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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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를 넘기자 목차가 보이고 바로 소설이 시작된다. 깔끔하고 정갈해서 좋다. 어떤 책은 책머리에 작가의 말이니 뭐니 해서 사족이 너무 많은데 정유정 님은 오로지 글로서 말하겠다는 식으로 당차 보인다.
  이야기는 7년 전으로 돌아가 세령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빠른 스케치로 그려놓는다.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이지만 언제 읽히는가 싶게 빠르게 넘어간다. 속사포처럼 풀어놓는 증언을 교차해서 듣는 느낌이랄까.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곳으로 모여드는 사건의 흐름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한다.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그 광란의 밤에 멀쩡하게 살아남은 아이." (p18) 
 
  나(최서원)는 세령호의 재앙을 일으킨 살인마의 아들로 7년이라는 시간을 세간의 눈을 피해 살아왔다. 어떻게 전개된 사건인지도 모른 체 아버지의 직장 부하였던 아저씨(안승환)와 함께 등대마을에서 버텨왔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나의 존재와 세령호 사건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나의 버팀목 같았던 아저씨마저 세령호 사건에 대해 쓴 원고뭉치를 남겨놓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이야기는 다시 7년 전 세령호로 옮겨지고, 끔찍한 재앙이 있게 된 발단부터 차례로 복기된다. 세령호의 보안팀에 근무하던 아저씨(안승환)와 이제 막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아버지(최현수), 세령수목원 원장이자 동네 유지였던 치과의사 오영제. 이 세 명은 세령호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오영제의 딸을 두고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며 경계한다.
 
   세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향해 환형으로 돌고 있는 형상이랄까. 세령호 사건을 놓고 벌이는 미묘한 심리전이 보는 이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점점 거대하고 치밀해지는 사건은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상당한 제력과 명예까지 갖췄지만 부인과 자녀에게 폭행을 일삼는 오영제. 그는 정신병에 가까운 결벽증과 집착으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까지 공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단순히 소설 속의 존재라고 외면하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연일 이런 '정신병자'들의 이야기가 쏟아지니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기심만으로 이웃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세상을 불살라버렸다. 숨기고 싶지만 그들 뒤에는 우리사회의 그림자가 늘 함께했었다. 우리는 아직 이들을 예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하다보니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를 무시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우리들의 아버지, 최현수. 젊음을 무기로 꿈을 좇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로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술로서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술에 취한 체 차를 몰다 오영제의 딸을 치어 죽이고 유기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 떵떵거리다가도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결단을 못 내리며 벌벌 떨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그였기에 쉽게 미워할 수 없었다.
 
  또한 아저씨로 불리며 어린 나(최서원)를 보살펴주는 안승환은 위의 두 위인들에 비해 상당히 정제된 모습이다. 이른바 바른생활맨에다 정의맨이랄까... 자신의 글을 통해 세령호의 진실을 나(최서현)에게 전해주지만 마음 속 한편에 자리 잡은 공명심으로 인해 세령호 사건이 확대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기 것에 광적으로 집착한 체 공멸을 자처했던 오영제나 어둡고 불행했던 과거에 묻혀 자신을 파멸시킨 최현수, 이들은 가족에게서 시작되거나 물려받은 유년시절의 상처를 돈이나 명예, 술과 섹스, 폭력과 같은 외부적인 것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냉혹한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너무 삭막했다. 어쩌면 그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진 '화'를 다스리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가 아닐까.



  소설책을 덥자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친 느낌이다. 다음날 쑥대밭이 되어버린 거리를 보는 느낌이랄까. 정신을 차려 보지만 생시인지 꿈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500여 페이지를 채운 수많은 사건과 복선, 추리는 일순간에 헝클어져버렸다. 그만큼 책에 몰입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듬었을 작가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세상을 만들듯 나무와 숲, 마을과 도로를 그렸으리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이들이 엮어가는 사건을 써내려 갔으리라. 정유정 작가의 모습이 마치 새벽안개 뒤편에 희뿌옇게 존재를 드러낸 신령스런 존재처럼 다가온다.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린 정유정 님의 전작, <내 심장을 쏴라>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풀어놓는 '썰'이 더 하드하고 파워풀해진 것 같다. 마치 미래의 전쟁을 위해 교도소에서 힘을 길러왔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마도 2011년 최고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치밀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 극적인 사건과 개성강한 인물들까지. 출판된 이후 각종 순위에서 맨 윗자리를 고수하고 있는데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 책의 광풍은 당분간 계속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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