세령수목원 원장이자 동네 유지였던 치과의사 오영제. 이 세 명은 세령호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오영제의 딸을 두고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며 경계한다.
 
   세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향해 환형으로 돌고 있는 형상이랄까. 세령호 사건을 놓고 벌이는 미묘한 심리전이 보는 이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점점 거대하고 치밀해지는 사건은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상당한 제력과 명예까지 갖췄지만 부인과 자녀에게 폭행을 일삼는 오영제. 그는 정신병에 가까운 결벽증과 집착으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까지 공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단순히 소설 속의 존재라고 외면하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연일 이런 '정신병자'들의 이야기가 쏟아지니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기심만으로 이웃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세상을 불살라버렸다. 숨기고 싶지만 그들 뒤에는 우리사회의 그림자가 늘 함께했었다. 우리는 아직 이들을 예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하다보니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를 무시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우리들의 아버지, 최현수. 젊음을 무기로 꿈을 좇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로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술로서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술에 취한 체 차를 몰다 오영제의 딸을 치어 죽이고 유기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 떵떵거리다가도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결단을 못 내리며 벌벌 떨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그였기에 쉽게 미워할 수 없었다.
 
  또한 아저씨로 불리며 어린 나(최서원)를 보살펴주는 안승환은 위의 두 위인들에 비해 상당히 정제된 모습이다. 이른바 바른생활맨에다 정의맨이랄까... 자신의 글을 통해 세령호의 진실을 나(최서현)에게 전해주지만 마음 속 한편에 자리 잡은 공명심으로 인해 세령호 사건이 확대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기 것에 광적으로 집착한 체 공멸을 자처했던 오영제나 어둡고 불행했던 과거에 묻혀 자신을 파멸시킨 최현수, 이들은 가족에게서 시작되거나 물려받은 유년시절의 상처를 돈이나 명예, 술과 섹스, 폭력과 같은 외부적인 것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냉혹한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너무 삭막했다. 어쩌면 그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진 '화'를 다스리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가 아닐까.



  소설책을 덥자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친 느낌이다. 다음날 쑥대밭이 되어버린 거리를 보는 느낌이랄까. 정신을 차려 보지만 생시인지 꿈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500여 페이지를 채운 수많은 사건과 복선, 추리는 일순간에 헝클어져버렸다. 그만큼 책에 몰입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듬었을 작가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세상을 만들듯 나무와 숲, 마을과 도로를 그렸으리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이들이 엮어가는 사건을 써내려 갔으리라. 정유정 작가의 모습이 마치 새벽안개 뒤편에 희뿌옇게 존재를 드러낸 신령스런 존재처럼 다가온다.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린 정유정 님의 전작, <내 심장을 쏴라>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풀어놓는 '썰'이 더 하드하고 파워풀해진 것 같다. 마치 미래의 전쟁을 위해 교도소에서 힘을 길러왔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마도 2011년 최고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치밀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 극적인 사건과 개성강한 인물들까지. 출판된 이후 각종 순위에서 맨 윗자리를 고수하고 있는데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 책의 광풍은 당분간 계속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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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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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버리면 모두 들떠서 즐겁게 걸었던 것, 수다 떨었던 것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그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퉁퉁 부은 얼굴, 발의 통증을 잊으려 애쓰며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했던 것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p80)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다보면 꼭 이런 느낌이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달리기가 끝나고나면 어김없이 다음 대회를 기다리게 된다.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잊혀진 체 결과에서 오는 쾌감만이 고스란히 남는 것이다.
 
  <밤의 피크닉>에서는 아침 여덟 시부터 다음날 여덟 시까지, 80km를 걷는 단련보행제가 행해진다. 북고 3학년 같은 반에 다니는 나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도 이 행사에 참가한다. 둘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남매였지만 이를 숨긴 체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며 생활해왔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의 도움과 배려와 더불어 육체적 극한상황을 체험하는 보행제를 통해 서로에 대한 벽을 허물게 된다.

  여기서 보행제는 도오루, 다카코의 심리상태를 보듬어주는 배경이 되었다. 막연한 기대와 함께 시작된 행군은 완만한 경사를 지나 서서히 각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급경사를 이루며 이들을 몰아붙였다.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정신은 혼미해지는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자신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주변의 환경까지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 대오각성과 같은 종교적인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한번쯤 고민해봤음직한 막막한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복잡한 것도, 극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신적, 육체적 고행을 통해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마치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랄까. 저 코너를 돌면 반환점이 보일거야, 저기 언덕을 넘어서면 결승점이 보이겠지 하며 달려가지만 언제나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코너와 더 높은 언덕이었다. 그렇다고 달리기를 멈출 수도 없는 일. 고통스러운 현실을 불평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현재의 발걸음에 충실하며 힘차게 팔을 휘저을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노력들이 시간을 두고 쌓였을 때, 결승점을 통과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네가 빨리 훌륭한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싶다, 홀로서기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알아. 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 물론 너의 그런 점, 나는 존경하기도 해.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해." (p156) 
 
  우리는 결과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건을 판단해 버리고 성급하게 재단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과거나 미래에 얽매여 지금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이끌어줄 다양한 목소리를 '잡음'이라고 무시한 체 아무렇게나 흘려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끝으로 고등학생이 밤낮이라는 만 하루 동안에 80km를 걷는다는 보행제가 신선했다.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행군을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매년 전교생이 참가해서 걷고(60km) 달리고(20km) 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실제 일본에서 행해지 것인지 소설 속의 허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점점 허약해지고 있다는 우리나라 학생들을 생각하니 혁명적이기까지 했다.
  과연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졸업여행이나 수학여행 대신 이런 '한 밤 걷기' 행사를 개최한다면 어떨까. 건성으로 훑고 지나가는 전시관 유람 보다야 백배 나아보이지만 안전이라든가 사회여건 상 어려움은 많아 보인다. 하지만 즉각 결과를 얻고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 세상에서 행군이나 마라톤 같이 오랜 끈기와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체험도 유용하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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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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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난해한 것에서부터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까지 두루 담겨있다. 일단 대략적은 내용을 살펴보면,

  잔혹극을 보는 것 같지만 그 내용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가노 크레타>, 좀비로 변한 남자친구를 그린 <좀비>, 순결에 대한 고집을 지키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역시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비행기>, 그리고 <잠>과 <TV 피플>.
 
  <잠>은 한때 불면증을 앓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로 어느 날 잠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루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잃어버린 밤 시간(수면시간)을 즐기며 소설읽기에 몰입한다. 일상에 묻혀버렸던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무료하게 지내온 자신의 일상을 돌아본다.
  "그 흠잡을 데가 없다는 완벽함이 때로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그 '흠잡을 데 없음' 안에는, 왠지 상상력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딱딱하고 야릇한 부분이 있다. 그것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p165, <잠>)
  그리고 더 큰 일탈을 시작한다. 잠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남편으로부터... 하지만 곧 위기에 빠진다.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잠>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억압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사랑과 성에 대한 여성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 아닐까. 수동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 휘둘리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TV 피플>에서는 어느 날 정체불명의 TV 피플 세 명이 SONY 텔레비전을 들고 집에 들어선다. 7할 정도로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탁자에 올려놓고 사라져버렸지만 주인공의 뇌리에는 오직 그들에 대한 의구심과 생각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두고 간 텔레비전에서는 하얀 화면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TV박스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랄까. 난해한 소설의 전개는 의미 없이 방영되는 여는 TV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도 그 텔레비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만 그로인한 가족과 사회와의 단절은 실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하루끼는 '스마트폰'으로 대변될 오늘날의 미디어 세상을 절묘하게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손바닥만한 액정에 코를 박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으니 말이다.
 
  비일상적인 판타지를 일상의 이야기로 끌어들인 무라카미의 단편집으로 난해함 만큼이나 의문이 강한 책이다. 소통과 단절이라는 화두를 따라 일상과 판타지 사이를 여행했다. 
  알듯 모를 듯 미묘함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이런 여운 때문에 다시 단편을 찾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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