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짓밟아버리자! 라니...[고교입시]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은 처음인데 [고백]이라든지 [모성]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번 [고교입시]가 무척
기대되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어 생생한 학교 현장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시철이 끝나면 일명 SKY에 진학한 학생들의 명단이 커다란 플래카드로 내걸린다.
우리 학교는 이런 인재를 배출한 학교입니다, 하고 자랑하는 듯이.
일본에서는 입시 제도가 대입이 아니라 고입에도 적용이 된다.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유명 대학 합격자의 이름이 줄줄이 학교 1층 복도에 쓰여져 있는 현립 다치바나다이이치 고등학교, 일명
이치고.
이 소설은 바로 이 이치고에 진학하려는 중3 학생들이 고교입시를 치르는 날을 전후한 48시간의 이치고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입시를 짓밟아버리자" 라니...
어떤 식으로 입시가 짓밟히는지 확실히 지켜보겠어, 라는 목적의식을 불태우며 책을 읽으려는데, 어쩔~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사실, 기억력의 두께가 얇아도 너무 얇은 나는...책장을 덮는 마지막까지 [인물 관계도]에 의지하여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많은 인물들, 특히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기도 한 교사들 각자의 이력서를 써놓고 소설을 시작했다는 작가의 노력때문인지 중간
쯤부터는 서서히 적응되기 시작하여 앞으로 되돌아가는 횟수는 줄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열 명이 넘는 교사들이 등장하며 각각의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펼치는 독특한 구성으로 전개되는 소설이기에 자칫 산만할 수도, 집중을 못
할 수도 있었는데 작가는 각각의 교사들에게 나름의 개성을 적절하게 부여한 점은 높이 사고 싶다.
확실히 학교의 사정이란 것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거개일반인 모양인지, 틀에 박힌 행동이나 대사만을 나열하는 마네킹 같은 교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치고 OB인 교사들 대부분은 이치고에 합격한 후 책상을 내다버리는 전통에 대해 떠들어대며 그저 자랑이나 하고
교가를 열창하며 소란만 피울 뿐인 한심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성공인가 실패인가로 나누는 척도가 될 정도로 중요한 시험일.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치고의 시험 전날 교사들은 모여서 시험 감독에 대한 회의를 하고 고사장으로 쓰이는 교실을 점검하던 중 칠판에 커다란 모조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입시를 짓밟아버리자!>
검은 먹물로 휘갈겨 쓴 편지였다.
시험이 엉망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그 시각, 인터넷에서는 이치고 입시에 관련하여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들이 속속 채워지고
있었다.
<최종 목표가 고교 합격이라니, 열다섯 살에 인생을 정하는 거냐?>
<이치고 나와서 백수. 그래도 부모는 자랑한다>
<학력을 자랑하는 건 인생의 절정이 이미 지난 인간. 현재의 인생에 만족하는 사람은 과거 자랑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촌철살인의 글들인데, 사건의 추이를 좇느라 대충대충 읽어나간 것이 미안해지는 중이다.
벽보 발견에 이어 한 교사의 휴대폰이 칠판 위에서 발견되는 등 불안요소가 드러나지만 시험은 강행되고 드디어 시험 당일.
시험이 끝나갈 무렵 한 여학생의 휴대전화가 울리고, 실격이라는 주의를 받은 여학생은 호흡곤란으로 양호실로 옮겨진다.
<휴대전화는 교실 반입 금지. 착신 여부에 관계없이 커닝으로 간주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실격 처리함>이라는 주의 사항을 모두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여학생의 고사장에 붙은 주의사항에서는 "실격처리"라는 말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 여학생은 현의원의 딸이었다.
자칫 문제가 불거지면 소송으로까지 이어질 상황.
난데없이 여학생의 어머니와 동창회장이 학교에 난입하자 책임자인 교장, 교감은 일처리를 뒤로 미루려고만 하고, 채점을 맡은 교사들은 일단
채점을 끝내놓고 사건의 추이를 살피려 하는데...
답안지 한 장이 없다!!
그리고 사건의 전개와 함께 한 줄씩 올라오던 촌철살인의 글들은 인넷네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이치고 입시를 지켜보는 무수한 이들의
글들이었다. 그 와중에 시험문제가 실시간으로 유출되고 있었다는 후덜덜한 사건까지 겹치게 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시험 당일 학교에 오면 안되는 이치고 재학생 이시카와 에리나가 발각되자 교사들은 에리나에게 사정 청취를 하고, 범인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범인들의 자백을 통해서 "이치고 입시"를 짓밟으려는 사람들의 진짜 이유가 밝혀진다.
[고교입시]는 씁쓸한 현실을 고발하는 통쾌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어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주동자의 자백과 동시에 컴퓨터 화면에 <벚꽃 지다>를 입력하자 인터넷상의 댓글들이 우수수 벚꽃 지듯 사라지는 장면.
입시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의 헝클어진 마음을 한없이 여린 핑크의 벚꽃잎들이 살포시 덮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것이...반창고가 될 수 있을까?
일이 터지면 막기에 급급하고 미봉책을 내놓으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책임감 없는
어른들의 모습이 또다시 나오지 않을까,,,걱정했는데.
인생이 끝장나버린 것 같은 입시에 대한 아픈 기억을 다시 불러내긴 했지만,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깨끗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진짜 어른"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사건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행동에 나선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어른의 모습을 고스란히
되물려주려는 나쁜 어른들이 수두룩하다.
먼저 간 친구들에게 해줄 게 없어 도보행진에 나선 단원고 아이들.
진상규명은 뒷전이고, 특별법 공방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정치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묵묵히 도보행진을 위한 발걸음을 뗀 아이들은 그저 뭐라도
할 수 없을까 하여 행동으로 나선 것일 뿐일 텐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진상 규명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진상규명이다. 특례 따위!"
진심으로 어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아이들의 메시지에 그저 고개를 떨굴 뿐이다.
아직 인생의 찬란한 시기,화려한 벚꽃을 피울 시기를 맞이하지 못한 채 입시라는 광풍에 꺾여 버리고 만 이치고의 학생들에게는 그래도,
"입시를 짓밟아버리자"라는 퍼포먼스를 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책임감 있는 "어른" 이 있었다.
그리하여 앞날에 대한 희망이라도 엿볼 수 있었는데,,,
우리의 단원고 학생들에겐 아직 희망의 빛이 드리우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어떤 반창고로도 쉽사리 치유되지 않을 상처들.
노란 리본의 물결이 부디 그 여린 가슴들에 찰랑거리며 가닿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