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앤 브래셰어스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천 년을 기억하는 남자 [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프루스트는 전생을 기억하면서 지금은 켄터키 남부에서 주부가 되어 살고 있다. 브리지 카드 게임을 무지 열심히 하면서.

프로이트와 제임스 조이스는 딱 한 번만 눈부시게 살다 떠났다.

융과 융의 어머니는 확실히 전생을 기억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덧붙여 이 책은 소설이다^^)

1000년도 넘게 전생을 기억하는 대니얼과 그의 친구 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1000년도 넘게...기억을 쌓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100년도 안되는 이 생을 한 번 살면서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벌써부터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깜박,깜박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은 1000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막을 올린다.

 

서기 520년, 자신이 기억하기에 첫 번째 생을 시작하게  되었던 한  청년은 비잔티움의 신민으로서 형과 함께 출정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위한 복수라는 명목 아래, 혹은 다스릴 길 없는 열정을 전쟁터에 쏟아부을 양으로, 형의 지휘 아래 자그마한 마을을 습격한다. 혹시 숨어 있을지도 모를 적들을 없애려고 집이란 집은 모조리 불태우고 마는데, 그 와중에 한 소녀와 마주치게 된다. 긴 머리에 커다란 녹색 눈동자를 한 소녀를 보는 순간, 두려움과 광기에 휩싸인 그는 이 마을을 습격하는 게 아니었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끝내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 채 "미안해"라고 울부짖으며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죽인 수치심에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오히려 기억이 선명하고 풍부해지며 전생이 더 많이 떠오르는 사람. 이름, 장소, 장면, 냄새까지도. 환생할 때마다 그는 문간에 선 한 소녀의 얼굴을 본다. 그는 그녀를 소피아로 기억하고 자기 자신을 대니얼이라 말한다.

 

소피아는 나의 원죄다. 나의 삶은 언제나 그 원죄와 함께 시작되고, 나는 소피아를 통해서 비로소 나 자신을 안다. -76

 

일곱 번째 생에서 그는 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형 조아킴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난폭한 형은 소피아에게 폭력을 휘둘렀지만 형수가 되어버린 그녀를 그가 어찌할 수는 없었기에 형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밖에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키고 어머니의 집에서 나오는 길, 그는 조아킴의 칼에 찔려 일곱 번째 생을 마감했다.

 

대니얼은 환생할 때마다 소피아가 어디서 다시 태어났는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는지를 찾아 헤매느라 모든 힘을 쏟는다. 그러나 그 둘은 스치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그들은 서로를 잡지 못하고 슬픈 사랑의 역사만을 쌓아갈 뿐이었다.

 

드디어 2000년대의 어느날, 대니얼은 소피아(이름은 루시이다)를 찾아내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소피아는 대니얼의 전생을 이해하고 운명적 이끌림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대니얼보다 한 발 앞서 그녀를 찾아낸 이가 있었으니...그는 바로 전생의 악연이 끔찍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조아킴이었다.

전생의 악연이 현생에서도 악연으로 이어져 이제야 행복해지려는 둘 사이를 가로막다니...

아주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까.

 

환생이니, 전생의 기억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라, 아시아가 아닌 다른 지역의 작가에게서 이런 주제의 책이 나오리라곤 상상을 하지 못했었다. 과연 이 정서를 잘 녹여낼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기우임이 곧 밝혀졌다. 앤 브레셰어스는 아주 능숙하게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가로질러 닿을 듯 말듯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직조해냈다. 아득하면서도 신비로운 환생의 세계를 눈부셔하며 바라볼 수 있도록...541년의 북아프리카, 584년의 콘스탄티노플, 2006년의 버지니아주 호프우드, 1918년의 잉글랜드 해스턴베리 저택, 2009년의 인도 콜카타. 시공을 넘나들며 아름답게 수놓아지는 무늬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하면서도 기품 있는 무늬로 기억된다.

 

항상 쉽사리 패배하고 낙담하고 죽으면서 더 나은 다음 생만을 꿈꾸었던 대니얼이 소피아와의 완전한 삶을 경험할 수 있을까?

수없이 태어나고 수없이 죽으며 단 한 사람만을 기억한 대니얼의 기적같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디에 있든 너와 함께 있다는 걸, 나를 네게서 떼어놓을 힘은 이 땅과 이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기를. 너에 대한 내 사랑은 이토록 기나긴 삶에서 알았던 그 무엇보다도 진실해. -492

 

1000년이 지나도록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라면 무엇보다도 진실할 것임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단단하다는 금강석보다도 견고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이런 진실한 사랑을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울지라도 어딘가에 대니얼과 소피아라는 한 쌍의 남녀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된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 있음으로 해서 딱딱한 마음들이 조금씩 허물어질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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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겸애와 비공을 통해 이상사회를 추구한 사상가, 국내 최초 완역판
묵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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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부하려니 꽤 묵직한 묵자 [묵자]

 

 

 

사실, [묵자]는 제자백가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얼핏 얻어들은 지식으로, 겸애와 "묵수" 정도의 단어가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인데, 과연 내가 [묵자]를 읽어낼 수 있을까?

책을 열어보기도 전에 사실, 좀 떨었다.

 

 

책의 두께가 어마어마~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1000페이지를 넘어서는 압박감에 정신혼미!!

 

<묵공>꽤 오래 된 영화인데... 묵자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하며 이 두꺼운 책을 읽을까...고민하다가 영화를 찾아봤다. 잘생긴 유덕화의 얼굴이 나와서...반가웠다 ^^

막상 공부해보려고 책을 펼치니 원문의 해석은 별도로 치고라도 묵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책의 무게뿐만이 아니라 사상의 무게 자체도 꽤 묵직해서이다. 가볍게 웃으면서 시작했다가 점점 험악해지는 얼굴 표정^^

그렇기에 꽃미모를 간직한 유덕화의 얼굴로 묵자를 상상하면서 읽어나가기로 했다.

 

묵공

 

신동준 선생을 믿고 목차부터 차근차근 살펴본다.

 

 

 

이 책은 [제자집성 諸子集成]에 실려 있는 청대 손이양 주석의 [묵자간고 墨子閒詁](閒을 '한'이 아닌 '간'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를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묵자 53편의 내용을 손이양의 [묵자간고]와 일일이 비교하며 글자 하나하나를 정미하게 추적한 본격 주석서에 해당한다. 성격상 [묵자간고]의 완역본에 가깝다.-128

 

53편의 내용을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둘째 부류는 묵자사상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고, 셋째 부류는 흔히 <묵변> 내지는 <묵경>으로 불리는 것으로 '묵가 논리학'을 수록한 것이다. 다섯째 부류는 이른바 '묵자병법'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묵적의 무리는 원래 무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상적인 무사와는 달리 공격성을 띤 전쟁을 반대했고, 실용주의에 입각해 자신들의 직업윤리를 가다듬었다. 당시 세상을 덮고 있던 공자의 사상인 유가에 이어 두 번째 제자백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패업을 추구하던 그 때, 공자사상이 내세운 가치인 '인'과 동떨어진 속유들이 횡행하고 난세의 심도가 깊어졌던 그 때. 묵가는 노동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산 하나라의 우왕을 높이 성인으로 추존하며 '겸애'와 '비공'으로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묵가를 시조로 한 묵가 학단은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즈음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가족윤리와 군신의 덕목을 중시한 여타 제자백가와 달리 보편적인 인류애와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주창한 게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극히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사상, 극단적인 이상주의에 입각한 사상, 확고한 신념체게 속에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상국을 지상국에 세우고자 한 점 등은 묵학, 맹학, 주자학, 마르크시즘이 다르지 않으나 21세기 현재 맹학, 주자학,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했다.

유독 묵학만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안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며 이상을 지향하는 것이, 난세보다는 치세에 부합할 듯한 묵학은 21세기의 난세에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을 듯 보이지만 신동준은 큰 그림을 그려보이며 묵학을 반긴다.

천하의 이익을 고루 나누며, 천하 만민을 두루 사랑하고, 국가 간 갈등이 빚어질 때도 오직 방어를 위한 전쟁만을 인정한다.명실상부 '사랑과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뛰어난 요소들을 두루 지닌 묵학이 앞으로 한반도 통일 이후의 세계정세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고리타분한 사상으로만 여기고 묵혀두었던 묵학을 다시금 꺼내들어 오늘날의 정세에 맞게 이용하려는 이런 노력이 있어 "고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묵자의 사상은 크게 겸애주의, 비전주의, 절용주의로 나타낼 수 있다.

 [논어]처럼 후대 제자들이 묵자 사후 묵자의 언행을 기록하여 펴낸 책 [묵가] 안에서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

이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공자의 사상적 후계자를 자처한 맹자가 실은 공자사상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묵자사상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했음을 말하는 부분. 그만큼 묵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 되겠다.  

 

묵자는 비록 인격신에 가까운 '천지'와 '천의'를 들먹였지만 여타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합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른바 묵가논리학으로 불리는 <경 상, 하>, <경설 상, 하>, <대취>, <소취> 등의 6개 편에는 논리학을 위시해 광학과 물리학 등 과학기술에 관한 내용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거울 속의 영상은 물체가 거울에 가까워져도 함께 하고, 멀어져도 함께한다. 거리의 비례에 따른다. 영상이 함께 한다는 것은 곧 거울에 비치지 않는 게 없는 까닭에 영상도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경설 하, >97

 

 

묵학이 여타 제자백가의 학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논리학, 과학철학, 군사학, 도덕철학, 경제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등 거의 모든 부분의 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새삼 왜 난해하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묵수" 와 겸애, 절용만으로 묵자를 정의하기엔 그의 사상이 너무도 넓고 원대하다.

2400여 년 전의 사상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끌어올려 오늘에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이들이 고전을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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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계절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여기 붙박혀 있는데...

훌쩍 떠나긴 떠나되 색다르게, 특별하게 떠나고 싶은 마음을 책에 담아 골라본다.

 

 

 

1.

나는 자꾸만 딴짓 하고 싶다 - 중년의 물리학자가 고리타분한 일상을 스릴 넘치게 사는 비결

이기진 (지은이) | 웅진서가 | 2014년 7월

 

서강대학교 이기진 교수는 물리학자로서 매일 연구에 빠져 고리타분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험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딴짓에 빠져든다. 한 남자의 진지하고도 웃기며 고집스럽게 단조롭고도 비교할 수 없게 독특한 '딴짓'의 파노라마를 담은 책이다.

확~ 눈에 들어온다.

딴짓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할 때, 그러면서도 뭘 해야 좋을지 몰라 두리번거리게 될 때 이 책이 딱일 듯 싶다.

가수 씨엘의 아버지.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자유분방한 딸을 길러낸 사람이라면 딴짓도 뭔가 다를 것만 같다.

 

 

2.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

최종규 (지은이) | 숲속여우비 | 2014년 7월

 

책.빛.숲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과 빛과 숲은 같은 말이다. 책과 빛과 숲은 서로 같으면서 서로 다르다. 작은 책방지기가 작은 책방을 일구며 살아온 작은 이야기를, 작은 책손이 작은 발걸음으로 찾아온 스물세 해 이야기를 <책빛숲>에 살포시 담았다.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책, 빛, 숲을 동급으로 놓은 이우를 알고 싶다. 흑백의 사진이지만 책이 있어 더욱 정겹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인 아벨서점과 나란히 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우리네 헌책방이 소개될까? 궁금해진다.

 

 

 

3.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로버트 고든 (지은이), 유지연 (옮긴이) | 펜타그램 | 2014년 7월

 

인류학자가 쓴 독특한 여행안내서이다. 인류학적 관점 즉 역사적으로 그들이 축적해 온 인류학적 방법론과 경험을 가지고 평범한 여행자들이 해외여행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지 안내하는 색다른 여행서이다.

 

 

세계여행은 이제 너무나 손쉽게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신혼여행도 외국으로, 휴가여행도 가까운 홍콩이나 일본으로 떠나는 시대이니 말이다. 조금은 촌스러워 여행을 가더라도 어떤 생각을 하고 떠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게 "인류학자처럼"이라는 말이 쇼킹하게 다가왔다. 일상에서의 탈출보다도 멋져보이고 폼나는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일단 배우고 나서 써먹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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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김호경 지음, 전철홍.김한민 각본 / 21세기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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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순신을 알고 싶으냐? [명량]

 

정유 9월 16일.

왜선 330 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싸므로 공이 제장을 인솔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왜장 馬多時 를 참하고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충무공전서 8권>

 

이것이 이순신의 23전 중 하나인 명량대첩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수많은 해전 중 왜 유독 "명량"에 관심을 가지는가?

세계 3대 혹은 4대 해전에 속할 만큼 유명한 "한산대첩"을 두고 말이다.

아마도 12대 330 이라는 수적 열세에서 승리를 일궈내고,울돌목의 지리적 이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승리를 일궈낸 전투라 매력적으로 비쳐졌으리라.  

이 책 , 혹은 영화는 이순신의 해전 중 "명량"에 초점을 맞추지만, 단 하나의 "명량" 해전으로도 인간 이순신의 모든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꿈을 꾸면 일기에 기록하며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부모님에게는 지극한 효성을 보이며 아들들에게는 꼿꼿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 하지만 전장에서는 명석한 판단력과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야말로 "명장" 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순신.

"충"을 바쳐야 할 대상인 임금 선조로부터 한 때 버림받았고, 중앙정치의 음모로 인해 일신이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의리"를 위해 싸우는 사나이였다.

 

"무릇...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라야 하고, 그 충은...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

 

이 한 마디가 그의 수많은 명언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의 백성에 대한 의리는, 수군을 파하고 권율 장군 휘하로 들어가 육지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바다를 지킨 책임감에서 알 수 있다.

"명량"은 이순신의 의리와 백성에 대한 충과 명장으로서의 훌륭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완벽한 단 하나의 "고갱이"이다.

 

애당초 명분이나 이익도 없이, 단지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시작되어 무수한 생령들의 목숨만 앗아갔다고...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전쟁이었고 명의 개입으로 화친을 약조하였으나,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을 받고 치욕을 느낀 도요토미는 다시금 총공격을 명하였다.

 

임진란을 치러내는 동안 수많은 공을 세우고 영웅으로 급부상한 이순신은 확고한 신념으로 "충"의 본분을 다했으나 그런 그가 자리보전에 급급한 중앙관료들에게는 눈엣가시로 여겨졌나 보다. 백의종군.

이순신이 한성 옥에 갇힌 동안 그 자리를 원균이 맡았는데,

7년간의 왜란을 통하여 조선 수군이 당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참패인 칠천량 전투에서 거북선이 모두 바다에 가라앉고 원균은 죽음을 맞이했다.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앞서의 전투에서 도망쳐나온 배설이 끌고 온 12척의 전선이 다였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36

 

 

선조는 이순신에게 바다를 맡겼으나 이순신에겐 12척의 배가 다였다. 그나마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거북선 한 척을 수리하였으나 도무지 승산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는 장졸들이 불을 놓아 거북선을 태워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진영을 불태우고 배수의 진을 쳤다.

"대체 이 강한 두려움을 ..., 어찌 이용하시겠단 말입니까."-191 

 

 

현란하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갑옷을 입고 귀신 가면 투구를 쓴 해적왕 구루지마 미치후사.

이순신에게 죽음을 당한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 외에 유약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조선을 삼키겠다는 야욕을 품고 이번 전투에 참전했다.

한편 와키자카는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는 구루지마가 이순신을 처치해주면 큰 공은 자기가 세울 요량으로 구루지마를 지켜보기만 하는데...

 

12척의 판옥선과 330여 척의 세키부네, 아타케부네가 드디어 "명량"에서 맞붙었다.

거북선을 잃은 채 급격히 사기가 저하된 장졸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선 이순신이 믿는 것은 오로지 울돌목의 회오리같은 물살과 장졸들의 "의지" 뿐.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마음을 움직인 진정한 "명장"의 지휘 아래 벌어진 "명량 해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고 영화다.

태풍이 올라오느라 비바람이 거세다.

진도의 팽목항에도 태풍이 휩쓸고 가겠지.

이순신 같은 "명장"을 만나지 못해 물 밑을 헤매고 있을 영혼들이여, 부디 잘 견뎌주길.

이순신 같은 명장은 그리 자주 나오는 영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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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돌고 돌고 돌아... [그림자밟기]

 

그림자는 혼자서 움직이지 못한다.

"몸"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따라다닐 뿐이다.

몸이 불분명한 제스처를 취하면 그대로 흐리멍덩한 모습을 재생산한다.

확고한 의지로 뿌리치거나 단호하게 떨쳐내버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림자 또한 칼같이 그 대상을 뿌리치고야 말 텐데.

제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을 한 그림처럼 서로의 끝을 잡고 뱅뱅 맴을 도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레드 다이어리'와 '블루 노트북' 의 비밀을 품은 채 남편 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주인공 아이린의 삶의 궤적을 따라다니기가 힘겨웠다.

 

당신이 내 작업실로 내려와 오래된 서류 뒤에서 내 일기를 꺼내는 광경을 상상하면 참기 어려운 분노가 치민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반칙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이 일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본다. -70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을 보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더욱 쉬엄쉬엄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유사성과 대칭성을 사랑한 탓에 젊은 시절, 서로에게 속수무책 빠져들수 밖에 없었던 길과 아이린.

둘 다 홀어머니 손에 자랐고 둘 다 아버지를 알지 못했으며, 둘 다 혼혈 원주민이고 심지어 크리족과 치피와족의 피가 섞였다. 둘 다 논쟁을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고...

또 둘 다 친밀감을 금기시하고 살아왔지만 취하지 않은 채로 처음 섹스를 했을 때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이고 친밀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여!

뒤틀릴 대로 뒤틀린 것을 알게 되었지만 또다시 여행과 출산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벌써 셋이나 된다.

길은 화가로, 아내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아메리카"연작 시리즈로 꽤나 잘 팔리는 작가의 대열에 끼게 되지만 주류로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아내의 나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그리지만 대중의 눈에 발가벗겨진 채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모델인 아내의 내면을 살피지 못한다.

 

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길이 문손잡이를 잡고 대꾸했다. 서글프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걸 가졌는지 모르고 있어. -129

 

급기야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을 구속하고 집착하면서 일기장을 훔쳐 보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폭력을 쓰기도 한다. 이미 이 가정은 평범함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심하게 기울어져 있고 삐걱거리기 시작하며 누군가 조금만 풀썩이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어떻게든 남편과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상담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도무지 둘 사이엔 상담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벽과 벽은 도무지 서로 맞선 채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둘 사이에 무슨 앞날이 남아 있을까.

  

남편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레드 다이어리'에 써내려간 조작된 그녀의 현실을 남편은 금방 간파해내고 둘은 언제 그렇게 대립했냐는 듯 폭소를 터뜨리고 사랑을 나눈다. 이혼 서류를 내미는 아내를 보고 남편은 울면서 그녀를 강간한다. 신고하라는 혈육의 조언에도 온 가족이 함께 불꽃놀이 구경을 간다.

알코올에 의존해야만 하는 아이린이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아이들을 보며 이제는 이혼을 결심하겠지. 했는데...

이미 파국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있음에도 아이들을 위해서 남편 길을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한 아이린 때문에...소설은 예상치 못했던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오빠 플로리언보다, 남동생 스토니보다 내면이 단단했던 딸, 리엘은 인디언 조상들의 역사를 읽으며

깊이있고 강인하고 영민하고 참된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리엘의 목적은 아빠의 힘을 빼앗는 것이었다. 리엘은 과연 그렇게 자란 것 같다.

이 소설은 엄마인 아이린이 남긴 레드 다이어리와 블루 노트북에 자신의 기억을 더하고 이모 루이즈의 증언을 덧붙여 리엘이 완성한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인지 절절하고 슬프지만 함부로 욕할 수 없는 고귀함을 품고 있다. 나의 부모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하는 듯,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리엘의 어조는 담담하고 당당하기조차 하다.

 

깊은 어둠에 푹 잠긴 이야기라 며칠을 어두운 표정으로 있었다.

마침내 한 손 사이로 흘려보낼 재만 남긴 채 타오른 불꽃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본다.

이렇게 끝이 났구나!

 

부부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둘은 비무장지대를 들먹이며 비유를 통해 본질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저는 아이린과 제가 비무장지대의 양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갈라선 채 날카로운 철조망을 세우고 살벌하게 감시하면서 첩보전을 펼치고 있죠. 우리 사이에는 저와 제 아내의 그리움과 사랑의 띠가 있습니다. 때 묻지 않은 채로요. -193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가 품은 천혜의 아름다움 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속은 뻥뻥 터지는 지뢰밭임을 알고 있는지.

길과 아이린. 비무장지대를 걷지 말고 날아다니며 화해하고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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